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각각의 단일성은, 그것에서 객관적 의미를 끌어내도록 요청받은 미래에 끊임없이 자신을 바친다. 궁극적 의미만이 중요하고 마지막 행위만이 존재들을 그들 자신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존재들은 서사의 이미 조형된 형태들 속에서 등장하게 될 그 어떤 것에 해당한다.
도덕적 의식은 평화의 확실함이 전쟁의 명백함을 제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치적 인간의 비웃는 시선을 견딜 수 없다.
9쪽
A. 형이상학과 초월
1. 볼 수 없는 것을 향한 욕망
"참된 삶은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속에 있다. 형이상학은 이런 알리바이에서 출현하고, 이러한 알리바이 속에서 자신을 유지한다.
형이상학은 ‘다른 데‘로, ‘다르게‘로, ‘다른 것‘으로 향한다. 사유의 역사 속에서 형이상학이 취했던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볼 때, 형이상학은 우리에게 친숙한 세계 — 세계를 경계 짓거나 세계가 숨기고 있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땅들이 무엇이건 간에 로부터 출발하여,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자기 집‘chez. soi 으로부터 출발하여 낯선 자기-의-바깥hors de-soi 으로 나아가는, 저-la-bas 으로 나아가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운동의 도달점인 다른 데 있는 것 또는 다른 것은 탁월한 의미에서 타자라 불린다. 어떠한 여행도, 어떠한 기후의 변화와 환경의 변화도 타자로 향하는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1) 랭보의 시 「지옥에서 보낸 한 철 (Une saison en enfer)의 한 구절
26쪽
형이상학적 욕망의 대상인 타자는 내가 먹는 빵, 내가 거주하는 땅, 내가 주시하는 풍것과 같은 타자‘가 아니며, 때로 -나 자신에 대한 나-자신과 같은 ‘타자‘ 이 ‘나‘, 이 ‘타자‘와 같은 ‘타자‘가 아니다.
나는 이러한 현실의 것들로 나를 먹일 수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것들이 내게 단순히 결핍되어 있던 것인 양, 그것들로 나를 만족시킬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것들의 ‘타자성‘은 생각하는 나 또는 소유하는 나의 동일성으로 다시 흡수된다.
반면에 형이상학적 욕망은 전적으로 다른 것, 절대적으로다른 것으로 향한다. 하지만 욕망에 대한 관습적 분석은 이 욕망의 독특한 요구를 잘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해된 욕망의 기초로는 욕구를 들 수 있을 텐데, 그러한 욕망은 가난하고 불완전한 존재 또는 자신의 지난 영광에서 실추한 존재를 나타낼 것이다. 그 욕망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의식과 일치할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향수고, 복귀를 갈망하는 병인 셈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그와 같은 욕망은 진실로 타자인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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