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X, 그것은 에티카>
"작가는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는가‘로 결정된다. 소설가 쓰지 히토나리의 매력전인 단언이다.
윤리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를 도덕이라는 오염된 문제틀로부터 빼내와야 한다.
***도덕은 사회가 나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하면서 강제하는 습속에 가깝고, 윤리는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명령이라고 칸트에 기대어 말한 것은 가라타니 고진이었다.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 규준을 근거하는 강제적 규율이 도덕이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내재적 규준에 근거하는 임의적 규율이 윤리라고 스피노자에 기대어 말한 것은 들뢰즈였다.
어떤 식으로 말하든 우리에게 자유, 선택, 책임의 세계를 열어놓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윤리라는 층위다. 그리고 그것들 없이 주체는 성립될 수 없다. 윤리의 장에서 우리는 비로소 주체일 수 있다.
어쩌면 주체의 수만큼이나 많ㅇ은 윤리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좋다. 작가는 ‘에티카 ethica를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는가‘로 결정된다.
142쪽.
<당신의 x, 그것은 에티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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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이 이와 같은 의미의 ‘윤리‘를 사유하기 시작한 시점을 묻는 일은 가능할까? 가능한 한 근과거로 당겨잡는다면 90년대 초반의 지형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에게 선택과 행위의 준거를 제공해주는 이념이 있었던 시대는 차라리 ‘좋았던 옛 시절‘이었다. 그러나 **90년대가 되면서 이념이라는 좌표는 희미해졌다.
***좌표가 사라지면 자유가 오는 것이 아니라 좌표를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온다. 폐허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 ‘자기 입법‘의 자유와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비로소 도덕이 아니라 윤리를 사유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작가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윤대녕은 ‘나‘라는 개별적 주체의 기원을 탐문하면서 주체란 외상적 기억의 상실을 통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구멍난 존재‘라는 사실을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목가‘라는 형식을 통해 보여주었다.
신경숙은 ‘타자의 얼굴‘(레비나스)과 대면하고 타자를 용납하는 일의 지난한 종교성을 언어화하면서 ‘레비나스의 시대‘(바디우)와 공명했다. 장정일은 풍속/법의 불안정한 위선을 천진난만한 외설로 폭로하면서 바스티유의 사드 Sade를 반복했다.
이 세 작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어떤 윤리의 장을 개시했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이 **세 작가는 각기 주체, 타자, 큰 타자에 대해 탐구하면서 윤리학의 삼각형을 구성했다.
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