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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기적
정현우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5년 12월
평점 :
제목이 주는 대조적인 인상이 가장 먼저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기적'인데 왜 그것은 '검은색'일까. 나는 왜 기적인데도 검은지에 대한 질문을 품고 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집 속에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의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현실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실을 받아들이는 방법과 그 애도의 깊이를 아주 낮고 깊게 그려냅니다.
많은 이들을 뒤로 남겨두고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집의 구절구절에 공감할 부분이 참 많을 것입니다. 특히 과일과 채소로 기억되는 어머니의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인이 그 대상을 향해 느끼는 깊은 애정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배어 나오는 '즙'이 마치 관계의 농도 짙은 사랑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움은 곧 애도의 시간이라는 말이 피부로 와닿는 지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이별을 마주할 때 감정보다는 큰 일을 치러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러다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이별을 실감합니다.
특히 (베개) 라는 시가 제 마음속에 깊이 울려 퍼졌습니다. 오래전 한 강의에서 강사님이 "다른 곳에서는 냄새가 다 사라졌지만, 베개에서만큼은 남편의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 지워지지 않는 흔적 덕분에 작가가 왜 그토록 깊이 잠들 수 있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대접받습니다. 슬픔이 집을 삼켜버린 듯해도, 남겨진 이들은 배고픔을 느끼기에 억지로 국밥을 먹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나는 아직 살아있지만..." 하고 국과 밥을 섞습니다. 마치 그것이 죄인 것만 같은 기분으로요.
이제 장례식장에 갈 때면 영정 사진 앞에서 나를 여기로 이끈 연결고리를 생각합니다. 그 관계의 깊이를 따지기보다, 이 식사는 떠난 사람이 남겨진 이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라 여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죄책감보다는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먹으려 노력합니다. 그것이 남겨진 자의 도리일지도 모르니까요.
책 속의 문장
P.98 포도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잔인하게 모든 것을 무효화합니다.
유리잔을 뒤집는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일기장에는 시적이지 않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작은 연필로 원을 그리세요. 토독, 토독.
빛, 숨결, 그리고 기억들이 사라집니다.
P.108 매치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이 슬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가진 기쁨의 총량입니다. 다 써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더 슬펐어요.
시인의 노트 중 2024년 6월 4일의 기록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슬픔을 애(哀)보다 사랑의 애(愛)가 더 어울린다. 그녀가 내게 준 사랑이 너무 컸기에, 내가 줄 수 있는 마음은 너무나 작다.
잊혀가는 것들에 기대어 살아가지만, 그녀가 없는 슬픔은 어떤 시간에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고백. 이 시집은 단순한 슬픔의 기록이 아니라, 상실을 통해 증명되는 가장 뜨거운 사랑의 기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