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깁슨의 SF 소설 『뉴로맨서 (Neuromancer, 1984)」는 1984년과 1985년에 걸쳐 휴고, 네뷸러, 필립 K. 딕, SF 크로니클 등 SF계의 주요상을 모두 석권하며 과학소설 하위 장르인 이른바 ‘사이버펑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흔히 사이버펑크의 3대 작가로 윌리엄 깁슨, 브루스 스털링, 루디 러커를 꼽는데, 이중 대중적 인기나 소설의 파급 효과 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저없이 윌리엄 깁슨을 최고로 꼽는다.
뉴로맨서를 전기로 삼아 널리 알려진 개념으로는 사이버스페이스와 매트릭스가 있다. 현 시점에서 사이버스페이스 (또는 사이버공간이라는 말도 쓰인다.)라는 말은 어딘가 구태의연한 느낌마저 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뉴로맨서가 세상에 나온 지 이십 년이 넘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가 사용하는 사이버스페이스와 『뉴로맨서』 안에서의 그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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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인터넷과 그 안에서 사용자들의 커뮤니티가 형성하는 추상적인 공간을 가리켜 사이버스페이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것과 더불어 기하학적인 도형과 입체로 시각화된 자료 객체, 또는 데이터베이스들의 세상을 동시에 표현하는 단어로 쓰인다. 또한 이런 세계는 모두 좌표가 매겨진 격자 위에서 펼쳐지며, 이런 의미에서 ‘매트릭스‘ 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것이다.
윌리엄 깁슨은 이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개념을 조금은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사용한다. 이 소설 속에서 주인공인 케이스가 각종 데이터베이스에 침투하고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단순히 키보드와 모니터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현재의 우리가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들을 생각해 보자.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모니터와 키보드가 있고, 마우스 등의 각종 보조장치들이 있다.
그러나 『뉴로맨서』의 세계에서는 이보다 한층 진일보한 인터페이스가 사용자의 감각과 사이버스페이스를 직접 연결한다. 자의식을 완성하기 위해 드러나지 않는 활약상을 보이는 인공지능인 뉴로맨서가 케이스와 접촉하는 방법 역시 이러한 접촉 방식 하에 현실과 환상이 구분되지 않는 공감각적 통로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아직까지 우리는 이십 년 전의 소설보다도 원시적인 입력 장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혹자는 월리엄 깁슨이 『뉴로맨서를 쓸 당시에 이른바 ‘컴맹‘ 이었다는 점을 들이 그가 소설에서 제시한 일련의 인터페이스들을 무지의 소산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 뉴로맨서에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등장한다. 심스팀, 사이버스페이스, 죽어서도 네트워크 속에 존재하는 인물, 인공지능... 물론 이것들은 뉴로맨서가 씌어진 1984년 당시에도 결코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윌리엄 깁슨은 이것들을 효과적으로 묶어서 독자들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조립했다.
거기에 각 등장인물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인공지능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현란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문체와 어울러지면서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닌 하나이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422쪽. 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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