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
로버트 루이스 윌켄 지음, 배덕만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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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윌켄은 초기 기독교 사상이 형성된 과정을 더듬어 기독교 신앙이 어떤 지성적 전통 위에 서 있는지 밝힌다. 그러나 이 책이 여타의 <초기 기독교 사상사>와 구별되는 점은, ‘기독교의 그리스화라는 아돌프 폰 하르낙의 초기 기독교 사상의 발전 개념을 정면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주객이 전도되었다. ‘기독교의 그리스화가 아니라 헬레니즘의 기독교화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지난 1세기 이상 초기 기독교 사상의 해석에 영향을 끼쳐온 폰 하르낙의 이론에 대한 저자의 반론은 많은 교부들의 저서와 설교, 기도문, 문학 등에서 인용한 구체적인 증거들로 무장하여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기독교 사상을 형성함에 있어 교부들은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해 매우 유연한 태도를 지녔다. 이들은 일찍부터 그 시대의 문화와 호흡했고 친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발견한 기독교 신앙은 특별했고, 때문에 교부들은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토대로, 기독교 예배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성경으로부터”(23) 사고하고 변형하며 수용했다. 초대교회는 역사, 제의, 문헌을 기반으로 자신들이 믿는 바를 이해하고자 할 뿐 아니라, 외부 세계를 이해시키고자 끊임없이 논쟁했다. 기독교 사상은 처음부터 탁월한 그리스-로마 사상가들을 상대로 혹독한 스파링을 이겨야 했다. 교부들은 고고한 선비라기보다 마치 거친 근육을 자랑하는 투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들은 차가운 이론에 머물지 않았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정의하거나 규정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고 사는데 목적이 있었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관찰에 있지 않고 사랑과 복종에 있음을 저들은 몸으로 살았다. 고백과 삶이 일치하는 거인들을 만나니, 부끄러운 감정에 든든함이 더한다.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나의 유약함이 부끄러움의 이유라면, 견고한 기초를 쌓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앉은 든든함이다. 깊은 샘물에 두레박을 내리고 보니 청량감이 제법 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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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 - 악, 고난, 신앙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토마스 G. 롱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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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신도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결코 담담해질 수 없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하소연들이 고스란히 전이되어 목사의 몫이 된다. 그 동안 주워 들은 신정론의 지식들과 관련 성경구절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느라 진땀이 나지만, 어느 누구도 심지어 목사인 나도 그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 급기야 나답지 않은 하나님 때문에 화가 치민다. 고통의 때에 하나님의 선하신 얼굴은 짝이 맞지 않는 퍼즐과 같다.

설교학자인 저자는 무고한 고통의 순간에 목사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한다. 신정론의 역사를 더듬어 계몽주의와 자연 철학에 기반을 둔 유신론적 해법이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잘못된 출발점이라도 그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조언은, 설교자가 세상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이 책의 최고 장점은 목회 현장을 염두에 둔 통찰이다. 신정론을 신학적 담론으로 박제하지 않아 마음에 들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주석은 당장이라도 써먹을 수 있을 만큼 실제적이어서 고맙다. 더 나아가 지금 위기에 처한 것이 신앙의 기초만이 아닌 진정한 예배의 능력이라는 것(68),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에 관해 의미 있게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방식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영적이면서도 제도적인 종교를 거부한다는(70) 일침은 닫혔던 생각의 창을 활짝 열어젖힌다.

고통과의 씨름은 끝나지 않았다. 더 나은 이야기를 건졌으나 아직 완전하진 않다. 아마도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때까지 씨름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무고한 고통의 순간에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 신학적 상상력 위에 창조적인 예배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는 저자의 조언은 긍정을 향한 바른 지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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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김기현 외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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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 질문을 한다. 그것도 정색을 하고 묻는다. 결코 쉽지 않은 질문들이다. 아버지가 대답한다. 역시 정색이다. 쉽지 않은 질문들이니 그 대답 역시 쉽지 않았으리라. 즉문즉답이었으면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될 법한 내용들인데, 이들은 필문필답으로 불필요한 논쟁과 곁가지들을 가능한 잘라냈다. 아날로그 식 편지의 장점을 극대화한 셈이다.

우선 형식이 눈에 띈다. 물론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 자체는 무수히 많은 책에서 보아왔던 전형적 형식의 하나이다. 그러나 누가 질문하고 누가 대답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가? 이 책의 공저자 김기현과 김희림은 부자지간이다. 대답하는 사람 김기현은 목사요, 인문학적 책읽기와 글쓰기로 기독교적 질문들에 대답하려는 변증가다. 그의 대답은 논쟁에 대해 솔직하며, 대답에 있어 겸손하다. 지나친 단순화나 무례한 현학을 거부하면서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공을 들여 설명한다. 그래서 그의 대답은 공감이 가고 믿을만하다.

질문하는 사람 김희림은 그런 김기현의 아들이요 현재 고 삼 학생이다. 한국 사회에서 고 삼학생은 여러 가지 함축적 의미를 띤다. 입시를 코 앞에 두었다는 것, 식상한 말로 질풍노도의 청소년 꼬리표를 아직 떼지 못했다는 것, 본인들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몰려다니는 그들을 보면 기성세대는 좀 두려운 마음이 든다는 것. 한 마디로 속을 알 수 없고 어디로 튈지 모를 불안한 세대이다. 그런 청소년이 정색하고 질문을 한다고? 그것도 아빠에게? 이 책의 형식이 남달라 보인 이유이다.

때문에 이 책은 응답자 김기현보다 질문자 김희림에게 더 방점을 찍어 주고 싶다. 그의 질문들을 읽어보면, 그냥 스쳐 지나가듯 발설한 카톡식 질문이 결코 아니다. 또한 이것이 청소년의 필력이 맞나?’ 싶을 만큼 그의 질문은 예리하다. 하나님은 언제 악에게 승리하실지, 기적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오직 기독교만 옳다고 봐야 하는지, 기도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등등, 폐부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열 개의 질문을 읽다 보면, 아버지의 쩔쩔매는 모습이 연상되어 은근히 읽는 맛을 더한다. 이런 글 배틀(battle)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저자 김기현이 수 년 전부터 일구어놓은 로고스 서원이라는 독서와 글쓰기의 터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니까 김기현과 김희림은 부자지간이면서 동시에 사제지간인 셈이다.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부자지간은 원래 사제지간일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옛날에는 당연히 그러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옛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학문의 스승이거나 기술의 전수자였다.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은 무수히 질문하고 대답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그 모든 역할을 학교에 내어 맡기지 안았는가? 그래서 자녀들은 더 이상 아버지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아버지는 아들과 맺었어야 할 중요한 역할을 도난 당한 셈이다. 그래서 대답을 고대하는 아들의 신뢰나, 정직하게 대답하고자 애쓰는 아버지의 사랑도 발견할 수 없는 서먹한 관계가 된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문득 생각했다. “내가 아버지께 드렸던 마지막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몇 년 전 하늘나라에 가셔서 지금은 질문하래도 할 수 없는 당신께 드렸던 나의 마지막 질문…,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서글펐다. 서로에게 질문하는 관계, 그것이 정답은 아니어도 함께 응대할 수 있는 관계, 부모와 자녀는 마땅히 그러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안쓰러움이었다. 이것이 기독교 변증서로 읽힐 법한 이 책이, 내게는 변증서가 아닌 부모와 자녀 간의 소통을 불러일으키는 가정사역서로 읽히는 이유이다. 솔직하게 물을 수 있다면, 대답이 명쾌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아버지와 아들, 좀더 솔직하게 질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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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아트 스피치 - 대한민국 말하기 교과서
김미경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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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말하기 교과서.” 이 책의 부제목이다. ‘출판사에서 책 팔아먹으려고 좀 과한 제목을 붙였군.’ 이것은 내 처음 생각이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그게 아니다. ‘저자가 누군가?’ 프로필을 보니 TV에서 인기강사로 활약한 것 같은데, TV 시청을 잘 하지 않는 내 입장에서는 저자의 얼굴이나 이름이 생소했다. 그런데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무렵 저자를 이미 만난 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저자의 어머니가 지어냈다는 저자의 태몽 대목에서다.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예전에 우연히 아침 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한 여성 강사가 기가 막히게 이야기를 잘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대미를 장식했던 바로 그 어머니의 태몽이야기는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했다. 그때는 ‘웬 여자가 저렇게 말을 잘하나?’ 하고 그냥 스쳐 지나쳤다. 그런데 그 강사가 바로 저자 김미경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처음부터 강사로 활동한 것은 아니다. 원래는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던 ‘음악선생님’이었다. 그러나 학원 운영에서 보람을 찾지 못하던 어느 날, 잘 나가던 피아노 학원 일을 접고 전문 강사의 길로 들어선다. 이 과정에서 지난 30여 년간 한결같이 스피치 파트너가 되어 주었던 아버지의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당장 학원 때려치우고 강사 시작해”란 응원도 한 몫 했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말을 잘 했다. 그러나 오늘의 유명 강사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게 되기까지 ‘원래 그랬다’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 저자는 노력의 과정에서 얻은 열매들을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아 스피치를 예술로 승화시킨 말하기의 장인(匠人)이다.  


우선 이 책은 다른 스피치 책과는 다른 독특함이 있다. 그것은 저자의 전직과도 연결이 된다. 김미경은 스피치를 음악과 연결시킨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명곡이 철저하게 과학적 구조를 갖고 있듯이 들리는 스피치, 감동을 주는 스피치는 철저하게 과학적 구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트로, 강약, 리듬, 템포 등과 같이 음악에 숨결을 불어넣는 다양한 악상 기호를 고스란히 스피치에 적용하여, 마치 지휘를 하듯 스피치를 연주하라고 조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련지으라. 그리하면 기적을 경험할 것이다”라고 했다. 철학자의 금언처럼 음악과 스피치가 연관을 맺자 생동감 있는 스피치의 비결이 기적처럼 한 눈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이 책은 소위 말 잘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얄팍한 기술만을 전수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동적인 스피치의 핵심을 ‘콘텐츠’라고 강조한다. 심지어 할 말이 없으면 할 말이 생길 때까지 익히고, 묵히고, 참으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콘텐츠’ 신조는 이 책에도 그대로 녹아있다. 저자는 정말 ‘할 말’을 빼곡히 담아 놓았다. 현장에서 경험한 무수히 많은 에피소드들을 개념화하고 정리하여 원리를 세우고 해법을 제시하는 탁월한 솜씨는 청중을 녹여내는 저자의 능력을 고스란히 책으로 옮겨온 듯하다. 책을 읽으며 “그래, 책은 이렇게 써야 되는데…”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말하기 교과서’라는 부제목, 결코 과하지 않다.  


이렇게 되기까지 치열하게 연구하고 반복 훈련을 한 저자의 열정은 한편으로는 눈물겹고 또한 부럽기까지 하다. 김미경은 단돈 5만원이라도 ‘전문 강사’의 이름을 걸고 할 때는 그에 걸맞은 전문성을 길러야지 결코 호락호락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필자 역시 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소위 말로 밥을 먹는 사람이다. 사실 말한 기회가 너무 많아서 문제다. 때로는 콘텐츠의 빈곤으로 전전긍긍하며 말을 배설한다는 느낌으로 인해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이러다 보니 스피치를 예술로까지 훈련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설교 원고를 작성하여 몇 번 읽어 보는 수준에서 머무는 것에 대해 마음 한 켠에는 늘 부담감이 있었다. 그래서 저자의 프로다운 조언은 어떻게 훈련을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전과 밑그림이 되기에 충분했다. “거목 사이를 걸으니 내 키가 더 자랐다”는 말처럼, 저자를 따라 그녀를 흉내 내다보면, 어느덧 나도 장인의 반열에 올라 있지 않을까 하는 행복한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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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죄인가요?
김기현 지음 / 죠이선교회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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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4월 18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한국의 자살률이 OECD 30개 국 중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연예인 최진영이 자살한 직후였다.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2009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1만4천579명이 자살했다. 40명이 매일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지금도 36분에 1명씩 자살한다. 최근에는 한류스타 박용하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명 인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줄지어 자살하는 파급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실제로 이들의 자살 소식을 듣고 동반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우리나라에서 자살은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출간된 김기현의 “자살은 죄인가요?”는 매우 시의 적절하다. 그러나 그 시의 적절함이 마음 아프다. 세계 경제 대국 10위 권 진입을 눈 앞에 두고 있다는 이 나라가 결코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낙오하는 사람들을 품어주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가 어찌 건강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기독교 신앙이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통계 자료는(29-35),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철저하지 못한가를 일깨우는 경종이다. 한국 사회와 교회에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본서는 이 땅에 펴져가는 죽음의 판을 깨기에 적절한 토대가 된다.  


김기현은 신학자이지만 동시에 한 교회를 목양하는 목회자로서 이 책을 썼다. 그래서 책에는 자살을 생각하는 자들의 옷자락을 붙드는 간절함이 묻어난다. 물론 본서는 철저히 성경적이며, 교회 역사와 교리를 아우르며 자살에 대해 다루어야 할 많은 자료를 진지하게 검토한다. 그리하여 죽음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근거도 불분명한 교리를 되풀이하는 교회로 하여금 성경적인 잣대를 재확인 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차가운 논리 위에서가 아니라, 죽은 자들과 그들 곁에 남겨진 자들에게 따스한 손길을 펴는 목회자의 심정으로 말한다. 그래서 자살이란 뜨거운 감자를 어찌 다루어야 할지 고민하는 목회자들과 교회에게 정직하며 올바른 가이드 역할을 한다.  


어떤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에는 ‘예방비용’, ‘평가비용’, ‘실패비용’이라는 세 가지 범주의 비용이 발생하는데, 이 세 가지 범주 상호간에는 1:10:100이라는 비율이 적용된다고 한다. 문제점을 예방하는 비용이 ‘1’이라면, 실패로 인해 그것을 수습하는 비용은 예방비용의 백배가 된다. 혹자는 ‘자살=지옥’이란 교리적 주장이 자살을 막는 예방비용의 효과가 있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우선 ‘자살=지옥’이란 도식 자체가 성경적이지 못하기에 설득력이 없으며, “진실이 아닌 가르침에 근거하여 교육적 효과를 거두려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81). 오히려 올바른 신앙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에 대한 이해가 자살의 원인이 되는 성공주의와 기복주의의 병폐를 막는 밑거름이 된다고 말한다(99).  


결국 우리는 죽은 자들과 남겨진 자들 모두를 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인 교회가 주님이 의도하신 본질을 회복하여 “참여와 나눔의 밀도”를 높여간다면(106), 자살의 릴레이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충분히 공감이 된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결코 특별함에 있지 않다. 오히려 작고 사소하지만 기꺼이 이웃이 되고자 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때, 삶의 소망을 줄 수 있다.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이 땅의 죽음 문화를 살림 문화로 바꾸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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