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볼 때, 기원전 5세기는 아테네 문화의 절정이기도 하였지만 한편 하락의 시기도 되었다. 이러한 조류 속에서 세 명의 위대한 비극 작가가 나왔다.
아이스킬로스는 아테네의 상승기에, 소포클레스는 절정기에, 에우리피데스는 하락기에 활동하였다.
그 뒤 기원전 4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는 국가 의식이 전보다 박약해졌고, 국가 사업이 부진하였다. 그러나 이 대신에 기원전 400년 후부터는 개인 사업이 활발해졌다.
비즈니스가 번창하였고, 미술은 개인의 보호로 되었고, 인상주의의 새 기술이 발달하였다. 극적 또는 현실성을 가진 조각이 발달하였으며, 정치에 대한 풍자 희극이 일어났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그 대표였다.
철학은 사상과 제도를 분석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은 폴리스에서 나서 폴리스에서 생활하는 동물 이라고 정의했듯이, 그리스 인은 폴리스의 시민인 것을 자부하였다. 개인과 폴리스는 일상생활에서도, 정신생활에서도 일체가 되어 있었으므로 현대와 같은 거리감이 없었다.
사실 당시 폴리스의 거리란 걸어서 하룻길 정도였고, 인구가 가장 많다고 자랑하던 코린토스나 아테네, 아르고스의 인구도 10만을 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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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에서는 폴리스적 동물로서의 인간 존재의 의의를 파악하는 것을 큰일로 알았다. 또한 그들은 자유인으로, 인간의 존엄을 엄호하였다.
결국 비극은 운명의 필연에서 인간의 여러 모습, 특히 고난을 시간적인 국면에서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문제로 삼은 것은 우주의 본체도 아니고, 만물의 원시를 찾으려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사는 인간의 진상을 찾으려는 데에 있었다.
문제는 인제나 인간 그 자체였으며, 실존 그 자체였다. 인간 그 자체의 탐구가 극시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신화
그리스의 비극에서는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신화(미토스)를 많은 소재로 하였다. 신화는 그리스 인의 정신적인 양식이었다.
신화 자체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리스 인의 신화에 대한 태도는 시대마다 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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