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아탑 취급을 받는 대학 울타리의 보호 속에서 학자가 특별하고 예외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1퍼센트에 속하는 특별한 사람과 그에 속하지 못하는 99퍼센트의 평범한 삶으로 갈라지는 양극화라는 광풍으로부터 대학도 안전하지 않다. 

대학은예전에 누리던 특별한 성소聖所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성소 지위의 박탈은 분명 노스탤지어의 시선으로 보자면 일종의 타락 현상으로 보인다. 이슬만 먹고사는 듯 보였던 대학 안의 학자가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학이 더 이상 사회의 ‘특별구역‘도 아니고 학자가 대학이라는 기업화된 조직에 고용된 ‘임금노동자‘의처지에 가까워지면서 얻게 된 가능성도 있다. 이제 학자들은 성소가 아니라 세속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존재로서 자기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카데미라는 성소 속에서 보호받던 과거의 학자들은 갖지 못했던 보편적 삶에 대한 감수성은 그래서 중요하다.

사회학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때 존재 이유가 있다. 만약 사회학이 어떤 한 개인의 삶도 설명할 수 없다면, 혹은 그 연구대상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완벽하게 유리되어 있다면, 사회학은 학자라는 전문가 집단의 호사스러운 말잔치가 만들어 낸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대학과 학자를 둘러싸고 있던 ‘특별보호명령‘이 해체되었을 때, 호사가들의 허망한 지식 견주기나 사회조사기법의 현란한 테크닉에 의해 살해당할 지경에 처한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그 ‘마지막 비상구‘를 사회 속에 살고 있는 구체적인 시람들의 삶을 설명할 수있는 능력의 회복에서 찾을 수 있다.

본래 학자는 사유의 대리인이다. 직접저그로 사회에 유용한 그 어떤 것도 생산해 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학자의 존재가 무익하다고 판단되지 않는 이유는 사유의 기능이 학자라는 전문집단에게 위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유의 대리인으로 위임장을 받았기에, 학자의 전문성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희한한 조어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보편적 삶에 대한 성찰을 대리할 수 있는 능력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6, 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