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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라 - 미술사가 놓친 위대한 여성 예술가 15인
브리짓 퀸 지음, 리사 콩던 그림, 박찬원 옮김 / 아트북스 / 2017년 10월
평점 :
오라치오가 소송에서 이겼다. 이는 딸의 불굴의 인내에 크게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소송 과정에서 타시가 아내의 청부살인 계약을 맺었으며 처제를 임신시킨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 둘도 없는 파렴치한이었던 것이다. 아르테미시아가 그와 결혼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진정 축복이었다. (29)
사람들은 레이스터르의 온갖 애인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렘브란트의 연인이었다, 혹은 할스의 연인이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둘 중 누군가와 낭만적인 관계였다는 주장은 할스와 렘브란트가 연인 사이였다는 얘기만큼이나 터무니없는 낭설이다. 그녀는 여성이고 그들은 남성이며, 같은 시대에 같은 나라에 살았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섹스를 했을 것이라는 식으로 지어낸 완전한 판타지다. (53)
익명의 작가는 계속해서 뱅상을 애인으로 삼았으며, 뱅상 외에도 2,000명에 달하는 애인이 있다고 비난했다. 이 2,000이라는 숫자는 단지 뱅상이라는 이름의 발음이 불어의 '20 ·100'가 비슷하여 하는 소리였지만, 달리 말하면 아델라이드 라비유귀아르가 문란한 여자라고 비아냥댄 것이다. 심지어 재능은 없고 그저 문란한 여자로 말이다. 여성 예술가가 한 남자와의 친분 관계 때문에 순식간에 대중의 눈에 재능 없는 문란한 여자로 전락하는 것은 결코 온당한 일이 될 수 없다. (67-68)
1804년 즈음엔 나폴레옹이 프랑스 여성 화가들이 공식 교육과 전시회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한 상태였따.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여성들이 명문 에콜데보자르에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모더니즘의 출현으로 그때에 이르러서야 일종의 고전적 교육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96)
1850년이 되었을 때 보뇌르는 경찰서에서 페르미시옹 드 트라베스티스망(Permission de Travestissement), 즉 '이성 복장 착용 허가'를 받았다. 당시 이성 복장 착용(즉, 여성의 바지 착용)은 불법이었고, 체포를 피하기 위해 보뇌르는 공식 문서가 필요했다. 이 허가증을 받음으로써 '극장, 무도회, 기타 공공 회합 장소'에서는 여전히 규제가 존재했지만, 그녀는 마침내 공공연히 남성복을 입을 수 있었다. 이 허가증은 6개월마다 갱신해야 했고 의사의 서명이 필수였다. (114-115)
이들의 활약으로 남성 그룹이 위협을 느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들은 공격을 감행했다. 너새니얼 호손-그의 아내 소피아 역시 화가였다-은 자신이 쓴 유명한 소설 『대리석 목양신』에서 여성 예쑬가들을 단순한 모방자로, 비극이 예정된 사람들로 취급했다.(호손은 심지어 여성 작가들도 그다지 존중하지 않아 자신의 출판사에 이렇게 말했다. "작가로서의 여성은 모두 미약하고 지루하다. 나는 그들이 글쓰는 일을 금지시켰으면 좋겠다, 위반하면 얼굴을 굴 껍데기로 베어 깊게 상처를 내고." 이 말에 내가 끼어들자면 해줄 수 있는 반응은 이것뿐이다. "엿 멀어라, 네이트."), (128)
처음 모데르존베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은 그녀의 그림이 아니라 그녀의 일기와 편지였따. 가까운 친구였던 릴케는 편집자의 역할을 거부했고, 자신의 출판사에 그 글들을 출간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가족의 소통이라는 요구에 너무나도 순종적이고 협조적이었던 이 유순한 사람이, 훗날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외로움과 빈곤을 혼자 짊어지리라는 것을 우리가 어디서 알게 되어야겠습니까?", (146)
열린 결혼생활을 주장했던 남편 클라이브 벨 덕분에 가능했던 사랑의 다양성도 그녀의 삶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 개방성을 자신뿐 아니라 아내에게도 적용시켰고, 바네사 벨은 곧 영국의 걸출한 미술사가 로저 프라이와 가까워졌다. 클라이브와 달리 그녀의 연인은 몇 년 후 그녀가 화가 던컨 그랜트와 사랑에 빠지자 절망했다. 버네사는 던컨 그랜트와 40년 동안 결혼과 유사한 커플 생활을 유지했다. (166-167)
페미니즘의 등장은 마침내 닐의 낡은 보트를 띄워줄 완벽한 폭풍이 되었다. 그 활기찬 뉴욕 미술계에서 닐은 몇 십 년 동안 냉담하게 무시당해온 여성 화가였다. 그녀는 모델을 대함에 있어 늘 평등주의자였다. 온갖 인종의 노동계급 남성과 여성, 모든 부류의 어머니들, 온갖 성과 인종의 예술가들, 임신한 여성, 큐레이터와 미술사가, 모든 연령대의 누드모델, 동성애자와 이성복장 선호자 등 그녀는 한 세기의 중간 기착지 모든 지점 위 인간의 연예를 그려왔고, 그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188-190)
옛 세계의 전통에 따르면 이제 크래스너는 형부와 결혼해 조카들을 길러야 했다. 이는 요청이 아니라 노골적인 기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전통을 거부했다. 그러자 당시 겨우 열여덟 살에 아마도 리보다는 더 순종적이었떤, 혹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고집이 덜했던 루스가 그 구덩이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아니, 밀어 넣어졌다. (196)
그녀의 이름은 아버지(루이 부르주아)를 따른 것이었는데, 일정 부분 그녀의 아버지가 아들을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딸이었던 그녀에게 '없는 것'에 대해 아버지는 가학적으로 놀리기까지 했다. (216)
샌타아니타에서 6개월을 지낸 후 그녀와 가족들은 아칸소의 로워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해야 했을 때 그녀와 학급 친구들을은 '모두에게 자유와 정의를'이라는 구절 뒤에 그들만의 종결부를 만들어 그 예술적 언사를 큰 소리로 덧붙였다. "우리만 빼고!" (231)
그는 경찰관들에게 자신에 관한 책을 보여주며 말했다. "나는 성공한 예술가이고 그녀는그렇지 않아요. 어쩌면 그것이 그녀에게 영향을 미쳤을지도, 그렇다면 내가 그녀를 죽인 걸지도 모릅니다." (247)
그곳은 1980년대였음에도 흑인차별정책이 사라지지 않은 곳이었다. '애틀랜타 어린이 연쇄살인' 같은 공포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동네 공원에는 남부군 기념비들이 있었으며 KKK가 그녀의 백인 남자친구 차에 협박 쪽지를 남겨놓기도 했다. 워커는 당시에는 그 어떤 것도 거의 소화하지 못했다. 나중에야 당시 상황에 대해 열변을 쏟을 수 있게 된다. (265)
그녀를 보고 있으면 자신의 근원을 진실하게 탐구했던 또 한 사람인 요제프 보이스가 떠오른다. 그런데 상상해 보라. 만약 보이스가 독일 공군 비행기가 추락해서 유목민 타타르 족의 도움으로 펠트 천과 동물 지방덩어리에 싸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새너제이 교외에서 다섯 형제와 자랐다면 어땠을까 하고. (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