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경우> 서문
**한 철학자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에도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자기가 사는 시대를 자기 안에서 극복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격력한 싸움을 벌이는 대상은 무엇인가? ** 그를 그 시대의 아들이게끔 만드는 것이다! 자! 나는 바그너만큼이나 이 시대의 아들이다. 내가 한 사람의 데카당이라는 말이다.
11쪽.
바그너의 경우 (2)
내가 가장 깊이 몰두하고 있는 것은 사실 데카당스라는 문제이며,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다. ‘선과 악‘은 이 문제의 한 가지 변형일 뿐이다.
몰락의 표지를 응시하는 자는 도덕을 이해하며 - 도덕이라는 가장 신성한 이름과 가치 정식들 밑에 어떤 것이 숨겨져 있는지를 이해한다 : 황폐해진 삶과 종말에의 의지와 큰 권태가 거기에 숨 겨져 있다는 것을, 도덕은 삶을 부정한다………
이런 과제를 위해서나는 나를 단련시킬 필요가 있었다 : - 바그너와 쇼펜하우어 그리고 현대적 ‘인간성‘ 전체를 포함해서 내게 들어와 있는 온갖 병증에대항하는 것이 필요했다. - 시대적인 모든 것과 시대에 맞는 모든것에 대한 깊은 소원(陳遠), 철저한 냉각, 깊은 각성이 필요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의 눈을, 인간의 모든 사실을 엄청난 거리를 두고 개관하는 그의 눈을 인간의 모든 사실을 자기 아래에 있는 것으로 굽어보는 눈을 최고의 소망 사항으로 하는 일이 필요했다. .…… 이러한 목표 - 이 목표를 위해 과연 어떤 희생이 불필요하다. 고 할 것인가? 어떤 자기 극복‘ 이! 어떤 자기 - 부정 이!
나의 가장 큰 체험은 병의 치유였다. 바그너는 내가 가졌던 병증 들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었다.
** 철학자는 자기가 살아가는 시대를 마음에 걸려 하지 않으면 안 되며 - 그러기 위해 그는 그 시대를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현대성은 바그너를 통해서 자신 안에 있는 가장 내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성은 자신의 선한 면도 숨기지 않고, 악한 면도 숨기지 않는다. 현대성은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12 - 13쪽.
본능이 자신을 합리적으로 만들면 본능은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본능이 자신을 합리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에 의해 본능을 스스로를 약화시키기 때문이지요.
55쪽.
바그너의 경우 후기
모든 시대는 자신이 갖고 있는 힘에 의거해 그 시대에 허용할 수 있는 덕과 금지해야 하는 덕 또한 결정한다. 한 시대는 ‘상승하는‘ 삶의 덕을 갖거나 아니면 그 시대 자체가 ‘하강하는‘ 삶이다.
: 그래서 데카당스 미학이 있고, 고전적인 미학이 잇으며 - ‘미 그 자체‘라는 것은 관념론 전체가 그렇듯이 하나의 망상이다.
소위 말하는 도덕적 가치라는 좀더 작은 영역에서는 주인도덕과 그리스도교적 가치 개념을 가진 도덕과의 대립보다 더 큰 대립을 찾아낼 수 없다.
: 후자는 철두철미하게 병든 토양에서 자란다(-복음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 그려내는 생리적 유형들과 똑같은 유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반대로 주인도덕(‘로마적‘ 이고, ‘이교적‘ 이고, ‘고전적‘이며, ‘르네상스‘적인)은 제대로 잘되어 있다. Wohlgerathenheit는 것에 대한 표현, 상승하는 삶에 대한 표현, **삶의 원리로서의 힘에의 의지를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그리스도교 도덕이 본능적으로 부정하듯이 ( ‘신‘, ‘피안‘, ‘탈아‘ Entselbstung‘ 한갓 부정일 뿐), 주인도덕은 본능적으로 긍정한다.
**주인도덕은 자기의 충만함을 사물들에 떼어 나누어준다. 그것은 세상을 신성화하고 아름답게 만들며 합리적으로 만든다. 그리스도교 도덕은 사물의 가치를 빈곤하게 하고 창백하게 만들고 추하게 만들어버리며 세상을 부정한다.
주인도덕을, 고귀한 도덕을 곁눈으로 바라보면서( 아이슬랜드의 전설은 거의 그 도덕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다 - ), "비천한 자의 복음" 이나, 구원의 필요성이라는정반대되는 가르침을 입에 올리다니!
67쪽.
바그너의 경우 후기 (2)
바그너가 그리스도교인이었다면, 리스트는 아마도 교부였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은 자기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 자아는 항상 가증스러운 것이나 - ***고귀한 도덕, 주인도덕의 뿌리는 반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승리의 함성을 올리는 긍정이다. 그것은 삶의 자기 긍정이고, 삶의 자기 찬미이며, 마찬가지로 숭고한 상징과 실행 방법을 필요로 한다.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 있는 이러한 순진무구, 거짓 속의 이러한 ‘선한 양심‘은 오히려 현대적인 것의 전형일 것이며, 거의 현대성에 대한 정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모순되는 가치들을 제시하며, 두 의자 사이에 걸치고 앉아, 그렇다와 아니다를 한 번에 같이 말해버린다.
69쪽.
우상의 황혼
***8. 삶의 사관학교로부터 - 나를 죽게 하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77쪽)
7. 어떤 것인가? 인간이 신의 실책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신이 인간의 실책에 불과한 것인가?
8. 너 자신을 도와라. 그러면 모두가 너를 도울 것이다. 이웃 사랑의 원리.
31. 밟힌 지렁이는 굼틀거린다. 똑똑한 일이다. 지렁이는 그렇게 해서 또 다른 것에게 밟힐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다. 도덕언어로 말하면: 순종한다 -
해설 by 백승영
1888년. 이 해는 니체의 여섯 작품이 한꺼번에 마치 거센 폭풍처럼 밀어닥친 해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니체가 10여 년간이나 지속되는 긴 어둠의 길로 들어서기 바로 직전이기도 하다.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디오니소스 송가>를 1889년 1월 3일에 완성시킨 직후 니체는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쓰려져 버리니, 그가 흡사 자신의 운명을 예감해서 마지막 혼신의 힘을 1888년 한 해에 기울였던 것은 아니었나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면 철학자 니체는 무엇을 위해 18889년 한 해에 자신의 마지막 정열과 혼을 불태웠는가? 현대 세게와 현대성에 마지막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제 현대 세게의 얼굴에 대고 고함을 질러댄다. 그의 모든 논거가 현대에 대한 거부와 구역질 사이에서 터져나온다. 그는 현대 세계의 얼굴에 대고 데카당스!라고 부르짖는다. ***현대 세계의 얼굴에 대고 그리스도교!라고 부르짖는다.
566쪽
해설 (2) by 백승영
***결국 철학자 니체의 최후의 폭발적인 분노는 데카당스로 향해있었고, 데카당스라는 문제에 대한 열쇠 역할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였던 것이다. 데카당스 시대인 현대에 대한 분노를 그는 그리스도교라는 현대성의 공통의 뿌리를 드러내고 공격하면서 표출시킨다.
이러한 격정 안에서 니체는 오랫동안 기획했던 《힘에의 의지 또는(모든 가치의 전도〉라는 제목을 갖게 될 책을 저술하는 것을 포기하게된다.1) 이 결단이 니체가 엄청난 체계적인 작업을 위한 그 자신의 힘이부족함을 인식해서든, 아니면 자신의 기획이 원칙적으로 수행 불가능했 음을 인식해서는 그는 이제 그 기획 대신 다른 작품들을 통해 현대 세계에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다. 그 좌절된 저술 기획의 일환으로 이미 작성되어 있던 소묘들의 일부가 우상의 황혼》과 이것의 쌍둥이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안티크리스트>라는 제목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특히 그리스도교는 예술을 부패시키는 주범이자 현대의 도덕과 세계관과 형이상학의 공통된 뿌리로, 노예 근성을 지닌 인간들의 큰 반란을 불러일으키고 민주적인 평준화의 길을 닦는 주범으로 공격당한다. 결국 그리스도 교는 삶을 부정하고, 긍정하는 충동을 억압하는 데카당스 현대성의 전형으로 니체의 분노를 산다.
이보다 먼저 《힘에의 의지가 완전히 포기되기 전인 1888년 초에 《바그너의 경우가 완성되고, 니체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현대 데카당스의 문제를 바그너 예술을 그 전형으로 삼아 공격하면서 풀어보려고 한다. 바그너는 데카당스 예술가이고, 현대 예술이 바그너적인 분위기로 점철되어 있었기에 니체는 현대 예술을 생리적으로 참이낼 수 없었다. 그는 바그너를 음악을 병들게 한 존재로 등장시키고, 파르지팔>을 비제의 카르멘>에 대비시키며 논박한다. 567쪽
<바그너의 경우> 해설
<바그너의 경우>에서 니체는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한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고 그를 공개적으로 논박하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서 바그너라는 이름은 전형적인 데카당스 예술가이자, 데카당스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성에 대한 총괄 개념으로 등장한다.
***니체는 자기의 시대, 즉 데카당스 시대를 자기 스스로 경험한 후 자기 안에서 극복하여 시대를 초월하는 철학자이고 싶어 한다.
그런 철학자 니체의 눈에 바그너는 음악을 병들게 한 자이자, 음악이 데카당스 예술로 변질되어가는 운동을 가속시킨 주범이며, 데카당스 미학의 설교자로 미친다.
바그너의 배우 기질이나 음악의 연극화나 극장에서의 성공뿐만 아니라, 바그너의 예술이 이상주의를 무기로 해서 지쳐 있는 것, 죽어버린 것, 삶에 위협적인 것, 세계 비방적인 것을 보호하면서 이상이라는 허울하에 반계몽주의를 설파하고 있기때문이다.
***더 나아가 데카당스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장려하는 것, 즉 황폐해진 삶의 토양에서 자라는 것, 초월과 피안이라는 날조된 것을 바그너의 예술이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바그너는 전형적인 데카당스 예술인 현대 예술가로 지목된다.
***이런 데카당스 예술과 미학은 현대의 도덕을 표현한다. 즉 하강하는 삶의 도덕이자, 삶과 세상을 부정하고상승하는 삶의 도덕을 증오하는 도덕을, 니체는 이런 데카당스 미학과 이런 데카당스 예술에 이별을 고한다. 삶의 자기 긍정과 자기 지배를 장려하는 주인도덕을 표현해주는 아름다운 예술과 위대한 예술로의 회귀를 위해, 고전 미학으로의 회귀를 위해, 자연과 건강함과 명랑성과 젊음과 덕으로의 회귀를 위해
5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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