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텍스트
<작품에서 텍스트로>는 텍스트론의 이론적 바탕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글이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작품〉(oeuvre) 이 단일하고도 안정된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시니피앙들의 짜임이 곧 텍스트(texte)이다.
작품은 항상 상징적인것/비상징적인 것, 정신/물질 등의 이분법적인 구조로서, 지금까지 해석비평이 추구해 온 것이 항상 그 마지막 시니피에, 총체적이고도 단일한 의미의 발견과 재구성에 있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이 지니는 결정적이고도 고정적이며 목적론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선조적인 로고스 중심주의에 입각한 작품이라는 개념으로는 의미의 흔들림과 의미를 이루고 있는 그 다양한 층과 이탈을 포착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바르트는 크리스테바 작업의 도움을 받아 텍스트라는 개념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8쪽
1. 텍스트 (2)
텍스트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시니피앙의 다각적이고도 물질적, 감각적인 성격에 의해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언어학이 언표·의사소통 · 재현의 산물이라면(크리스테바의 요어로는 현상 텍스트), 텍스트는 언술행위 · 상징화 · 생산성 (크리스테바의 용어로는 발생 텍스트)의 영역이다.
바르트가 <이야기의 구조적 분석입문>에서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이 바로 이런 현상 텍스트라면, 《S/Z)에서 목표로 하는 것은 의미작용의 생성과정인 발생 텍스트이다. 따라서 작품과 텍스트, 현상 텍스트와 발생 텍스트의 구별은 시간적 상황이나 작품의 현대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언어를 작업하는 과정 속에서 체험되는가 아니면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는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작품은 소비의 대상이나,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에서 구해 내어 우희·작업·생산·실천으로 수용하게 한다.
이와 같은 텍스트와 작품의 구별은 테리 이글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조주의에서 후기구조주의로의 움직임은 부분적으로는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움직임이다」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텍스트론에서의 저자의 위치는 어떤 것일까?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은, 텍스트 안에서 저자의 자리를 배제하고 독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선지자적인 글이다.
이 글은 푸코의 <저자란 무엇인가>(1969) 와자주 비교 연구되는 글로서, 푸코가 저자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바르트는 텍스트에서의 저자의 배제와 독자의 탄생을 다루고 있는 점이 다르다.
바르트는 우선 저자가 현대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란 중세 이후에 종교개혁의 개인적 신앙, 합리주의 · 실증주의와 더불어 생겨난 자본주의의 소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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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텍스트 (3)
그러나 말라르메와 더불어 이런 저자의 제국은 흔들리기 시작하며, 글쓰기를 위해 저자를 제거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 발레리 · 프루스트 · 초현실주의 등은 저자의 이미지를 탈신성화하는 데 공헌한다.
언어학 역시 언술 행위가 하나의 텅 빈 과정이라는 것을, 대화자들이라는 인간이 없이도 완벽하게 기능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여기다 바흐친의 **상호 텍스트 개념은 우리에게 저자가 더 이상 글쓰기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글쓰기기에는 기원이 부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저자라는 개념은 이제 설 자리가 없으며, 다만 여러 다양한 문화에서 온 글쓰기들을 배합하 며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scripteur)가 존재할 뿐이다.
『저자를 계승한 필사자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정념이나 기분·감정·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의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 거기서부터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린다. **삶은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책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이다.』(저자의 죽음, 본서 33쪽)
그러므로 텍스트를 해독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글쓰기는 끊임없이 의미를 제시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의미를 비우기 위해서이다. 이제 이런 저자의 배제는 독자의 탄생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독자는 심리나 역사가 부재하는, 다만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흔적들을 모으는 누군가일뿐이다. 글을 쓰는 <나>가 종이 위에 씌어진 (나)에 불과하듯, 독자도 글을 읽는 어떤 사람에 불과하다. 독자는 그의 일시적인 충동이나 기벽·욕망에 따라 텍스트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해체하는 자이다.(저자의 죽음, 본서 33쪽)
이렇게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을 선언하고 난 바르트는 저자와 독자, 글쓰기와 글읽기, 창작과 비평, 실천과 이론 등 그 이분법적인 경계를 파기하고, 즐거움의 대상으로서의 텍스트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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