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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고 국내 소설에 대한 흥미가 다시금 생겼다.
국내 소설이라고 해서 문체나 주제, 분위기가 다 똑같은 건 아닐진대
고작 한 작품 읽고 '국내 소설'이라는 분류상 거대한 그룹 전체에 대해
흥미가 생겼다고 말하는 게 조금 우습고 앞뒤도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어쨌건 우리나라의 언어로 말하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던 게 사실이다.
그렇게 선택한 작품이 김영하의 [빛의 제국]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김영하의 작품을 하나도 읽은 적이 없다.
그 유명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도 [퀴즈쇼]도
[오빠가 돌아왔다]도 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선택했던 이유는 책의 주제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다)
책의 주인공 기영은 북한 간첩이다.
이 사실은 비교적 책의 초반에 나타난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살아가다가
문득 넌지시 '간첩'이라는 정체가 밝혀지는 타이밍, 이 대목이 참 흥미로웠다.
그러나 기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니다.
(잠깐, 진짜 당신은 아직까지도 간첩하면 흉칙한 괴물의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아내가 있고 딸이 있는 너무나도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이다.
(역시 남파된 간첩이었던)그의 직속상관이 북한의 지령에 의해 북송되어
숙청당하고, 바로 밑의 부하였던 기영 역시 생포되어 북송될 위기에 처했지만
가까스로 그 위험을 넘기고, 기영은 그렇게 남한에서 남한인 코스프레를 하며
유령처럼 살아갔다. 북한에서조차도 기영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느날 기영에게 십 몇 년만에 '지령'이 내려온다.
암호로 되어있는 그 지령을 보고 기영은
"북한으로 넘어오라"는 명령으로 생각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대충 내용은 이렇다.
인상 깊은 건, 간첩의 시각으로 본 우리나라의 80년대의 모습과,
간첩의 시각으로 본 북한 체제의 모순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물론 간첩이라는 극중 캐릭터를 통해 전달하는 작가 자신의 생각이겠지만.
제3자의 시각으로 본 우리의 모습과, 당사자의 시각으로 보는 타지의 모습.
어떻게보면 상당히 고리타분하다고 느낄 법 하지만,
(북한 정권과 남한 정권이 겉으로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있음으로 인해서 체제 공고화를 더욱 더 다질 수 있었던
70~80년대의 지독한 패러독스는 모두가 다 알고 있었던 사실 아니던가)
생생한 묘사와 무디지 않은 통찰력 덕택에 그리 통속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한 방이 없다는 건 아쉬운 부분이다.
소재 자체는 매우 흥미롭지만,
결말로 다가갈수록 그저 그런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이 부분이 안타깝다.
기영의 아내 마리의 이야기는 공감도 잘 가지 않을 뿐더러
너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부분이 불필요할 정도로 많아서 불편했다.
그리고, '쿨한 캐릭터'는 국내 소설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필수요소인가?
'쿨함'을 제외하고는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없는 건가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빠짐 없이 등장하는 현실성 제로의 캐릭터는 여기서도 여전하다.
(대체 대학생 두 명과 쓰리썸을 하는 40대의 기혼 여성이 어떻게 쿨할 수 있단 말인가?)
나쁘지는 않지만 그리 인상 깊은 책은 아니다.
흥미로운 소재가 너무나 아쉽다.
만족하지 못하는 건 작품 자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밤은 노래한다]를 보고 너무 눈이 높아졌던 탓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