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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자
배수아 지음 / 열림원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순전히 시대적 배경 때문이었다.
내겐 70~80년대 대학가, 특히 80년부터 87년을 관통하는 대학가에
일종의 로망 비스무리한 감정을 갖고 있다.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20대의 열정이라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시대정신'이란 말인가!?
비록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운동권의 모순과 진실, 나아가 한국 민주화 진영의 어두운 단면을 알아감에 따라
6월 혁명이라는 물리적 결실로 인해 '민주주의'라는 거룩한 이름 뒤에 숨어 있던
그릇된 비판 의식과 자가당착적 행동들을 알아가며 너무나 많은 실망을 했었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공통된 '대의'를 가슴에 품고 살아왔던 그 시절의 젊은이들,
이제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되어버린 그 시절 지금의 '우리'들을 동경하는 마음은
아직까지도 가슴 한 켠에 아스라히 지니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민주화된 사회에서 사회의 '진보'에 대한 고민과 걱정보다는
각 개인의 스펙 쌓기에 열중하며 부단히도 개인을 철저히 상품화했던
나의 대학시절, 우리의 대학시절을 돌아보면 품었던
일종의 민주주의에 대한 '부채의식'일지도 모른다.
뭐 아니면 단순히 철없는 망둥이가 품고 있는 혁명에 대한 환상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나의 20대, 우리의 20대가 역사상 제일 한심한 꼴통집단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상황에 맞게 변하게 되어 있을 뿐이지
애시당초 이꼴통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라의 불공정한 시스템에 분노하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20대의 잘못으로 나라가 이지경이 되었다는 건
21세기의 진보꼴통들이 만들어낸 가장 효과적인 발명품 중 하나인
'책임회피 및 자기방어 무기'일 뿐이다.)
배수아의 [독학자]는 우리 사회의 가장 그로테스크한 시기였던
80년대 후반 대학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품이 꽤나 흥미로웠던 건
지금껏 신문 기사나 칼럼, 혹은 딱딱한 사회과학적 문체로만 접했던
80년대 대학가의 모순점을 1인칭 시점을 바탕으로,
대학 시스템과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환멸을 느끼는
'나'를 주인공으로 상당히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단순히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비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무살, 한 인간의 치열한 내적 고민과 투쟁을 'S'라는 인물을 통해
맞닥뜨리고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 또한 꽤나 흥미로웠다.
그러나 생각만큼 이 책은 재미있고 친절한 작품은 아니다.
1인칭 시점이긴 하나 독백도 아니고 연설도 아닌것이
지나치게 '서술'을 중점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부분도 그렇고
등장인물들도 몇 안되고 단선적이어서 단순히
소설의 '재미'만을 느끼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또한 작중의 '나', 즉 주인공은 지나치게 이상주의를 견지하고 있어서
혹자에게는 비판만 있을 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모순 덩어리 인물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에
감정이입에 약간은 불편함이 있을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융단폭격 수준으로 쏟아지는 온갖 말들의 향연 속에서
어떤이들은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중간에 책장을 덮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을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198X의 어느날의 이야기를 그린 이 책을.
세상은 모두 '나'와 같지 않다.
실상 나이라는 기준 하나로 '우리'라고 강제로 묶여버리는 집단 안에서의
수많은 '나'는 결코 우리라는 집단체로 단순히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이다.
나의 '나'는 다른 '나'와 같지 않기에 우리는 의사소통이 필요하며,
그를 통해 '나'는 다른 '나'와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내적으로 진보한다.
우리는 조금 더 많이 듣고, 조금 더 많이 보고, 조금 더 많이 대화할 필요가 있다.
비록 우리가 바라보는 그 대상이 2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우리'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건 20대를 지내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너무나도 가벼운 삶에 대한 부끄러움의 성찰이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조차도
모든 열정을 쏟아붓지 못한 후회에 대한 깨달음이며
진정으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거울이다.
소설 속 '나'에게 공감이 되거나 거부감이 들거나 하는 건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깃털처럼 가벼운 이 시대에 20대의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진지하고 무게있는 (그래서 더욱 이질적인)이 책의 존재감만큼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어떤 형태로든 깊이 자리잡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21세기에 노래하는 20세기의 자화상은 그리 낭만적이지도, 그리 슬프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