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와 자본주의적 우울 - 계몽의 변증법에서 미학이론까지 아도르노 새롭게 읽기
이순예 지음 / 풀빛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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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시기 이래로 독일에서 제각기 발전한 이질적인 두 가지 전통을 아도르노가 비동일자를 통해 어렵게나마 그 질적 차별성을 유지한 채 서로 연결하고 있다면, 하버마스는 니체 철학으로 대변되는 비합리적전통마저도 성숙한 개인들이 참여하는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합리화 과정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역설한다. 개인적인 일탈이 있을 뿐, 궁극적으로 개별성은 전체에 마찰 없이 조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체계에서는 개개인의 고통을 비롯한 개별적 감정이 의사소통 행위에 제동을 걸지 않거나, 아니면 감정의 세계가 사회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 그 결과 미적 영역이 이론체계에서 배제되거나, 혹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55)


저자들은 처음부터 문명화된 사회관계들 속에서 개념이 제각기 다양한 것들을 억누르는 역학으로부터 사회비판적 전망을 발전시켜 나갔다. 결국 그들의 파시즘 비판은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닮아가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파시즘의 프로그램인 획일화는 옛적 야만으로의 퇴행이 아니다. ‘눌러서 똑같이 만들기전략의 승리. 파시즘은 이 전략에 아주 우호적인 조건들을 제공하는 시민사회에서 전대미문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결국 닮은 것들만이 양산되었다. 권리의 평등이라는 이념을 확대하겠다고 하고서는 불의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63)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망명지 미국 사회에서 대중문화를 접하면서 행복의 소멸이 바로 이 테제의 문화적 귀결임을 확인하게 된다. 계몽은 인간에게 행복을 약속했으면서도, 이를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방법으로 인류를 기만한다. 문화산업은 계몽의 계산적 합리성을 문화 영역에 관철시켜 원래 약속했던 향유의 계기가 생산품들로부터 빠져나가게 한다. 거세된 쾌락이 문화산업의 프로그램이다. 계산적 합리성이 작업 과정을 지배함에 따라 수용자를 대중으로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비하는 대중은 화폐를 매개로 문화상품과 교류한다. 상품은 규격품일 때 비로소 유통 질서에 편입될 수 있다. 규격품에는 개별적인 고려가 들어서지 못한다. 개별 시민은 몸에 잘 맞지 않는 기성품들 사이사이를 전전할 뿐, 자신의 욕구가 진정으로 충족되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 시민은 불특정 다수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욕망의 대체물을 맛볼 뿐이다. 문화산업은 대중이 쾌락을 누릴 기회를 계속 다음번으로 미룬다. 문화산업은 대중으로서의 시민을 기만한다. (76-77)


부정의 형이상학은 자본주의적 현실과 진리에의 요구를 하나의 체계로 묶는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의 차연Differenz 개념이 아도르노의 비동일자를 발전시킨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물질에 대한 표상이 다르며, 차연은 스스로 자기증식을 하면서 현실을 구성한다고 이해되는 반면, 비동일자는 어디까지나 모순의 지양을, 존재와 의식의 합일을 열망한다.’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고통스런 자각을 잃지 않을 뿐이다. (115)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감정을 철학화하겠다는 관념론의 기획은 사회적으로 감정의 기능화·도구화를 초래했다. 관념론이 총체주의의 단초가 된다는 아도르노의 분석은 이와 같은 감정의 도구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 (292)


결국 똑같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신의 감성을 유토피아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먼저 내가 온전하게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를 회복하기 위해, 즉 미적으로 실전하기 위해 예쑬이 보호해놓은 공간으로 몰입할 필요가 있다. 이 자유로운 의식의 공간에서 나느 수량화와는 또 다른 계산법을 우선 꿈꾸고, 그래서 감성도 다시 회복시켜 나갈 수 있다. 예술이 지닌 고유한 원칙들은 이 또 다른 계산법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내가 자본주의적 원칙을 무시하고 자율적으로 판단내리는 훈련을 하도록 돕는다.  (303-304)


울리케 마인호프의 삶이야말로 자신을 정치로 환원시킨 대표적인 경우다. 체계라고 불리는, 개인의 사적 속성을 모두 제거한 사회적 추상체와 자신의 존재를 온통 일치시킨 결과는 삶의 파괴였다. 이는 사회적 이단아라는 측면에서, 정신병 끝에 이웃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한 총기 난사자 바그너와 자신의 세계관적 판단에 따라 테러라는 방법론을 택한 마인호프를 뇌라는 신체 구조의 일부로 동일화시키는 학문 행위와 결국 마찬가지다.(147~149쪽 참조) 체계가 실행하는 이러한 동일화 전략에 현재 우리의 삶은 깊이 포섭되어 있다. 정치체제의 발전을 위해 개인에게 너무도 큰 희생을 요구해온 한국 사회는 자본이 개인의 감수성을 통제하는 요즘의 세태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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