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죽어야 한다고, 이즈음에는 얼었던 땅이 녹기 시작해 흙을 파기 쉽고, 이어지는 여름의 열기 덕분에 무른 몸뚱이가 순식간에 썩을 것이라서, 세상에서 사라지려면 봄이 알맞다는 게 그가 자식들에게 종종 하던 말이었다.
"아버지는 사는 것보다 죽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십니다."
"거기까지 생각해 주어야 완성된다. 삶이란 게."
아버지는 가르치듯 받아쳤다. 죽을 날 골라서 죽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두이가 비아냥대는 투로 물으면 아버지는 모르는 소리 마라고 핀잔을 주었다.
"안 죽겠다고 버티면 한 계절은 산다. 이대로 죽겠다 맘먹으면 하룻밤도 안 살고 간다. 짐승은 시간을 끄는 법이 없지.
인간만 죽음을 몰라."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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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교시를 마칠 때까지 호재는 내처 엎드려 잤다. 그게 뭐든간에 대놓고 포기하는 짓을 할 때마다 번번이 뿌듯했다. 공부말고 다른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인 양 자신만만한 자세.
내겐 다른 꿈이 있다는 선언을 담은 포기, 수학은 내 인생에 하등 도움될 리 없음을 전면에 드러내는 거라서 호재는 떳떳했다. 어느 선생도 호재의 위풍당당한 포기를 제지하지 않았다. 정말로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됩니까? 호재의 등은 그렇게묻고 있었지만 누구도 호재를 깨워 답해 주지 않았다. 정답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질문을 던진 사람의 목소리만 나 날이 커져 가는 꼴이었다.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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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른이 되면 다 혼자가 될 텐데, 
그렇게 보자면 나는 미래를 앞당겨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 뒤로 그는 너무 크고 나는 너무 작아‘라는자조가, 어떤 사람은 미래 대신 과거를 끌어다가 쓰지‘라는 우롱이, 나는 보기보다 야무지고 똑똑한 아이‘라는 자만이 차례차례 생겨났다.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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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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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소설가 최진영은 ‘우리‘라는 단어를 불행의연대로 이루어진 무리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작가다. 삶이 무서워서 얼어붙은 사람에게 서슴없이 다가가서 짧은칼날로 얼음을 깨뜨리는 작가다. 같이 무서워해요. 아마도진영은 그 말을 하려고 칼을 샀을지도 모르겠다.
p.244
‘이제야‘는 그녀의 이름이지만 다 읽고 나니 이 책의 제목
‘이제야 언니에게... ‘에서는 어쩐지 ‘이제야‘가 부사로 읽힌다.
우리는 아니, 어쩌면 나는 ‘말하고 있는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시 말해 이제야 무언가 조금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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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삶을 통해 끝없이 번져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흐르기만 하는 것이 시간이라면, 시간이란 결국 죽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니 불행은 죽음이 아니고, 죽음도 불행이 아니다. 불행은 사는 일이 무서워지는 일, 삶이 공포로만 남는 일, 말하자면 시간이 얼어붙는 일, 얼어붙은 채로 사는 일.
p.243 황현진 발문에서

‘당신 곁을 스쳐지나간 그 소녀의 이름은‘을 읽고
늘 다른 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가다. 최진영은,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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