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식의 생각
서준식 지음 / 야간비행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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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A. 매키넌은 포르노에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그녀가 포르노에 들이대는 잣대는 보수주의자가 가부장적 지배질서의 유지를 바라면서 들이대는 건전한 성도덕이라는 추상적인 잣대와는 완전히 다른 평등이라는 잣대, 즉 포르노로 인해 학대와 차별을 받는 여성들의 평등권이라는 잣대인 것이다. 이 참신한 주장은 앞으로 우리의 포르노에 대한 인식, 나아가서는 자유권 전반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된다.(86)


운동가의 재산은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와 꿋꿋한 헌신뿐이다. 그리고 운동단체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그 시대를 사는 민중들이 진실을 꿰뚫어 보고, 말하고, 힘을 모으기 위한 희망의 물리적 근거로서 기능하는 데 있다. 운동단체에 필요한 것은 결코 규모가 아니다.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마치 고통이 없는 것 같은 허구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손을 뿌리치고 스스로 고통이 됨으로써 이 세계와 이 세계에서의 삶을 증언하는 용기인 것이다. (109)



전쟁 때 장기형을 받고 20년 가량을 살게 된 사람들이 만기 출소할 시기는 70년대 초반이었어. 이때 이 사람들을 그대로 출소시키지 않으려고 전국 교도소에서 소름끼치는 고문을 했는데, 나도 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여러 고문을 당했지. ‘생명을 꺾어 버려도 좋으니 미전향자는 없도록 하라.’는 대통령 특명이 있었다고 했어. (147)



조리가 통하지 않는 독재의 사회에서 악법은 법률가가 깨뜨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운동가가 깨뜨릴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사실을 아프도록 명심하고 있다. 나에게 채워진 족쇄, 그것은 결국 내가 나의 이 손으로 풀어야 할 족쇄인 것이다. (177)



하루에 작업 21시간, 흐리멍덩해진 정신에 매일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몽둥이, 쇠파이프가 쏟아졌다. 한국인 선원들은 조선족 선원을 라고, 그들의 부인을 암캐라고 불렀다. 조선족은 온갖 인간적 모멸 속에서 두 달 동안 견디었다.

 

고통 끝에 조선족 5명은 하선을 결의하지만 선장은 곱게 하선시켜 주지 않았다. ”중국인 선원들이 흉기를 들고 선장을 살해하려 해 강제 하선시킨다.“는 거짓 보고를 하고 사모아의 구류소에 보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선장은 그들의 하선으로 인한 조업손실ᄁᆞ지 그들에게 부담시키려 했다. 20만원이라는 중국 돈은 자자손손 10대를 갚아도 영원히 못 갚을돈이라 한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술을 마셨다. ”술이 들어가니 가슴에 쌓였던 원한이 눈물이 되고 눈물이 악이 되었으며 마지막 벼랑가에서 조선족 선원들은 죽음을 생각했다. 죽는 마당에 너 죽고 나 죽자로 막가는 것은 정해진 이치였는지도 모른다.

 

(중략)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표현은 원래 지존파가 스스로를 향해 사용한 표현이었다. 그것은 남을 향해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우리 중의 어느 한 사람도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따위 저열한 표현으로 남을 평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페스카마호 선장과 사관들, 그리고 함부로 사형을 입에 올린 부산지방법원 판사가 조선족 선원들에게 인간이기를 포기하도록 강요한 일은 있어도 조선족 선원들은 한번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정작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은 이 비뚤어진 무한경쟁의 체제에 길들여져 인간 모멸을 인간 모멸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 다름 아니다. (268-270)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나 국가가 만들고 국민에게 제시하는 역사의 박제는 사실상 불행한 과거의 역사를 몽땅 되풀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가 십상이다. 모든 역사 기술 중에서 최악은 국가에 의한 역사 기술이다. 우리가 역사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가 독점하고 매장시키고 싶어하는 기억들을 도로 빼앗아 오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284)



물론 우리는 이 판결의 중요한 의미를 감지하고 있으며 <한겨레>의 이와 같은 평가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유득형의 몸에 남아 있는 참담한 상처와 청송 재소자들의 증언까지도 깡그리 외면하고 교도관의 가혹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판결은 기본적으로 교도관 편을 드는 비겁한 판결이며 그것을 조건 없이 칭송한 <한겨례>의 태도 역시 비겁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점잖은 법원과 진보적언론이 유득형의 승리를 절반의 승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292)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자면 나는 요즘 마음이 몹시 불안하다. 과거 내가 뚜렷하게 성폭력이라는 의식 없이 저질렀던 그 수많은 행동들이 속속 성폭력의 반열에 올라오고 있음을 목도하면서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온몸의 땀구멍에서 일시에 진땀이 넘치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바야흐로 여성관의 혁명적 변화 없이는 운동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297)



그러나 이 땅에 처음 태어날 인권위원회가 진정 국민의 인권을 보호할 수 있도록 튼튼하게 태어나기를 염원하면 할수록 우리의 고생은 처절하고도 끔찍했다. 그것은 요컨대 과거에 국민의 인권을 벌레 밟듯 짓밟아 온, 따라서 본능적으로 튼튼한 인권위원회의 탄생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군인, 경찰관, 교도관, 검사, 판사, 정치인들과의 투쟁이요 이 모든 세력의 대표선수인 법무부와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작년 상반기에 접수된 공무원에 의한 인권침해사건 665건 중 지금까지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된 사건이 단 3건밖에 안 되는 우리의 기막힌 현실이 이 투쟁의 처절함을 대변해 준다. 밥먹듯이 밤을 지새우면서, 혹은 맨 땅에서 단식농성을 하면서 나는 가끔 나의 미뤄 두었던 숙제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죄악과 오만을 뒤집어쓰고 감옥의 높은 담 안에서 허우적대는 수인들의 내일을 생각했다.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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