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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인권 - 사상으로 읽는 인권의 역사 ㅣ 푸른들녘 인문교양 22
박홍규 지음 / 푸른들녘 / 2018년 6월
평점 :
그 전쟁이 터지기 전에 키루스 2세(기원전 576/590~530)라는 고대 페르시아 왕이 기원전 539년 세계 최초의 인권문서인 ‘키루스원통(Cyrus Cylinder)’을 만들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흔히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이라고 하는 잉글랜드의 마그나카르타보다 1754년 앞서고, 프랑스의 인권선언보다 2328년 앞선 것이었다. 게다가 마그나카르타는 영주와 귀족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고 프랑스 인권선언문은 백인 남자들만을 위한 것이었지만 키루스원통의 인권선언은 모든 인종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명실 공히 최초의 세계인권선언이었다.(62-63)
묵자는 강한 자는 약한 자의 것을 빼앗지 않고, 다수가 소수의 것을 강압적으로 빼앗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귀한 사람이 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아야 한다고도 했다. 이것이 겸애의 핵심이었다. (68)
1983년 일본에 유학했을 때, 재일교포들이 시달리는 가장 심각한 인권문제가 ‘지문날인제도’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지문날인을 강요당하지 않는 일본인과의 차별이은 물론 자기정보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사생활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적법절차의 원칙과 무죄추정의 원칙, 과잉금지의 원칙 등을 위배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지문날인제도는 1968년 박정희정권이 국민감시와 통제를 목적으로 도입한 이후, 법률적 근거도 없이 지금껏 적용되었다. 주민등록법에는 지문날인을 단지 주민등록증에 수록할 내용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 열 손가락 지문을 ‘강제로’ 날인하게 하는 법률적 근거는 없다. 더욱이 지문이 경찰청으로 넘어가 자료화돼 관리되고 있는 실정에 비춰볼 때, 지문날인제도는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135-136)
따라서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으므로 그것을 막는 권력이나 재산에 반대하라고 주장했다. 반면 라 보에시 이전의 정치이론이란 모두 신권(神權)에 근거한 것으로, 그 위에서 모든 불평등과 구속이 정당화되었다. 따라서 라 보에시의 주장은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라 보에시에 비해 여타의 17세기 사상가들은 재검토를 필요로 한다. 흔히 홉스는 전제주의자로, 밀턴과 스피노자와 해링턴은 공화주의자로, 그로티우스와 로크는 자유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일반적 평가에 대한 이외가 많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17세기 부르주아의 특별한 관심 사항이었던 제국과 소유의 자유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공통되었다. 그런데 국내외에 이 점에 대한 지적이 전혀 없어서 문제다. 이는 앞에서 본 그리스 로마나 중세는 물론이고 뒤에서 보는 20세기까지의 서양 자유사상에 대한 논의에서 전혀 지적되지 못한 점이다. (172)
밀은 『자유론』을 발표한 1859년보다 8년 전에 이미 사회주의자로 바뀌었다. 즉 밀은 흔히 말하듯이 반사회주의적인 『자유론』을 쓴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자유론』을 쓴 것이다. 밀은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점진적 사회주의자로서 그 뒤 영국에서 형성된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기초를 이루었다.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계급투쟁사관이 아니라 사회진화론의 입장을 취하여 사회·조직의 혁명적 변화가 아니라 민주적인 수단에 의한 점진적이고 유기적인 사회개혁을 강조한 것이다. 밀이 「자유주의자인가, 사회주의자인가?」라고 묻는 글의 결론에서 밀이 “자유주의의 기본원리를 명확하게 해, 민주주의적인 자유주의 내지 진보적인 자유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하는 견해도 있으나 나는 밀을 사회주의자로 본다. (263)
사회주의라는 말의 ‘social’은 ‘society’의 형용사가 아니라 고대 로마의 ‘socialis’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 뜻은 ‘동료 구성원인 개인에 대해 평소에는 물론이고 그가 곤경에 처했을 떄도 공동체가 지켜주는 것’이다. 즉 상호부조 관계를 뜻했다. 그리고 그 공동소유의 조직을 ‘association’ 또는 ‘communisme’, 즉 공산주의라고 했다. 따라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원래 같은 말이었으나, 19세기 후반부터 아나키즘을 포함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대립했다. 한편 독일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란 사회민주주의를 뜻하게 되었고, 이는 20세기 초에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으로 분열했다. (294)
또한 스탈린 이후 종래의 인권도 악화되었다. 가령 1936년부터 첫 임신의 낙태가 불법화되었고 1944년에는 모든 낙태가 금지되었다. 이혼녀에게는 벌금이 부과되고 사실혼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미성년자의 인권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이주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식민지 문제는 지식인 사이에서도 방치되었다. 가령 프랑스의 경우 공산당도 식민지 문제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중략) 1950년대에 와서야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나 파농(Frantz Omar Fanon, 1925~1961)과 같은 반식민주의자들이 알제리 독립운동을 지지했으나 역시 소수에 불과했다. 여타의 인문 사회과학자들은 철저히 침묵했다. (325-326)
그러나 여성의 투표권은 현저히 확대되었다. 1914년부터 1939년 사이에 28개국이 남녀 동일 투표권을 부여했다. 반면 파시즘에 의해 여성의 자유는 크게 제한되었다. 독일의 3K(Kinder, Kirche, Küche)는 여성에게 ‘아동교육, 교회, 가사노동’을 이상적인 것으로 강요했음을 보여준다. 미성년자는 충성 교육과 군사 교육을 강요당했다. (328)
그러나 의회를 지배한 보수파에 의해 완전고용 정책은 불완전하게 시행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조장한 것이 하이에크(Friedrich Hayek, 1899~1992)였다. 정부에 의한 경제 통제든 독재를 초래하고 개인적 자유를 위협한다고 주장한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은 1944년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자유를 위한 계획화’라는 것 자체가 자가당착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대의 부자들이 사익을 주장하면서 거대한 정부가 미국의 자유를 위협한도고 말한 것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는 뒤에 보수파가 사회주의적이라고 비난한 최저임금이나 최장노동시간의 규제나 반트러스트법과 같은 입법과 모든 시민에게 기본적인 최저한의 의식주를 보장하는 사회보장제를 지지했으나, 1945년 그 책의 축약판을 낸 리더스 다이제스트 사는 그 부분을 삭제했다. (348)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세계인권선언이 “선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 법적 구속력을 가진 것은 아니고”, “모든 국민과 모든 나라가 달성하여야 할 공통의 기준”으로 선언하는 의미는 있으나 그 선언내용인 각 조항이 바로 보편적인 법적구속력을 가지거나 국제법적 효력을 갖는 것으로 볼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세계인권선언은 국제관습법으로 인정되고 있고, 국제관습법은 대한민국 헌법상 법률의 효력을 갖는다. 유엔 총회의 결의는 무조건 권고가 아니라, 절대 다수가 찬성하면 국제관습법으로 인정되어, 전세계 모든 국가에서 법률로서의 효력을 갖는다. 따라서 1991년 판례는, 대법원이 이러한 국제관습법의 법리를 오해했거나 일부러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380)
그러나 그 노예들은 지금까지 그들의 주인인 하이에크와 달리 국가 자체를 축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앙 정부의 억압 기구나 정보수집 기구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CCTV, 도청, 미국의 국토안보부, 영국의 독립안보국을 비롯한 그 밖의 장치들을 통해 근대 국가가 그 신민들에게 행사한 전방위 통제를 더욱 강화하여 국민의 자유를 제한했다. 그것이야말로 자코뱅, 볼셰비키, 나치가 꿈꾼 사회의 실현이었다. 바로 하이에크가 ‘노예의 길’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그리고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결과했다.
자유시장의 신선함과 거대한 정부의 악에 대한 보수적 사고방식은 언론을 비롯한 사회의 모든 영역을 지배했고 이는 클린턴의 민주당 정권에까지 이어졌다. 1994년 공화당은 1950년 이래 처음으로 의회를 장악했는데 그들은 이를 ‘자유혁명’이라고 불렀다. 이어 1996년 의회는 뉴딜 이래 ‘복지’로 불린 지원을 필요로 하는 아동에 대한 보조제도(AFDC; Aid to Families with Depencent Children)를 폐지했다. 그 결과 전국 아동의 4분의 1에 이르는 1,200만 명의 아동이 빈곤 속에 놓였다. (397)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가장 민주적인 권력만이 인권을 가장 잘 제대로 보장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도 유의할 점이 있다. 모든 권력은 부패하고 남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가장 민주적인 권력이어야 권력남용이 최소에 그쳐 인권 침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도리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권 보장을 위해서는 언제나 권력에 대한 감시가 필요하다. (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