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살인의 해석
제드 러벤펠드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재밌다.
무려 500페이지가 넘는 짧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책들을 보다보면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동하는 것들,
즉 틈틈이 남아있는 책의 분량을 무의식적으로 확인하며
언제 끝나지? 라는 생각과 함께 초조하게 결말을 기다리는,
그런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술술 막힘없이 읽힌다.
또한, 이 책의 소재는 무려 '프로이트'와 '융'이다!
그 명성과는 달리, 혹은 그 명성에 걸맞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에 비해서
그의 개인적인 사생활은 많은 부분이 베일이 쌓여져 있는데
작가 제드 러벤펠드는 그런 프로이트의 '사생활'과 그의 '이론'을 책의 소재로 내세웠다.
그것도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오묘한 스승-제자 관계였던 카를 융과 함께 말이다!
이 정도면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다.
이론이 정립된지 100여 년이 지났음에도 비전문가들에겐 여전히 신비한 세계인
'정신분석학'을 가운데에 두고, 실존인물이었던 프로이트와 융이 나오며
소설의 주된 내용은 미스테리 스릴러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아쉽다.
일단 최고의 소재거리인 프로이트와 융에 대한 내용과
소설의 주된 내용인 살인사건에 대한 조화가 매끄럽지 못하다.
즉 두 가지의 이야기가 따로 놀고 있다는 말이다.
이 둘이 실존 인물이었기 때문인지 작가는 프로이트와 융을
직접적으로 사건의 중심부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대신 미국의 정신분석학자인 주인공 '나(영거)'를
피해자 담당 의사 역할로 사건의 중앙에 배치시켜 놓고
이 사건에 대해 프로이트에게 조언을 받는 형식으로
소설의 주된 테마와 실존 인물들을 매듭지어 놓는다.
물론 작가로서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겠지만,
그만큼 이 소설은 리얼리티와 픽션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즉, 프로이트와 융, 브릴, 페렌치 등 실존 인물들 위주로 내용이 진행될 때와
영거, 리틀모어 등 소설 속 허구의 인물들 위주로 내용이 진행될 때의 괴리감
(그것이 분위기든 리얼리티든 재미든 뭐든 간에)이 심하다는 게
이 소설의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흥미진진한 헐리웃 스릴러물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디스커버리 채널로 돌린 느낌이고,
익스트림 서프라이즈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출발비디오여행으로 화면이 넘어간 느낌이다.
메인 사건의 스릴러 부분 역시 나쁜 정도는 아니지만
결말에 다다를 땐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두꺼운 분량의 소설 치고는
허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고, (소설 내내 부자연스러웠지만)
프로이트와 융 등의 실존 인물들과 가상의 픽션이 결말에 이르러서는
어느정도 자연스럽게 조화가 될 것이라고 책 읽는 내내 생각했던 걸
상기해보면 결말 부분의 매력이나 임팩트, 깊이는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이 책을 끝까지 단숨에 읽은 이유는 과연 이 둘의 이야기가
어떻게 결론이 날까?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프로이트와 융이 등장한 최초의 소설이라는 독창성에 끌려서
이 소설을 집어들었기 때문에 많은 실망을 했었지만,
정신분석을 소재로 한 그럭저럭 재밌는 스릴러물
(이라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굉장히 밝지만)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참, 그리고 이 책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그 어떤 이론서들보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다.
읽다 보면 전혀 어렵지 않은 단어와 표현들로
프로이트의 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이러한 성과는 오히려 '소설'이라는 분류 안에서 이 책이 차지하는 가치보다
100만 배는 더 뛰어나다고 본다. 의외의 발견이다!
ps. (당연하게도)이 책은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확실히 이 책은 헐리웃 장사꾼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다.
책을 읽다보면 여러 부분에서 '영화와 같은 상황묘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인 영거와 리틀모어의 강 밑 탐사 때!)
영화화하면서 프로이트와 융에 대한 부분은 엄청나게 생략되겠지...?
[셔터 아일랜드]를 보고 높아진 관객의 눈높이를 과연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