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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전쟁 - 제국주의, 노예무역, 디아스포라로 쓰여진 설탕 잔혹사
최광용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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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같은 현실을 감내하면서도, 노예들은 인간으로서의 본능과 의지를 발휘해 다양한 방식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가장 먼저 실행했던 선택지는 단연 도망치는 것이었다. 물론 도망치다 붙잡히면 가혹한 처벌을 받거나 목숨을 잃을 위험이 컸지만, 많은 이들이 그 위험을 감수했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이라는 절박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87p

「설탕전쟁」 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은 고진감래였다. 쓰디쓴 고생 끝에 달콤한 즐거움이 온다는 사자성어이다. 그러나 쓰디쓴 고생을 하는 이들과 달콤한 즐거움을 누리는 이들이 같지 않았기에, 나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아간다'는 속담을 함께 떠올려야 했다. 설탕을 얻는 게 이리 고된 일인 지 내가 어찌 알았으랴. 그저 마트에 가서 덜렁 집어들고 값을 치르면 되는 것인 줄 알았지,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그것을 수확해 즙이 마르기 전 짜내어 끓이고 자갈같은 설탕결정체를 만들어내는 수고를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 없는 것을 좋아하고 꿈꾸는 것을 이상주의자라고 부른다면 나는 이상주의자이다. 세상의 불공평함과 불공정함을 뼈저리게 알지만 그래도 내가 권한 가지고 있는 선에서는 최대한 공평하고 공정하기를 바란다. 적어도 누군가의 삶이 타인의 삶을 위해 도구처럼 소모되지 않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앞서간 많은 이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진 21세기의 세상에도 가난한 자들, 권력 없는 자들은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편안함을 위해 자진해서 도구가 되어 소모되며 삶을 연명해나가야 한다.

설탕의 역사가 노예의 역사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설탕전쟁이 설탕을 확보하고자 하는 나라들끼리의 전쟁일까 어렴풋이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착취당하던 노예들과 착취하고자 하는 이들간에도 질기고 질긴 전쟁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이라는 처참한 현실과 절박한 심정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이 생산한 설탕의 달콤함을 그들은 알 수 없었다.

탁 트인 바다라면 어디든 좋다. '유럽의 발코니'라 불리는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네르하 앞 지중해도, 쿠바 바라데로의 카리브해도, 우리나라라면 제주도 모슬포의 푸른 남해도 좋다. 아름다운 해변에서 한 손에는 럼주를 들고 입에는 코히바 시가를 문 채, 바닷빛을 머금은 푸른 연기를 천천히 허공에 날리며 하루 종일 늘어져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삶이라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중략) 쿠바 사탕수수 농장에서 럼이 탄생했듯, 세계 각지의 술들 또한 삶의 깊은 고단함과 눈물 속에서 빚어졌는지도 모른다. 167p

아름다운 해변, 럼주와 코히바 시가, 그런 것들을 즐길 수 없는 삶의 고단함과 쓰디쓴 눈물 속에서 빚어진 세계 각지의 술들. 술은 단순한 유흥이 아니었다. 삶을 견디기 위해 일시적으로라도 이지를 흐리게 하고 다 놔버리는 순간들이 필요했던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보레는 설탕을 생산한 첫해에 1만 2000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300만 달러에 달한다. 게다가 이 시기의 설탕은 '백색의 금'으로 불리며 식품 보존제이자 의약품으로까지 그 쓰임이 넓어지고 있었다. 단기간에 막대한 부를 축적해 자본가의 상징이 된 보레는, 이후 정치에 입문해 뉴올리언스 시장이 되기도 했다. 201p

‘백색의 금’이라 불린 설탕은 한순간에 사람들을 자본가와 권력자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 부와 명예는 수많은 노예들의 땀과 희생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노예들의 고통으로 보레는 뉴올리언스 시장이 되기도 하고 자본가의 상징으로 이름을 남겼다. 노예들의 고통 끝에 그에게 달콤한 부와 명예가 함께 했다. 가슴에 턱, 하고 무거운 바윗돌이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삶이 보레보다는 노예들쪽에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묵묵히 참고 견뎌냈더니 달콤한 백색의 금은 커녕 채찍질이 날아오는, 참고 견딜 것 조차 없었던 이가 달콤한 보상을 얻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비참한 삶.

한편, 미국에서는 목화와 설탕이 기존의 담배나 커피를 제치고 미국 남부의 양대 산업으로 부상하며 초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조면기cotton gin(목화에서 씨앗을 효율적으로 분리하는 기계)'가 발명되어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노동력 수요 또한 급증했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의 노예제 폐지 움직임으로 노예 수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자, 미국은 결국 많은 노예를 밀수입하기에 이른다. 자연히 노예의 가격은 급등했고, 이로 인한 손실을 메우기 위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212p

미국의 흑인노예, 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목화밭이 떠오르는데 설탕 역시 미국 남부의 양대산업으로 많은 노예들을 필요로 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이 구절에서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한껏 찡그리게 됐다. 그들이 얼마나 착취당했을 것이며 얼마나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을 것인가. 살아있는 사람이었던 그들은 얼마나 울어버린 뒤에야 눈물도 메말라버렸을 것인가. 그들의 삶에 즐거운 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오늘날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음악 장르인 재즈, 블루스, 리듬 앤드 블루스, 로큰롤은 모두 목화밭이 있던 미국 남부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자주 즐겨 듣는 이 음악들은 수백 년 전 흑인 노예들의 고통과 맞닿아 있다. 213p

오늘날 전 세계인이 즐기는 재즈와 블루스, 리듬 앤 블루스, 로큰롤. 이 모든 음악이 흑인 노예들의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노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역시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듣고 즐기는 음악조차 사실은 수백 년 전 고통받던 사람들의 목소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고진감래라는 말을 다시금 곱씹어본다. 쓰디쓰게 고생한 이들이 달콤한 즐거움을 누리는 세상이 언젠가는 오고 말까? 요즘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걱정하던데 너무 똑똑해진 아이들은 이미 알아버린 게 아닐까? 그야말로 설탕전쟁이다. 감래하기 위해 열심히 고진하고는 있지만, 이 전쟁에 이길 자신이 없어서 왠지 모르게 쓴 웃음이 난다. 왠지 모르게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노래 한 곡 불러야 할 것 같은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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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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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괜찮았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세상이 장에게 유독 가혹하게 구는 것 같았다.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정말 그랬다. 121p

정말 유감스럽게도 나는 나와 상관없는 것이 동요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어떤 식으로든 내가 감정적으로 동요된다면 그것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장이 느닷없이 납치를 당하고 바지에 똥오줌을 지릴 때에도 나는 멀찍이서 타인의 불행을 관람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신고를 바로 하지 않았다 은근하게 책망하고 탈출하지 못한 것도 문제삼던 경위와 나는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이 문장에 눈길이 가 닿았을 때 나는 장에게 한 걸음 다가가 장의 이야기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도 그랬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선에서부터 나는 괜찮았던 적이 없었고, 세상은 유독 내게 가혹하고 야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타인들은 나와 달랐는지, 타인들도 나처럼 그러한지 알지 못한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애초에 노력하지 않으면 타인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게 외면하면 눈물이 멈추네요."

"맞아요. 울고 싶지 않으면 잘 숨어 있어야죠."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무엇을요?"

"이렇게 계속 살아가요? 말뚝들이 불쑥불쑥 나타나고, 그러면 하염없이 울고?" 188p

적어도 말뚝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데 말뚝들이 등장하고,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눈물을 쏟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러기를 포기했다. 이 소설은 아주 긴 시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아주 긴 꿈과도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뚝들은 사람의 심장에 박힌 대못같은 상처일까? 느닷없이 퍼붓다 멈춰버리는 불행일까? 그런 것도 그냥 멈춰버렸다. 생각하면 울고 싶어졌다. 이유를 모르고 감정을 느낄 때마다 세상은 나를 나무랐고, 대답할 길 없는 감정과 이해받을 수 없는 감정에 대한 슬픔이 진흙탕처럼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래오래 걸려서야 「말뚝들」 을 완독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강처럼 흘러 한자리에 모여든 이유는 울기 위해서였다. 우는 사람은 답답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203p

사람들은 모두들 저마다의 불행을 얼마간 가지고 있다. 누구나의 심장마다 대못같은 상처가 박혀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그에 대해 토로하지 못한다. 우리는 술에 취해 잊혀질 것을 보장받을 때에나 속얘기를 꺼내고, 만취를 핑계로나 겨우 조금 울었다. 말뚝이 내 앞에도 나타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염없이 울고 나면 답답하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예전에 연기를 배울 때 선생님은 내게 이 사람들이 왜 이 말을 하는 지에 대해 생각하라고 했다. 나는 시덥잖은 이유들을 댔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이런 말들을 굳이 왜 할까 생각했었다. 선생님은 이 말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선생님의 가르침은 11년을 지나서야 내게 와 닿았다.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말뚝들 앞에서 사람들도 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울 수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고, 말을 할 수 있다면 답답하지 않다.

함께 울었다. (중략) 해가 저물 때쯤 동상 받침대에 올라서 있던 말뚝들이 무슨 신호나 낌새도 없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 자리가 텅 비워 있던 것처럼. 210p

그렇게 사람들도 동물도 말뚝을 수거하러 온 사람들도 함께 해가 저물 때까지 울고 나서, 처음부터 상처받지 않았던 것처럼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말뚝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직 울기도 전이지만 내 가슴에 박혀있는 대못들 중 한 두 개정도는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주변을 보니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바로 옆 사람은 가슴을 치며 거의 통곡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었다. 열성적으로 우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합심해 가짜 울음을 울다니 믿기지 않았다. 장은 심하게 모욕당한 느낌을 받았다. 말뚝 앞에서 무너지듯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의 마음이 그곳에서 실시간으로 조롱당하는 기분이었다. 222p

그리고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다시 사라졌던 대못이 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프고 답답했다. 가짜 울음을 우는 사람들에게 모욕당한 느낌, 조롱당하는 기분을 느끼는 장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불행의 본질은 이해할 수 없게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가끔은 불행의 본질을 이해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가짜울음소리가 다른 사람의 불행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을 할 때 차라리 울지 않고 무덤덤한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짜로 울음을 울고 가짜로 위로한다면 그것은 그들에 대한 모욕이고 조롱일 뿐이니까. 그렇다고 매번 모두에게 자판기처럼 진짜 울음을 울 수 있을만큼 내가 풍요로운가 하면 또 그렇지가 않다.

그때의 모든 일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아마 영원히 그럴 게 틀림없었다. 장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그에게 빚졌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 빚으로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망해버린다. 301p

최근 「붉은 시대」와 「역사의 쓸모」를 읽으면서 큰 울림이 있었는데 이 구절에서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빚져가며 살아가는 것이다. 「명랑한 이기봉의 투쟁없는 짧은 삶」에서도 그랬듯이 그렇게 빚졌다는 생각으로, 자아를 타자로 삼키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빚졌다고 생각하고 무임승차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망해버리고 말 것이다.

"나는 장석원이야. 장, 석, 원. 너희 아빠 친구야." 301p

말뚝들이 내 앞에 성큼 와 서 있었다. 장이 이름을 드러냈다. 나는 장석원에게, 김홍 작가에게, 「말뚝들」에 빚을 졌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비로소 울 수 있었다.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완독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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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시대 - 독립을 넘어 쇄신을 꿈꾼 식민지 조선 사회주의 유토피아
박노자 지음, 원영수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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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포터 11기 2번째 책 박노자 교수의 「붉은 시대」.


조선의 1920~1930년대는 붉은 시대였다.

세 가지 특수성이 전간기 공산주의적 급진주의를 특징짓는다. 첫째, 이 시기 전후 전 세계의 주류 급진 정당들이 단일한 중앙에서 지시를 받아 움직인 적은 없었다. 22p

둘째, 붉은 시대는 '새로운 유형'으로 나타난 레닌주의 정당의 황금시대였다. 23p

셋째, '새로운 유형'의 붉은 시대 정당은 질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국가, 즉 당-국가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24p

처음 이 논문같은 책, 박노자의 「붉은 시대」를 펼쳐보고 정신이 아득해져왔다. 관심있는 주제가 아니라면 영 읽히지 않는 것은 나 뿐만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사실 힘든 순간이 닥쳐왔을 때 나는 늘 해왔던 패턴을 유지하기보단 깨부수고 반대쪽으로 달려나가는 스타일이다. 지금도 너무 힘들기 때문에 강제로라도 책을 읽고 내가 관심없던 책이라도 무조건 주어지는대로 읽겠다고 하니포터 11기 입학신청을 했던 것이니 각오를 다잡고 책을 읽어나갔다.

그런데 「붉은 시대」를 읽어나갈수록 이 시대 자체가 조선은 너무 암울한 환경이었고,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보려 돌파해보려했던 노력 중 하나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는 붉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감정이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나의 감정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점점 집중해서 책을 읽게 되었다.

세상을 바꾸려 하는 자들에게는 늘 적이 많다. 하물며 그 붉은 시대에 혼란 속에서 급진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이들은 아니었을리 없다.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고, 요절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잃을 것이 사슬밖에 없는 노동자'들이었다. 식민지 시대라는 특수성이 조선의 젊은이들을 투사로 만들었다. 투표권 없이 지배당하며 세금도 내야 했다. 고용은 불안정했고, 임금은 일본인 동료 노동자보다 상당히 낮았다.86p 그야말로 마른 걸레를 쥐어짜도 한 방울 정도는 떨어진다는 말처럼 극악의 착취를 당하고 있었으니 급진주의는 자발적이면서 강력86p할 수 밖에 없었다.

「붉은 시대」에서 언급된 많은 인물 중 가장 인상깊게 느껴졌던 인물은 이재유다. 일본 검찰이 남긴 이재유의 심문기록(1937)에서 알 수 있는 다른 슬로건은 7시간 노동제(1시간의 점심시간과 주 40시간 노동), 기혼 남성 노동자의 최저임금 보장, 동일노동 동일임금, 그리고 산업별 노동조합을 포함한 노동자의 조직화와 행동의 자유 뿐 아니라 심지어 노동자가 생산과정을 통제하는 공장위원회를 조직할 자유와 노동자의 자기방어용 민병대 결성까지 포함했다. 147~148p

이건 너무나 현대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이것이 88년 전의 기록이라니. 게다가 대부분의 요구들은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적이라고 분류할 수 있었다.148p

의무적 수업 출석과 군사화된 병식체조 시간 폐지, 교사 임용 및 해임 절차의 민주화(임용과 해임 위원회에 학생 대표 참석), 기숙사에서 군대식 규율의 자유화, 기숙생 식사 개선, 그리고 명백하게 아주 중요한 내용인 학생에 대한 교사의 "지배, 억압, 학대, 관료적 언어" 의 사용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학교는 외부 교육 관료들의 관료적 미시 통제로부터 해방되어야 했고, 내부적으로는 "암기 위주의 교육 방법"에서 벗어나야 했다. 148p

이쯤되니 나는 이재유가 타임머신을 타고 2025년으로 올 수 있다면 현재 세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 것인지, 또 이자신이 꿈꾸던 것들이 대부분 이루어진 이 세상이 과연 그가 꿈꾸던 것 같이 좋아보일 지 궁금해졌다.

어찌보면 빈곤과 착취, 계급(일본인,친일파와)의 차이로 인해 급진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을 하게 된 것이었던 붉은 시대가 왜 지금 2025년과 그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20대에 마르크스에 빠지지 않았다면 바보이고, 40대에 이르러서도 마르크스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그 또한 바보라는 말이 있다. 100년 전 조선과 100년 후 대한민국은 다르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사실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20대들은 마르크스에 빠지기보다는 손가락으로 숏츠를 스와이핑하다가 김정은을 ai로 우스꽝스럽게 합성한 영상이 나오면 무심히 다른 영상으로 넘어가기 위해 또 다시 손가락으로 화면을 스와이핑할 것이니까.

그러나 어쩌면, 한편으로는, 우리는 100년 전 그들보다 퇴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계와 소통하려는 노력, 현재를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도 마르크스와 함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는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먼저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그들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패턴을 파악하고, 그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새로운 방법을 개척해보기 위함이라 배웠다.

100년전 사회주의자들이 꿈꿨던 것 역시 우리들이 꿈꾸는 것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람이 꿈꾸는 것은 희망이다.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

왜 이 논문같은 책을 읽고 마음이 아픈것일까.

우리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이란 말을 너무나 쉽게 한다. 하지만 그들이 피흘리며 핍박받으며 이뤄냈기에 이 시대를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다.

100년 전 「붉은 시대」 속 인물들에게 빚을 지고 살고 있었음을 몰랐던 것이 미안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나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아파하며 살고 있음이 후세의 사람들에게 미안한 것일까.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독자에게도 붉은 시대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듯, 피로 쓴 것 같은 책, 「붉은 시대」였다.


일본 검찰이 남긴 이재유의 심문기록(1937)에서 알 수 있는 다른 슬로건은 7시간 노동제(1시간의 점심시간과 주 40시간 노동), 기혼 남성 노동자의 최저임금 보장, 동일노동 동일임금, 그리고 산업별 노동조합을 포함한 노동자의 조직화와 행동의 자유 뿐 아니라 심지어 노동자가 생산과정을 통제하는 공장위원회를 조직할 자유와 노동자의 자기방어용 민병대 결성까지 포함했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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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내가 원한 것
서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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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포터 11기 입학 후 처음 받게 된 책, 「여름에 내가 원한 것」


프롤로그에서 서한나 작가는 분명하게 「여름에 내가 원한 것」 이 어떤 책인지를 밝혔다. 다만 내가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뜨거운 여름 한낮에 어울리는 끈적한 재즈를 들으며 책을 펼쳤다. 내게는 전혀 새로운 전개에 머릿속에 물음표를 계속해서 늘려가며 중간쯤 읽었고, 56p에서 내가 좋아하는 건 여름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서사다. 라는 문장을 만나고 나서야 다시 프롤로그를 읽었다.


아하! 프롤로그는 정말 예고였던 것이다. 서한나 작가가 손모가지를 걸고 쓰고자 하는 피 맛나는 이야기들에 대한.


태생을 그런 것에 어울리지 않게 태어났는지, 나는 소녀시절부터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이야기가 영 재미가 없었다. 그러니 「여름에 내가 원한 것」이라는 제목에 내가 원한 것과는 다른 사랑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펼쳐지니 당혹스러울 수 밖에.

아마 내가 계속해서 책장을 넘길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름이라는 계절과 끈적한 재즈 때문일 것이다. 끈적한 재즈와 여름 날씨, 매미소리가 이 책을 읽는 중에 자꾸만 나 역시 서한나 작가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이야기들을 상상해보라고 부추겼다. 예를 들면 뭐 이런 식의 이야기다.


눈을 감고 에어컨이 고장난 뜨거운 여름 오후를 상상해보자.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쏟아진다. 당신은 벌써 오늘 세 번째 몸에 물을 끼얹고 나와 선풍기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간 시원한 기분이 든다. 집 전화기가 울려 슬쩍 골이난다(핸드폰이 없는 시절이다). 쯧, 하고 혀를 차고 일어나 전화를 받는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다. 당신은 너무 놀라서 전화를 확 끊는다. 그리고는 이내 애꿎은 머리카락을 벅벅 흐트려놓는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어서 전화기 버튼을 누르는 손이 떨린다. 애써 힘을 주어 전화버튼을 누르면 그 사람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아 그 사람은 방금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놀러 나갔다고 전한다. 당신은 선풍기 앞으로 돌아와 바닥에 누워버린다. 그러나 이내 다시 벌떡 일어나 옷을 입고 밖으로 달려나간다. 어딘가의 골목에서 그 사람과 우연히 마주칠 지 모르니까.

또 책을 읽으면서 나는 통통 튀는 성격과 밝고 명랑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그녀는 N의 화신같이 넘치는 상상력으로 주변을 즐겁게 한다. 만약에 이렇다면 어떨까? 만약에 저렇다면 어떨까? 주변에 현실적이고 건조한 지인들이 많기에 잠시 넣어두었던 나의 상상력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밖으로 마구 뛰쳐나오곤 한다.


오늘 아침, 그녀에게 이 책을 추천했다. 네가 쓴 것 같은 책이었어. 그녀는 아직 이 책을 읽기 전이라 이게 얼마나 큰 찬사인 지 알지 못할테지만, 내향적인 나의 칭찬은 늘 이런식이다.


그러나 「여름에 내가 원한 것」 을 읽으며 나는 또 한편으로는 몸서리쳐지는 쓸쓸함을 느꼈다. 서한나 작가의 통통튀는 문장들 사이 어딘가에 있는 그것이 양희은의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떠오르게 했다.


여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으로 보이지만 나는 이 책에서 가을을 느꼈다. 왜냐면 「여름에 내가 원한 것」 1부 연인들에 가득 들어차 있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그리움을 완성해주는 것은 내가 그에서 멀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다. 218p


치열하게 울던 매미들이 땅에 떨어져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지나쳐 지나가는 계절, 눈부신 초록이 가시고 나뭇잎이 말라 떨어지는 계절, 눈 밑에 녹록지 않은 삶의 그늘이 드리워진 어느 누군가가 여름을 회상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서한나 작가에게 조금 치사하다는 기분과, 억울함을 동시에 느꼈다. 추천사에서 고선경 시인이 쓴 것처럼 가슴 떨리는 사랑의 속삭임이 은어 떼처럼 귀를 간지럽혀도 내 삶은 드라마틱 할 리 없지만...서한나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모두 듣고 나니 이제 내가 사랑한 여름의 장소마다 그가 서 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2부 감각들과 3부 장소들로 넘어가면 더더욱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여상한 얼굴로 위스키를 넘기며 툭, 내뱉는 것 같은 문장들인데 그게 정말 나를 어지럽게 한다. 서한나 작가의 문장들은 연애고수의 밀당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의 문장들은 못되고 예쁜 애처럼 독자를 바꿔가며 자신의 인력을 실험하는 중이다.


1부 연인들에서도 여름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모든 풍경들을 묘사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굴더니 2부와 3부로 넘어가면 이제는 여름을 샅샅이 핥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다 종내에는 그녀의 여름은 살아있음 그 자체라는 것이 점차 드러나면서 어쩌면 이 책은 여름이 아니라 살아있음과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게 된다.


서한나 작가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생명력 가득한 순간, 열망하고 욕망하여 감각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악착같이 썼다. 피맛 나는 책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나는 알 것 같다. 그 모든 것들은 여름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언젠가 여름이 지나가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쓸쓸함은 우리의 숙명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단맛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단맛을 만들어내는 쪽도 좋다.153P 고 말하며 설탕에 시간을 더하고 가두고, 허무하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에 「여름에 내가 원한 것」 이라는 사건을 만들어 냈다.


마지막 장을 덮고 여운이 길었다. 밤을 지새며 실컷 웃고 떠들었는데 문득 친구의 눈에 얼핏 스쳐가는 쓸쓸한 허무를 본 것만 같았다.


그렇다.

무언가를 향한 안달복달과 그 후에 오는 소강상태는 아무렴 이 계절의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건 여름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서사다. - P56

단맛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단맛을 만들어내는 쪽도 좋다. 설탕에 시간을 더하고 가두기. 허무하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에 사건을 만들어내기. - P153

그리움을 완성해주는 것은 내가 그에서 멀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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