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 논쟁 -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 Spectrum 스펙트럼 시리즈 2
마이클 호튼 외 지음, 문현인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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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다른 의견에 대해 관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소위 모난 놈은 정 맞기십상이고, ‘말 많은 놈은 빨갱이로 의심 받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직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여 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고, 심지어 주문하는 음식도 통일시키는 것이 사회 생활을 잘하는 비결로 꼽힌다. 이런 현상은 교회라고 다르지 않다. 무슨 안건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보라. 자칫 믿음 없는 사람이란 의심의 눈총이 날아들지 모른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는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더욱 귀하다. 『칭의 논쟁』의 부제는 칭의에 대한 다섯 가지 신학적 관점이다. 16세기 이후, 교회의 심장이자 교회의 존폐를 좌우하는 조항으로 받아들여지는 칭의에 대해 이토록 다양한 이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각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글과 다른 네 입장의 논평으로 정리해 놓은 이 책은 몹시 매력적이다. 논평에 참여하는 입장들은 전통적 개혁파, 진보적 개혁파, 바울 신학의 새 관점, 신성화, 그리고 로마 가톨릭이다. 특별히 신성화로 대표되는 동방정교회의 입장은 쉽게 접할 수 없던 부분이라 호기심을 자극한다.

칭의에 대한 이견은 이미 성경 안에서도 발견되며,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되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더욱이 교회의 에큐메니컬 상황과 소위 사도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라는 바울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더해지면서 칭의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었다. 칭의에 대한 논쟁과 질문들은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칭의는 법적인가 아니면 효력적인가?’ ‘칭의는 과정인가 순간인가?’ ‘칭의는 분석적인가 종합적인가?’ 각 입장들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스펙트럼의 어느 한 지점에 서서 자신의 입장에 대한 성서주해적 근거들을 제시한다. 내 입장은 전통적 개혁파에 익숙하지만, 다른 주장들, 특히 진보적 개혁파와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해서 공감되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칭의에 대한 내 입장은 전통적 개혁파의 끄트머리 어디쯤인가 보다.

그렇다고 내가 믿는 것에 혼돈만을 야기할까 봐 불편해할 필요는 없다. 논평자들은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서로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토론에 참여한다. 다양한 관점에 대한 성찬으로 말미암아 내가 견지하고 있는 입장이 무엇인지, 또 다른 입장과는 어떻게 다른지 보다 선명한 차이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이렇게 건설적인 토론 문화가 이 땅과 한국 교회에도 하루빨리 정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덤이다. 전통적 개혁파 입장을 견지한 마이클 S. 호튼은 한 논평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진심 어린 기도는 우리가 성서로 함께 돌아가서 진리의 성령에 의지하여 성서 텍스트와 씨름하는 것이다”(443). 나는 너와 다르다. 그러나 보색끼리 나란히 두면 각각의 색상이 더 부각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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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돌려드립니다
권일한 지음 / 좋은씨앗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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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저자가 쓴 <책벌레 선생님의 행복한 책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아이들과 글쓰기 모임을 계획하면서 참고할만한 자료를 찾던 중 발견한 책인데, 그 이상의 것을 알려준 책이었다. 스스로 책벌레이기를 자처하는 저자의 직업은 초등학교 교사다. 책 읽기를 무엇보다 좋아하고, 아이들이 어설프게 쓴 글을 통해서도 그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릴 줄 아는 참 좋은 선생님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더욱이 글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통해, 그가 나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에 묘한 동질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저자가 이번에는 성경을 들고 말한다. 신학교 문턱에도 가 본 적이 없다고 스스로 고백하지만, 전문성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을 듯 하다. 그 동안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터득한 방법들을 평신도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풀어놓는다. ‘전문가입네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는 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친밀함이 책의 구석구석에 배어있다. 학창 시절,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문제풀이를 도와줄 때면, 배우는 사람의 입장을 공감하기에 더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해주었던 바로 그 느낌이다.

원래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책이다. 그런데 어렵다는 이유로 목사의 설교에만 의존하고, 성경 읽기를 다른 신앙 활동으로 치환하며, 절대 기준이 되어야 할 성경을 상대적 가치로 전락시켜 버렸다. 저자는 이것이야말로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사단의 전략이라고 명토 박아 말한다. 더 이상 사단에게 속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직접 성경을 읽고 묵상하라고 초대한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라거나, “성경이 기록된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라와 같은 성경독법은 성경이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성도라면 한 번쯤은 들어봄 직하다. “내용에 맞게 끊어서 읽으라성경을 보는 깊이와 넓이를 갖추라는 대목은 독서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오랜 묵상에서 터득된 나름의 노하우로 읽힌다.

무엇보다 성경은 개인이 아닌 교회 공동체를 위한 책이기에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읽고 묵상하도록 초대한다. 가정을 말씀 공동체로 회복해야 한다. 말씀을 서로 나누는 교회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개인주의적 성경독법에 익숙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고기는 씹어야 제 맛이고, 성경은 듣고 읽고 암송하고 공부하고 묵상해야 참 능력이 된다. 은혜 받는 방식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그러나 성경을 직접 펼쳐, 읽고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그 정수를 맛보는 비결이다. 복되어라. 다시 성경을 펼쳐 읽는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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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풂과 용서 -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김순현 옮김 / 복있는사람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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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그러나 아직도 먼 그 길

미로슬라브 볼프, 『 베풂과 용서 』(복 있는 사람, 2014)

 

사람들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이야기하게 마련이다.” 저자가 인용한 크로아티아의 속담이다. 우리가 베풂과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역시 우리 사회가 그만큼 그것에 멀다는 반증이다. 역사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사회의 각박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세상이 미치지 않고는 이럴 수 없다는 생각을 매일 반복한다. ‘법대로하는 것은 양반이요, 법 위에 군림하고 법을 조롱하는 사람과 엮이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니 베풂과 용서는 이 시대의 천연기념물인 셈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베풂과 용서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초대한다. 크로아티아에서 오순절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저자는, 30년 이상을 공산주의 치하에서 뼈아픈 차별을 견디며 성장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복수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에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인다. 자신의 아들과 형에 대한 이야기 등 베풂과 용서라는 주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저자 자신을 위한 신학적 통찰과 사색의 결과물이다.

저자는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베풂과 용서의 모델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 하나님처럼 베풀고 용서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또 그와 같은 능력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신학자적 꼼꼼함으로 매우 세밀한 분석을 제공한다. 더욱이 바울 서신과 마틴 루터의 저작을 통해 저자가 제시한 길이 이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일관된 방향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특별히 저자는 베풀고 용서하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다. 때문에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했다고 자부하는 것들이 실상은 우리가 속해있는 문화와 집단의 영향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베풀고 용서하는 공동체일수록 우리는 보다 쉽게 그 길을 갈 수 있다. 다시 한번 교회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베풂과 용서의 길은 마땅하지만 현재로서는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함께 가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 길이 조금은 덜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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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설교 갈라디아서 읽는 설교 시리즈
화종부 지음 / 죠이선교회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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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正意)만 잘 내려도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많은 갈등과 왜곡이 같은 단어를 다르게 정의하거나 오해하여 생긴다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조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도 복음과 그 본질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 진단하고, 조국 교회를 향한 사회적 지탄을 교회다운 교회, 복음과 내용에 충실한 기독교로 전환하라는 뜻으로 읽는다고 밝힌다(12). 이에 대한 저자의 처방이 갈라디아서다. 율법과 행위로 회귀하려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바른 복음 선언을 오늘 현대 교회가 제대로 들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로 왜곡된 교회의 문제를 풀어보려는 저자의 생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설교의 현장성을 중시한다는 저자는, 가급적 설교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여 읽는 설교라는 독특한 제목과 함께 거의 500 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볼륨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인지, 설교를 읽는 내내 강대상 앞으로 불려가 오롯이 앉아 있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짧지 않은 매 설교마다 예화를 배제하고 본문의 의미를 충실히 강해해 나가는 방식은 설교에 대한 저자의 곡진한 열심을 반영한다.

갈라디아서 설교를 통해 저자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은혜로 주어진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에게서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세속적 종교성으로부터 철저히 돌이키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한국교회가 선행이나 성화를 덜 강조해서 성도들의 삶에 행실이 모자란다는 진단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은혜를 통한 구원에 충실해야 참된 행실을 하게 된다고 진단한다(139). 인간의 상태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복음이기에 은혜이며, 바른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결국 자유와 사랑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나타내기 마련이다(336). 저자는 이렇게 복음의 원래 넓이와 깊이를 복기하여 풍성한 은혜의 샘으로 돌아오라고 초대한다.

한편, 은혜로 주어지는 복음의 연장선으로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복과 상급에 대한 설명은 다소 혼선이 있어 보인다. 저자는 흔히 생각하는 상급이나 복은 행함으로 받는다는 생각에 제동을 걸고(134, 186), 가난과 질병 속에서도 누리는 부요와 풍요를 강조한다(199-202). 이는 아마도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을 겨냥한 표현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러면서도 저자는 세속적인 복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 것이 되었다는 주장까지도 하여(237, 457, 470) 다소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생각 같아서는 복음과 복에 대해 하나의 설교를 할애하여 논쟁해주길 기대했지만, 산발적인 선언에 그칠 뿐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아 다소 아쉽다. 저자의 주장처럼, 복음에 대한 바른 믿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며(484), 복과 상급에 대한 한국교회의 태도는 믿음의 정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한 본질적인 추적은 교회됨의 시금석이기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는 교회가 다시 귀담아 들어야 할 복된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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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양희송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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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피식하는 웃음과 함께 이름 한 번 잘 지었네하고 생각했다. 가나안 성도란, 교회에 안 나가를 선언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단지 풍자의 의미를 넘어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가나안 성도가 적어도 100만이나 된다는 데이터와 함께, 저자는 가나안 성도가 이렇게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그들과의 인터뷰와 사회학적 분석으로 풀어놓는다. 실소로 시작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급격히 우울해진다. 집이 싫다고 가출한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 심정이다.

그러나 가나안 성도는 교회에 나가지 않을 뿐,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게으름이나 소위 믿음이 없어서 교회 출석을 등한히 하는 사람들과는 구별된다. 문제는 이들의 출현으로 인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라는 구원론을 담지한 교회론의 논쟁을 촉발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교회론 논쟁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살피며, 종교개혁의 역사 자체가 더 이상 교회라 할 수 없는 기존 교회의 구원론적 독점권을 폐지하고 이것이 교회다라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온 역사라고 규정한다(144). 다만 가나안 성도 현상은 제도 바깥에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세우는 집단적 대안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이미 시작된 탈교회 경향을 가속화하고, 가나안 성도 현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일 수 있다. 또한 교회 안에 있는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씨름하며 정직하게 대면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다만 바라기는 떠난 그들을 향해 모든 것이 해결 되었으니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목사인 나를 비롯하여 한국교회가 교회다움의 화두를 깊이 품고 자기 반성의 길을 주저 없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이 제발 공염불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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