<책머리에>
해석자는 이미 완성돼 있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잉태하고 있는 것을 끌어내면서 전달한ㄴ다. 그러므로 해석은 일종의 창조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지만, 잠재적 유에서 현실적 유를, 감각적 유에서 논리적 유를 창조해낼 수는 있다.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다. 작품을 ‘까는‘ 것이 아니라 ‘낳는‘ 일이다. 해석은 인식의 산파술이다.
모든 해석자는 더 좋은 해석이 아니라 ‘가장‘ 좋은 해석을 꿈꾼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단언을 즐기는 사람들도 당사자의 면전에서는 잘 그러지 못합니다. 어쩌면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늘 작품을 앞에 세워두는 글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5-6쪽
<더 헌트>
*중세의 마녀사냥이 광기의 산물이면
이 영화의 그것은 **‘이성‘의 결과라는 것.
자신이 거짓말을 했음을 뒤늦게 실토하는 클라라에게 그녀의 엄마는 말한다. "끔찍했던 기억을 네 무의식이 차단한 거야" 이런 믿음에는 어떠한 악의도 포함돼 있지 않다. 모두가 차분하게 자신의 이성을 사용한다.
그런데, 누구도 잘못하고 있지 않는데, 모든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영화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성의 역설이다. 이 역설을 **합리적 부조리라고 불러야 할까.
이것은 광기의 지옥이 아니라 **이성의 지옥이다. 마녀사냥을 개탄하며 비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며 우리에게는 이성이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현대판 마녀사냥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할 줄 모르는 이들의 무지와 몽매를 답답해하며 조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우리가 마음껏 비난하고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지 ‘복장이 터지는‘ 종류의 답답함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인간들의 집합적 이성이 최악으로 몰고가는 ‘합리적 부조리‘의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바닥없는 벼랑을 바라보는 막막함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성은 때로 방황할지언정 끝내 빛의 출구를 찾을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는, 이성의 오작동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을 막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깨달음이 들어선다.
**광기의 창궐로 열린 지옥의 문은 이성으로 닫을 수 있지만, 이성의 집단적 사용이 자체의 한계 때문에 열어버린 지옥의 문은 무엇으로 닫을 수 있을 것인가.
12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