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탄생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장혜경 옮김 / 반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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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는 자신을 모르기에 누군지 모르는 아버지와 만났을 때, 그리고 스핑크스와 벌인 싸움에서 두 번이나 자제력을 잃었고 결국 자식들과 도시를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은 비극적 효과를 높이기는 하지만 그의 죄를 사면해주지는 못한다.

 한 구성원이 저지른 행동으로 인해 전 가족이 희생되며, 심지어 수장의 범죄로 인해 도시 전체가 멸망해야 한다는 논리에 우리는 공감할 수없다. 개인의 자아실현이 공동체에도 이익이 된다는 논리 역시 우리로서는 쉽게 납득이 안 된다. 

이 사실은 우리의 관념이 변했음을, 더 정확히 말해 우리가 개인과 집단을 이해관계가 다른, 대립하는 두 개의 개별존재로 생각한다는 증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혀 다른 생각에서 출발한다. 즉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선을 행하건 악을 행하건 그의 행동은 자동적으로 집단에게 득이 되거나 해가 된다.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었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예 그런 말조차꺼내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시대 사람들에겐 개인의 이익만 생각하는 윤리나 정체성 발달은 말 그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로마의 법학자들 역시 그리스 철학자들의 뒤를 이어 윤리와 공법을 연계시켰다. 1세기에 나온 연대기(Annales)』에서 로마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이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논 모스, 논 이우스.(Non mos, non ius.) 관습법이 아닌 것은 (성문)법도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 말은 도덕이 전통과 관습을 통해 형성되는 인간관계와도 매우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 버릇을 가르쳐준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기존의 행동방식을 따르리고 강요한다는 뜻이다. 요즘 우리가 실시하는 이른바 귀화 시험도 사실은 망명 신청자들에게 우리 정체성의 일부인 우리의 버릇, 우리의 관습을 가르치고 싶다는 뜻인 것이다.

고대에는 윤리를 고유한 성격의 발달, 즉 자아실현과 동일하게 보았다. 이런 본질주의적 인간관은 개인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기독교 시대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었다. 윤리는 밖에서, 신의 심급에서 우리에게 부과되는 것이다. 공동체에 기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그리스 시민 쪽에서 내세의 구원을 바라며 스스로 고행을 택하는 신심 깊은 기독교인 쪽으로 바람직한 인간상을 이동한 것이다. 자아실현이 자기부정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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