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빈 단편집 - 지만지 고전선집 413
유리 나기빈 지음, 김은희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7월
절판


 가이는 정신과 의사에게 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치료하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부터 해명해야만 했다. 자신도, 삶도 잃어버릴 정도로 그렇게도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란 말인가. 기나긴 사색과 비교 후에 그에게는, 사랑을 잃어버린 후에 자신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세계에 대한 모든 관념을 잃어버렸다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다. 이제 그가 보는 집, 나무, 새, 개, 의자, 우체통, 계단, 구름, 별 등 모든 것은 고통의 감춰진 뒷맛을 함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가장 복잡하고, 포착하기 어려운 연상 과정을 통해서 레나에게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레나에 이르기까지 주위의 모든 것은 마치 안개에 덮여 있는 것 같고, 모든 것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들이 아니고, 존재들도 아닌, 사물들의 그림자이며, 존재들의 그림자이다. 레나가 있을 때는, 그 자신을 포함해서, 세계에 정주한 모든 것이 완전한 존재로 채워졌었다. 색채로, 냄새로, 소리로, 이차적, 또는 최고 의미의 명확성으로. 사랑은 사물을 자기 자신의 등급으로 끌어올린다.-219~220쪽

사랑을 잃는다면 사물은 고통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버리고, 사랑이 찾아오지 않는 한, 사물은 단지 자신의 헐벗은 본질의 표시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우울한 결론에까지 이른 그는, 레나가 있을 때 정말로 나무가-나무, 울타리가-울타리, 벤치가-벤치, 별이-별이었는지를 검토해 보기 시작했다. 그렇다, 지금 생각하기에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면 실제로는 어땠을까. 그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내부에는 이미 다른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만약 레나가 돌아온다면, 레나 자신이, 사랑으로 가득 찬, 이전과 똑같이, 나무가 다시 나무가 되고, 울타리는 울타리, 별은 다시 별이 될 수 있을까?-220~221쪽

 가이는 완전히 해부되어 있었다. 병든 조직은 모두 성공적으로 제거되었지만, 침범 면적이 너무나 큰 것으로 드러났다. 그 속에 남겨진 것으로는 어쨌든 살 수가 없었다. 레나는 그에게서 그가 마지막으로 매달렸던 과거를 빼앗아 갔다. 이제야 그는 알았다.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른 좌표 체계에서, 다른 차원에서, 심지어 다른 시간 속에서 존재했었다. 그들은 만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에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공허함이 혀끝에 닿는 구리의 뒷맛처럼 느껴졌다. 가이는 침을 뱉었고, 눈 속에는 검은 작은 구멍이 생겼다. 바로 이렇게 지나온 평생으로부터 남은 것이라고는 입안에 남은 구리의 뒷맛뿐이었다.-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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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빈 단편집 - 지만지 고전선집 413
유리 나기빈 지음, 김은희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살짝 바랜 현대 러시아를 단편으로 항유할 수 있는 성찬. 단, 해설은 최후에 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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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빈 단편집 - 지만지 고전선집 413
유리 나기빈 지음, 김은희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7월
절판


 골목에서 그는 그의 수많은 낮과 밤들이 묻혀 있는 집을 돌아보았다. 멀리 창문에서 몸을 내민 아내가 그의 뒤를 보고 있었다. 이상하고도 부자연스럽게도 가깝게 그는 그녀의 확장된 모공이 있는 부은 얼굴과 주름진 눈꺼풀에 병 색깔의 흐린 눈을, 일찍 나이 들어버린 여자의, 어느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고 보호받지 못하는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강렬하고도 당황스러운 호기심으로, 악의 없이, 질투도 없이, 마치 도달하기 힘든 어떤 것을 보듯이, 위를 향했지만, 아래를 보는 듯이, 쓰러진 기마병의 시선으로, 총에 맞아 떨어진 새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작별로 손을 흔들려고 했었지만, 갑자기 목으로 어떤 이상한 것을 삼키는 듯한 소리를 내고는 뒤돌아섰다.-108~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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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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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진짜 사람, 적어도 나만큼은 진짜인 사람들이다.-21쪽

난 우리가 죽음을 거스르는 것을 정복하지 못했기에 불멸성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불멸성이란 육체 전체가 살아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는, 가장 초보적이고 기본적인 생각만을 주장한다. 우리는 의식과 관련 있는 부분만을 영원히 보존하려고 추구해야 할 것이다.-28쪽

오늘 오후에 낮잠을 자면서 마치 내 인생에 대한 상징적 또는 예언적 해설과 같은 이런 꿈을 꾸었다. 크로케 경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경기에서 내 역할은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58쪽

1. 절망감.
2. 배우이자 관객이라는 이중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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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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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목소리가 아닙니다. 귀입니다.-172쪽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207~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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