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오늘날 이슬람교 국가들의 모습은 기껏해야 대안적 근대성’, 즉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적대가 결여된 자본주의다. 이런 자본주의는 기껏해야 파시즘에 지나지 않는다. (26)

제도의 무의식은 교회라는 공공기관이 지닌 음란한 이면의 존재를 한사코 부정하고 은폐하려 한다. 그러나 음란한 이면은 이 제도를 구성하는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음란한 의례를 은폐하려는 교회의 태도는 조직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집단의식을 강조하는 군대에서 자행되는 소위 프래깅이라는 행태와 하등 다르지 않다). 바꿔 말해, 교회는 소아성애 추문이 단지 창피해서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의 보호를 위해 가장 내밀하고 음란한 비밀을 방어하려 한다. 논리적으로, 교회의 어둡고 음란한 측면을 자신과 동일화하는 것은 기독교 성직자의 정체성을 이루는 본질이다. 추문을 진지하게 심판했던(수사적인 비판에 그치지 않았던) 성직자는 교회 공동체에서 배제되었고, 더는 우리 편이 아니다(1920년대 미국 남부 시민이 KKK 조직원을 경찰에 고발한 즉시 공동체에서 배제된 것과 같은 논리다. 고발은 공동체의 근본인 결속을 배신하는 행위를 뜻한다). (39-40)

물론 폭동이라는 행동의 무의미를 받아들이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시위 형식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라캉이 말한 행위로의 이행이다. 즉 충동적으로 행위로 옮겨짐, 말로 어찌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정리할 수 없는 행위로의 이행, 참을 수 없는 무게의 분노를 수반하는 행위로의 이행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행을 낳은 의미를 탐색하려는 유혹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행위로의 이행은 단지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무기력함에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것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개념인 인식적 지도 그리기’ cognitive mapping를 할 수 없는 무능함의 증명이다. 분노를 폭력으로 표출하는 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떤 의미로 전체 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 파악할 능력이 없다. (48-49)

이제까지의 고찰에서 얻을 수 있는 슬픈 결론은 두 가지다. 첫째로, 벤야민이 신적 폭력으로 칭한 것에는 고결함이나 고상함은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 그 무서운 파괴력 때문에 이 등장했다. 둘째로, 우리는 극단적 경험에 어떤 해방의 기운 같은 것이 서려 있어서 그것이 상황의 궁극적인 진실을 간파할 혜안을 안겨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려야 한다. (51)

우리가 진정 아프리카인을 돕고 난민 발생을 막고자 한다면 바로 자본주의의 개입부터 비판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다수 난민이 소위 실패한 국가’, 즉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권력이 무너진 국가(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리비아, 소말리아, 콩고, 에리트레아......)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공권력의 붕괴는 국지적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 정치-경제의 결과이며, 리비아와 이라크처럼 많은 경우 서구가 직접 개입한 결과다. 점점 증가하고 있는 실패한 국가는 예상 밖의 불행이 아니라 강대국에 의해 강행된 경제식민주의의 결과일 뿐이다. 더구나 중동에서 실패한 국가가 태동할 싹은 이미 1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발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제멋대로 선을 그어 일련의 인공국가를 양산했다. 바야흐로 강대국의 경제식민주의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수니파가 재결합한 IS가 결집되는 호기를 만들어주었다. IS는 옛 식민지 지배국들이 갈라놓은 수니파가 재결합된 결과다. (57-58)

이들 부유한 나라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새로운 노예제도의 출현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장려하는 경제체제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지만 경제 현장의 자본주의 작동 방식은 노예 양산일 뿐이다. 노예제는 중세 말 폐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근대 초기부터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에서 더 기승을 부렸다. 비약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가정해보자. 글로벌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대는 노예제의 부활이라는 서막을 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직접적으로 개인을 노예로 규정한 법적 신분 규정은 없지만 노예제는 온갖 새로운 형태로 진화 중이다. 아라비아반도(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에서 일하는 수백만 명의 이민 노동자는 사실상 기본 시민권과 자유를 박탈당했다. 아시아 공장의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값싼 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완전히 통제되고 있는 현실은 강제수용소와 다를 바가 없다. 중앙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에서는 천연자원을 착취하는 강제노동이 버젓이 자행된다. 그 좋은 예가 앞서 살펴본 콩고다. (62-63)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유토피아의 역설이다. 가난, 고통, 위험에 처한 인간은 최소한의 안전과 먹고살 여건만 마련되면 만족할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렵고 힘들수록 인간은 절대적 유토피아를 열망한다. 그러나 난민이 배우게 될 뼈아픈 교훈은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 심지어 노르웨이 안에도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이리라. 난민은 자신의 꿈을 스스로 검열하고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실 속에서 꿈을 좇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 데 집중해야 한다. (65-66)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서구 진보의 부성애적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서구 좌파가 팔레스타인 생활방식을 존중한다며 명예살인에 침묵을 지키는 것은 더더욱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들 두 측면서구적 가치를 보편적 인권으로 강요하는 것, 타문화에 대한 존중에서 이 문화의 일부인 잔혹 행위를 간과하는 것은 신비화된 이데올로기라는 한 동전의 양면이다. (81)

보편성은 곧 타인의 보편성이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이웃만 섬뜩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소름 끼치는 존재라는, 알 수 없는 정체성의 심연과 직면한 개인들만이 이 보편성을 지닌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인을 대하면 헤겔의 간결한 지혜를 기억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인의 비밀은 이집트인 자신에게도 비밀이다.” 바로 그래서 이웃과 만날 때면 공감하거나 이해하려 시도하지 말고, 마음에도 없는 존중을 가장하는 대신, 너희나 우리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구나 하며 낄낄대고 웃어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인종차별을 빗댄 농담을 주고받는 것까지 포함해서). (96)

그러므로 두 가지에 유념해야 한다. 첫째,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킬 최소한의 규범을 만드는 것이다. ‘유럽 중심적이라는 비난을 들을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종교의 자유, 집단적 폭력에 대항하는 개인적 자유의 보호, 여성 인권 등이 그것이다. 둘째, 이 제한 내에서 상이한 생활방식에 무조건적 관용을 행해야 한다. 이런 규범과 소통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가능한 모든 형태의 법적 강제력을 집행해야 한다. (105-106)

이런 이유로 오늘날 해방투쟁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중차대한 과제는 단순한 타인 존중을 넘어서서 서로 다른 문화의 진정한 공존과 융화를 보장해줄 해방의 긍정적인 주도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해방투쟁이 동일한 보편적 투쟁의 일부임을 분명히 의식해야 한다(반서구 신식민주의 투쟁, 반근본주의 투쟁, 위키리크스와 스노든의 투쟁, 푸시 라이엇의 투쟁, 반유대주의 투쟁과 반극우 시오니즘 투쟁). 여기서 실용적으로 타협할 때 우리는 패배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살 만한 가치를 잃는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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