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초역 오디세이 - 놀란 감독 영화 《오디세이》 원작 대서사!!
호메로스 원작, 손길영 편저 / 스타북스 / 2026년 8월
평점 :
[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
'오디세이'라는 이름은 워낙 유명해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읽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책만큼은 읽지 못했는데, 최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가 우리나라에서 천만관객을 돌파하는 등 빅히트를 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도 크게 흥행에 성공하면서 이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졌습니다. 저에게는 단지 외눈박이 거인과 싸우고,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오랜 방랑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정도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번에는 한번 오디세우스의 이야기 전반에 걸쳐 알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 무엇보다 의외였던 것은 역시 이 이야기가 단순히 괴물과 싸우는 영웅의 모험담만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데 무려 10년이 걸렸고(물론 트로이전쟁기간이 무려 10년이었으니 집을 떠나온 기간이 장장 20년이나 되었죠), 그동안 집에서는 아들 텔레마코스가 성장하고 아내 페넬로페가 수많은 구혼자들 사이에서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바다 위의 모험 못지않게 '남겨진 사람들이 보낸 시간'이 더욱 마음에 남았습니다... 특히 첫 부분에서 오디세우스가 없는 궁전을 구혼자들이 제멋대로 차지하고 재산을 축내는 장면은 생각보다 답답했습니다. 영웅은 멀리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는데 집은 무너져가고 있고, 아들은 아직 그들을 몰아낼 힘이 없습니다. 이때부터 이야기가 단순한 귀향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디세우스라는 인물도 제가 흔히 생각했던 힘센 영웅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역시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와의 대결이었습니다. 몸집과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존재 앞에서 오디세우스가 살아남는 방식은 정면 승부가 아니라 머리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인물에게는 용맹함보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머.. 힘센사람이 강한게 아니라 살아남는 사람이 강하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더라구요..
세이렌 장면은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인데도 다시 보니 재미있었습니다. 유혹을 피하려면 아예 듣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할 텐데... 헐... 이 오디세우스는 굳이 그 노래를 듣고 싶어 합니다. 대신 미래의 자신이 이성을 잃을 것을 예상하고 몸을 돛대에 묶어버립니다. 저는 이 장면이 묘하게 현실적이었습니다. 유혹 앞에서 늘 의지만으로 버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행동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 세이렌의 소리를 듣고 싶어 방책을 마련하다니... 대단한 사람이긴 하더군요... 나중의 나를 믿지 못하니 지금의 내가 미리 빠져나갈 수 없는 장치를 만들어놓는... ㅋㅋㅋ 3천 년 전 이야기인데도 이런 부분은 이상할 정도로 현대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남은 것은 오디세우스가 고향에 돌아온 뒤였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던 이타카에 도착했는데도 당장 왕의 모습으로 들어가지 않고 거지로 변장한 채 상황을 살펴봅니다. 스무 해 동안 기다렸으니 마음 같아서는 바로 문을 박차고 들어갈 것 같은데, 그는 또 기다립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는 '인내'가 단순히 고난을 꾹 참고 견디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가 올 때까지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인내였습니다. 힘이 있다고 바로 쓰지 않고, 알고 있다고 바로 밝히지 않는 모습이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을 조금 더 흥미롭게 만들었습니다. 아들 텔레마코스와 다시 만나는 부분은 모험 장면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났을 때 아들은 아기였는데, 다시 만났을 때는 함께 싸울 수 있는 청년이 되어 있습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는 20년이었지만 아들 텔레마코스에게는 아버지 없이 자란 20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던 셈입니다.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고 우는 장면에서는 긴 모험보다 지나가버린 시간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아내 페넬로페와의 재회도 비슷했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돌아온 남편을 보자마자 알아보고 끝나는 이야기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페넬로페는 쉽게 믿지 않습니다. 수많은 거짓말과 속임수를 견뎌온 사람이니 어쩌면 당연했을 것입니다. 특히 두 사람만 알고 있는 올리브나무 침대의 비밀로 오디세우스를 확인하는 장면이 좋았습니다. 얼굴이나 외모가 아니라 함께 살았던 사람만 알 수 있는 기억이 신분을 증명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사람의 모습은 변해도 둘 사이에 남은 기억은 변하지 않았다는 뜻처럼 느껴졌습니다.
음...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는 의식하게 됐습니다. 제목이 '초역 오디세이'인 만큼 고대 서사시를 오늘 읽기 편한 이야기로 상당히 빠르게 재구성한 책이라는 점입니다. 문장이 영화 장면처럼 빠르고 인물의 감정도 분명하게 표현돼 있어서 고전에 대한 부담은 확실히 적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곧바로 호메로스 원전의 문장과 분위기 자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저에게는 오히려 이 점이 이 책의 역할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름만 들어봤던 오래된 고전에 먼저 발을 들여놓게 해주는 책이라고 할까요... 처음부터 원전의 낯선 이름과 긴 서사에 들어갔다면 저처럼 처음부터 읽지않고 패스하거나,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따라가고 나니 원래 '오디세이아'는 어떤 느낌일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 흐... 아마 원작을 정독할거 같아요... ^^;;;
다 읽고 나니, 역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오디세우스가 그 많은 유혹과 위험을 견디는 이유도 결국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더 편안한 곳에서 칼립소와 머물 수도 있었고, 중간에 포기할 이유도 충분했지만 계속 이타카를 바라봅니다. 아무리 멀리 돌아가고 중간에 길을 잃더라도 내가 돌아갈 곳을 잊지 않는 것. 어쩌면 '오디세이'가 그렇게 오래 살아남은 이유도 괴물이나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는 이런 '돌아가는 길'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