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1920~1930년대는 붉은 시대였다.
세 가지 특수성이 전간기 공산주의적 급진주의를 특징짓는다. 첫째, 이 시기 전후 전 세계의 주류 급진 정당들이 단일한 중앙에서 지시를 받아 움직인 적은 없었다. 22p
둘째, 붉은 시대는 '새로운 유형'으로 나타난 레닌주의 정당의 황금시대였다. 23p
셋째, '새로운 유형'의 붉은 시대 정당은 질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국가, 즉 당-국가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24p
처음 이 논문같은 책, 박노자의 「붉은 시대」를 펼쳐보고 정신이 아득해져왔다. 관심있는 주제가 아니라면 영 읽히지 않는 것은 나 뿐만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사실 힘든 순간이 닥쳐왔을 때 나는 늘 해왔던 패턴을 유지하기보단 깨부수고 반대쪽으로 달려나가는 스타일이다. 지금도 너무 힘들기 때문에 강제로라도 책을 읽고 내가 관심없던 책이라도 무조건 주어지는대로 읽겠다고 하니포터 11기 입학신청을 했던 것이니 각오를 다잡고 책을 읽어나갔다.
그런데 「붉은 시대」를 읽어나갈수록 이 시대 자체가 조선은 너무 암울한 환경이었고,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보려 돌파해보려했던 노력 중 하나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는 붉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감정이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나의 감정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점점 집중해서 책을 읽게 되었다.
세상을 바꾸려 하는 자들에게는 늘 적이 많다. 하물며 그 붉은 시대에 혼란 속에서 급진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이들은 아니었을리 없다.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고, 요절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잃을 것이 사슬밖에 없는 노동자'들이었다. 식민지 시대라는 특수성이 조선의 젊은이들을 투사로 만들었다. 투표권 없이 지배당하며 세금도 내야 했다. 고용은 불안정했고, 임금은 일본인 동료 노동자보다 상당히 낮았다.86p 그야말로 마른 걸레를 쥐어짜도 한 방울 정도는 떨어진다는 말처럼 극악의 착취를 당하고 있었으니 급진주의는 자발적이면서 강력86p할 수 밖에 없었다.
「붉은 시대」에서 언급된 많은 인물 중 가장 인상깊게 느껴졌던 인물은 이재유다. 일본 검찰이 남긴 이재유의 심문기록(1937)에서 알 수 있는 다른 슬로건은 7시간 노동제(1시간의 점심시간과 주 40시간 노동), 기혼 남성 노동자의 최저임금 보장, 동일노동 동일임금, 그리고 산업별 노동조합을 포함한 노동자의 조직화와 행동의 자유 뿐 아니라 심지어 노동자가 생산과정을 통제하는 공장위원회를 조직할 자유와 노동자의 자기방어용 민병대 결성까지 포함했다. 147~148p
이건 너무나 현대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이것이 88년 전의 기록이라니. 게다가 대부분의 요구들은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적이라고 분류할 수 있었다.148p
의무적 수업 출석과 군사화된 병식체조 시간 폐지, 교사 임용 및 해임 절차의 민주화(임용과 해임 위원회에 학생 대표 참석), 기숙사에서 군대식 규율의 자유화, 기숙생 식사 개선, 그리고 명백하게 아주 중요한 내용인 학생에 대한 교사의 "지배, 억압, 학대, 관료적 언어" 의 사용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학교는 외부 교육 관료들의 관료적 미시 통제로부터 해방되어야 했고, 내부적으로는 "암기 위주의 교육 방법"에서 벗어나야 했다. 148p
이쯤되니 나는 이재유가 타임머신을 타고 2025년으로 올 수 있다면 현재 세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 것인지, 또 이자신이 꿈꾸던 것들이 대부분 이루어진 이 세상이 과연 그가 꿈꾸던 것 같이 좋아보일 지 궁금해졌다.
어찌보면 빈곤과 착취, 계급(일본인,친일파와)의 차이로 인해 급진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을 하게 된 것이었던 붉은 시대가 왜 지금 2025년과 그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20대에 마르크스에 빠지지 않았다면 바보이고, 40대에 이르러서도 마르크스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그 또한 바보라는 말이 있다. 100년 전 조선과 100년 후 대한민국은 다르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사실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20대들은 마르크스에 빠지기보다는 손가락으로 숏츠를 스와이핑하다가 김정은을 ai로 우스꽝스럽게 합성한 영상이 나오면 무심히 다른 영상으로 넘어가기 위해 또 다시 손가락으로 화면을 스와이핑할 것이니까.
그러나 어쩌면, 한편으로는, 우리는 100년 전 그들보다 퇴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계와 소통하려는 노력, 현재를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도 마르크스와 함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는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먼저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그들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패턴을 파악하고, 그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새로운 방법을 개척해보기 위함이라 배웠다.
100년전 사회주의자들이 꿈꿨던 것 역시 우리들이 꿈꾸는 것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람이 꿈꾸는 것은 희망이다.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
왜 이 논문같은 책을 읽고 마음이 아픈것일까.
우리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이란 말을 너무나 쉽게 한다. 하지만 그들이 피흘리며 핍박받으며 이뤄냈기에 이 시대를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다.
100년 전 「붉은 시대」 속 인물들에게 빚을 지고 살고 있었음을 몰랐던 것이 미안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나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아파하며 살고 있음이 후세의 사람들에게 미안한 것일까.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독자에게도 붉은 시대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듯, 피로 쓴 것 같은 책, 「붉은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