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 그림과 문장과 삶을 엮은 내 영혼의 미술관
이소영 지음 / 청림Life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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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

"그림을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마음을 잠시 맡겨도 되는 공간으로 느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밤에 천천히 펼쳐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그림을 보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를 보더라도 작품 앞에 오래 서 있기보다는 설명을 훑고 다음으로 넘어가게 되고, 그림을 '본다'기보다는 '소비한다'는 느낌이 더 강했어요. '그림 읽는 밤'을 읽게 된 건, 이 책이 그림을 빠르게 이해시키기보다 천천히 머무는 시간을 복원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미술 에세이를 써 오던 이소영 작가님이 이번에는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읽는 사람'으로 돌아왔다는 점도 마음을 끌었습니다.

이 책은 크게 3장, 48일 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1장은 '읽고, 놀고, 사랑하라 : 일상의 발견'이라는 주제로 17개의 작품을, 2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가는 법'이라는 주제로 17개의 작품을, 마지막 3장은 '예술과 예술가, 그들이 건네는 말'이라는 주제로 14개의 작품을 이야기합니다.

책의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그림을 바라보는 시간을 "깊은 물속으로 잠수하는 것"에 비유합니다. 표면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붓질 하나와 색의 조합 하나에도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는 고백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 밤의 시간들은 고독했지만 풍요로웠다고 말하는데, 이 문장을 읽으며 이 책이 단순한 그림 해설서가 아니라 사유의 기록에 가깝겠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책 초반부에서 만난 에바 곤잘레스의 '침실에서' 이야기는, 그림을 보는 시선을 일상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여인의 맨발이 닿은 차가운 바닥, 아직 방을 채우지 못한 아침의 빛... 작가는 이 그림이 일상을 미화하지 않고, 잠에서 막 깨어난 몸의 감각을 그대로 담아낸 장면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김용택 시인의 "사람들이 가 보지 않은 세상이 얼마나 많은가"라는 문장을 겹쳐 놓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우리가 반복된 하루를 살고 있다고 믿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제와 같은 침실, 같은 커튼, 같은 아침이지만 오늘의 빛은 어제와 다르다는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그림을 통해 새로움을 발견하는 일이, 사실은 익숙한 일상을 다시 바라보는 연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앙리 루소의 '카니발 이브닝'을 다룬 이야기에서는 그림이 개인의 상상력뿐 아니라, 시대의 공기를 어떻게 품는지가 잘 드러났습니다. '일요일의 화가'였던 루소가 정규 교육 없이도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왜 그가 화려한 카니발이 아니라 쓸쓸한 겨울 숲에 피에로와 콜롬비나를 세워 놓았는지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19세기 말 파리의 산업화된 풍경, 축제조차 어딘가 쓸쓸했던 도시의 분위기... 작가는 루소가 그 멜랑콜리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그림 속 환상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을 가장 솔직하게 반영하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상은 도피가 아니라, 감정의 다른 언어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읽어 가면서, 이 책속 그림이 다루는 감정의 밀도는 더 깊어짐을 느꼈습니다. 뵈클린의 '죽음의 섬'을 설명하는 장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막막함과 초월의 감정이 차분하게 풀어집니다. 이 그림이 여러 시대의 권력자와 사상가들에게까지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상실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보편적인지를 새삼 느꼈습니다.

프랭크 웨스턴 벤슨의 '그랜드강 위에서'를 다룬 이야기에서는 삶을 '고요한 투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인상 깊었습니다. 물 위를 나아가는 사내의 항해는 겉보기엔 평온하지만, 실은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야 하는 긴장의 연속이라는 설명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작가는 그의 막대를 도구가 아니라 자연과 대화하는 언어라고 표현합니다. 이 문장을 읽으며, 투쟁이 꼭 소란스럽거나 격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용히 균형을 잡아 가는 일 역시 충분히 치열한 싸움이라는 점에서요.

'그림 읽는 밤'을 다 읽고 나니, 그림을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기보다는 그림 앞에 더 오래 머물고 싶어졌습니다. 이 책은 작품을 해석하는 정답을 주지 않았고, 대신 질문과 여백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림과 문장이 나란히 놓인 자리에서, 독자가 자신의 언어로 다시 생각해 보기를 조용히 권하는 책이었습니다. 바쁘게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고 싶을 때, 설명보다 감정을 먼저 느끼고 싶을 때 이 책을 떠올리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림을 잘 몰라도 괜찮고, 많이 알 필요도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은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림을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마음을 잠시 맡겨도 되는 공간으로 느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밤에 천천히 펼쳐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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