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종교의 전망 (1)
현대 세계에서 종교는 여전히 중요하며 영미권 무신론자들의 (그 중요성을 증언해주고 있는) 새로운 전투성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하기 까지 하다.
** 어떤 측면에서는 1960년대 이후 종교가 극적으로 부활했다는사실에 전혀 의심을 품을 수가 없다.
** 종교가 비록 지식 세력은 아니지만뚜렷하게 주요 정치 세력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그러하다.
거대한 ‘이란혁명‘은 18세기의 미국 혁명 이래 종교적 측면에서 행해진 최초의 혁명으로,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에 이르는 거대한 혁명들뿐만 아니라 사회변화를 위한 운동들에 영감을 주었던 계몽주의의 담론을 내던져버렸다.
유대인들 사이에서건 이슬람인들 사이에서건 똑같이, 중동의 정치는 신성한 경전의 정치가 되었으며 놀라운 정도로미국 정치도 그렇게 되었다.
예전의 전통과는 전혀 별개로, 이런 경향이 20세기의 새로운 점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기는 쉽다. 전통적으로 시오니즘에 적대적이던 정통 유대교는 1967년의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승리가 기적으로 인식되자 시오니즘에 동조했으며, 일부 랍비들이 모든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귀환하는 일은 구세주가 도래한 후에야 해야 할 것이라는 확신을 버리는 행위를 정당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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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종교의 전망 (2)
이집트의 이슬람 형제단에서 떨어져 나온 한 극단주의 분리파가 아주 편협한 형태의 정통주의 바깥에 있는 사람을 누구든지 "배교자" 로 죽이는 행위에 대해서 신학적 정당화를 재개한 것은 **1970년대 초가 되어서이다. 무고한 자들을 죽이는 일을 정당하게 인징한 것은 **1992년에나 내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전통적 이슬람 정치체제가 아니라 신정적 형태의 근대 영토국가를 도입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관점에서 정형화된 정치가 마우레타니아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강한 인상을 주면서 복귀했다. 터키는 이슬람 대중정당이 후원하던 군사적 세속체제에서 눈에 띌 정도로 멀어져갔다. 1980년 강력한 힌두 정당의 창설(1998-2004년에 집권)로 힌두교의 다원성을 하나의 배타적이고 불관용적인 정통주의로 환원시키는 움직임이 부각되었다. 현재의 세계 정치에서 어느 누구도 이런 조류를 과소평가하지 않으려고 한다.
종교적 신앙과 관행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흥기하는 일이 있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그보다 덜 분명하다. 한 종파에서 다른 종파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이동은 특히 기독교 내에서 있어왔다.
빠르게 팽창하는 복음주의적 그리고 성령강림주의적/카리스마적 프로테스탄티즘 공동체 내에서 종교적 열정의 증가는 아메리카와 그밖의 지역에서 뚜렷하다. 1970년대 이래 인도네시아처럼 예전에는 매우 평온한 지역들에서 이슬람교가 뒤에서 이 문제들에 대해서 잠시 언급할 것이다.
그렇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지난 세기에 특히 인상적으로 약진했던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주요 세계 종교들이 1900년 이래 지반을 많이 넓혔다고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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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종교의 전망 (3)
물론 소련과 제도적으로 무신론이었던 그밖의 국가들이 붕괴되면서 탄압받았던 종교가 재등장하게 되었으며, 러시아에서는 다시 공식적으로 국교가 되었다. 비록 폴란드를 예외로 한다면 공산주의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유일신 신앙이 세속주의가 아니라 전통적인 애니미즘 신앙을 대신하면서 지반을 확장해갔다. 비록 이런 애니미즘 신앙이 때로는 새로운 유일신교와 과거의 제의를 뒤섞어 결합하는 형태로 빚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직 아프리카의 세 나라에서만 토착적인 혼합 신앙이 연전히 다수를 대표하고 있다.
세속화된 세구에서는 이전 신앙의 위축을 대체할 목적으로 새로운 제의를 만들거나 기이하고 전반적으로 모호한 영성적 제의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종교가 공적인 장에서 이렇게 이론의 여지없이 흥기한 사실은 근대성과 세속주의가 협력하면서 진격할 것임이 틀림없다는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견해를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사실, 사상가들과 활동가들 그리고 실제로는 많은 역사가들이 종교가 공적 담론의 유일한 언어를 제공하던 그 시절 이래 가장 많이 세속화된 사람들의 사상이 등장해온 정도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그들은 19세기와 20세기의 세속화가 끼친 양적인 충격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거나 아니면 오히려 거기에 성공적으로 대항했떤 광범한 부류의 사람들 - 주로 여성과 농민 -을 무시했다.
기본적으로 19세기의 세속화는 그것의 정치적 이면인 반교권주의와 마찬가지로 교육받은 중간 및 상층 계급 남성들과 평민 정치활동가들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역사가들이 젠더에, 혹은 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 운동이 농촌에서 미친 영향에 관심을 기울였는가? 그들은 또한 19세기 기업가 계급 및 자본주의 관게망의 형성에서 종교가 수행한 엄청난 역할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경건파 직물 수공업자들, 특히 위그노, 유대인 혹은 퀘이커 은행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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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종교의 전망 (4)
사회적 격변의 시기에는 종교가 마르크스가 말한 "무정한 세게의 심정"이 되는 그런 사람들에게 역사가들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요컨대, 19세기 서구의 역사를 일련의 종교적 진격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 그럴 수 있기는 하지만, ‘근대화와 세속화‘가 분명히 지난 두 세기 반 동안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함게 진행되었으며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 과정은 지난 반세기 동안 오히려 더 빨라졌을 수도 있다.
하나의 신앙에서 또다른 신앙으로의 개종이 서구에서 진행되는 종교의 의무와 관행의 지속적인 쇠퇴를 감출 수는 없으며 신분 간의 결혼 허용이 하나의 지표라면 인도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사실 이런 경향은 1960년대 이래 가속화되었다. 이는 기독교 종교 중 최대 종파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뚜렷한데, 그런 점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중대한 위기를 겪고 있다.
16세기와는 달리, 이 교회에 대한 위협은 종교적 이견뿐만 아니라 1970년대 이래 이탈리아 여성들이 산아제한으로 대거 전환했던 경우에서처럼 무관심이나 무언의 불복종에서 찾을 수 있다. 가톨릭 사제 지원이 1960년대 중반에 급갑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더불어 종교기관의 종사자 수도 급감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그 수가 1965년 215,000명에서 2010년 75,000명으로 떨어졌다.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서 더블린 교구는 2005년에 성직을 수행할 단 한 명의 신부도 구할 수가 없었다. 현 교황(베네딕트 16세) 자신의 고향으로, 전통적으로 신앙심이 깊은 레겐스부르크에서는 그가 방문했을 때 고작 75명만이 그를 환영하기 위해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동조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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