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왕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들

루이 14세는 1664년부터 일부 지방에서 귀족 조사 사업을 시작했고, 곧 이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자신이 진짜 귀족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1667년 포고령을 통해, 1560년부터 당시까지, 그러니까 100여년 동안 귀족 자격을 유지해왔음을 입증하는 문서들을 제시하라고 명령했다. 

대귀족들은 집안에 내려오는 각종 문서들, 즉 토지문서라든지 결혼계약서 혹은 국왕이 특권과 명예를 허락해준다는 교서 같은 문서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급 귀족 가문에서는 갑자기 그런 문서를 내놓는 게어려울 수 있었다.

 실제 가난한 지방 귀족들 중에는 문서를 제시하지 못해 귀족 지위를 박탈당하고 평민으로 강등되어 토지세를 내게 된 사례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귀족 수가 대폭 감소했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에서는 귀족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다른 지방에서도 대개 25~40퍼센트감소했다.

 동시에 귀족의 서열과 작위를 체계화했다. 왕실 직계가족이 가장 높은지위를 차지하고, 그다음은 방계가족, 그다음은 공작 등의 순으로 서열화했다. 이제 귀족은 지방에서 그냥 고급하게 산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국가에 의해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귀족 가문은 스스로 만들어지기보다 국왕에 의해서만 존립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사회 상층이 되려면 고향을 떠나 군대에서 경력을 쌓든지 궁정으로 가야 했다.

이렇게 해서 국왕과 귀족의 관계가 새로이 정립되었다. 국왕의 인증을 받아야 진짜 귀족이고, 국왕의 재정에 기꺼이 돈을 대면 큰 수익을 얻를 수 있으며, 국왕이 거주하는 궁정에 줄을 대면 고위직을 얻게 된다. 모두 국왕을 흠모하고 국왕의 은총을 갈구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태양왕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되어갔다. 누구나 태양왕이 거처하는 베르사유궁으로 가서 한 자리 잡고 한 줄기 햇빛을 쐬고 싶어 했다. 그곳에서 국왕은 지상 최곡의 권력자처럼 행세하고, 입궐을 허락받은 귀족은 그런 국왕을 마치 신처럼 떠받드는 척했다. 베르사유궁은 절대주의를 표현하는 종합 예술 무대였다.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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