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내가 원한 것
서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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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포터 11기 입학 후 처음 받게 된 책, 「여름에 내가 원한 것」


프롤로그에서 서한나 작가는 분명하게 「여름에 내가 원한 것」 이 어떤 책인지를 밝혔다. 다만 내가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뜨거운 여름 한낮에 어울리는 끈적한 재즈를 들으며 책을 펼쳤다. 내게는 전혀 새로운 전개에 머릿속에 물음표를 계속해서 늘려가며 중간쯤 읽었고, 56p에서 내가 좋아하는 건 여름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서사다. 라는 문장을 만나고 나서야 다시 프롤로그를 읽었다.


아하! 프롤로그는 정말 예고였던 것이다. 서한나 작가가 손모가지를 걸고 쓰고자 하는 피 맛나는 이야기들에 대한.


태생을 그런 것에 어울리지 않게 태어났는지, 나는 소녀시절부터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이야기가 영 재미가 없었다. 그러니 「여름에 내가 원한 것」이라는 제목에 내가 원한 것과는 다른 사랑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펼쳐지니 당혹스러울 수 밖에.

아마 내가 계속해서 책장을 넘길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름이라는 계절과 끈적한 재즈 때문일 것이다. 끈적한 재즈와 여름 날씨, 매미소리가 이 책을 읽는 중에 자꾸만 나 역시 서한나 작가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이야기들을 상상해보라고 부추겼다. 예를 들면 뭐 이런 식의 이야기다.


눈을 감고 에어컨이 고장난 뜨거운 여름 오후를 상상해보자.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쏟아진다. 당신은 벌써 오늘 세 번째 몸에 물을 끼얹고 나와 선풍기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간 시원한 기분이 든다. 집 전화기가 울려 슬쩍 골이난다(핸드폰이 없는 시절이다). 쯧, 하고 혀를 차고 일어나 전화를 받는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다. 당신은 너무 놀라서 전화를 확 끊는다. 그리고는 이내 애꿎은 머리카락을 벅벅 흐트려놓는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어서 전화기 버튼을 누르는 손이 떨린다. 애써 힘을 주어 전화버튼을 누르면 그 사람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아 그 사람은 방금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놀러 나갔다고 전한다. 당신은 선풍기 앞으로 돌아와 바닥에 누워버린다. 그러나 이내 다시 벌떡 일어나 옷을 입고 밖으로 달려나간다. 어딘가의 골목에서 그 사람과 우연히 마주칠 지 모르니까.

또 책을 읽으면서 나는 통통 튀는 성격과 밝고 명랑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그녀는 N의 화신같이 넘치는 상상력으로 주변을 즐겁게 한다. 만약에 이렇다면 어떨까? 만약에 저렇다면 어떨까? 주변에 현실적이고 건조한 지인들이 많기에 잠시 넣어두었던 나의 상상력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밖으로 마구 뛰쳐나오곤 한다.


오늘 아침, 그녀에게 이 책을 추천했다. 네가 쓴 것 같은 책이었어. 그녀는 아직 이 책을 읽기 전이라 이게 얼마나 큰 찬사인 지 알지 못할테지만, 내향적인 나의 칭찬은 늘 이런식이다.


그러나 「여름에 내가 원한 것」 을 읽으며 나는 또 한편으로는 몸서리쳐지는 쓸쓸함을 느꼈다. 서한나 작가의 통통튀는 문장들 사이 어딘가에 있는 그것이 양희은의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떠오르게 했다.


여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으로 보이지만 나는 이 책에서 가을을 느꼈다. 왜냐면 「여름에 내가 원한 것」 1부 연인들에 가득 들어차 있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그리움을 완성해주는 것은 내가 그에서 멀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다. 218p


치열하게 울던 매미들이 땅에 떨어져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지나쳐 지나가는 계절, 눈부신 초록이 가시고 나뭇잎이 말라 떨어지는 계절, 눈 밑에 녹록지 않은 삶의 그늘이 드리워진 어느 누군가가 여름을 회상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서한나 작가에게 조금 치사하다는 기분과, 억울함을 동시에 느꼈다. 추천사에서 고선경 시인이 쓴 것처럼 가슴 떨리는 사랑의 속삭임이 은어 떼처럼 귀를 간지럽혀도 내 삶은 드라마틱 할 리 없지만...서한나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모두 듣고 나니 이제 내가 사랑한 여름의 장소마다 그가 서 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2부 감각들과 3부 장소들로 넘어가면 더더욱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여상한 얼굴로 위스키를 넘기며 툭, 내뱉는 것 같은 문장들인데 그게 정말 나를 어지럽게 한다. 서한나 작가의 문장들은 연애고수의 밀당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의 문장들은 못되고 예쁜 애처럼 독자를 바꿔가며 자신의 인력을 실험하는 중이다.


1부 연인들에서도 여름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모든 풍경들을 묘사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굴더니 2부와 3부로 넘어가면 이제는 여름을 샅샅이 핥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다 종내에는 그녀의 여름은 살아있음 그 자체라는 것이 점차 드러나면서 어쩌면 이 책은 여름이 아니라 살아있음과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게 된다.


서한나 작가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생명력 가득한 순간, 열망하고 욕망하여 감각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악착같이 썼다. 피맛 나는 책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나는 알 것 같다. 그 모든 것들은 여름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언젠가 여름이 지나가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쓸쓸함은 우리의 숙명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단맛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단맛을 만들어내는 쪽도 좋다.153P 고 말하며 설탕에 시간을 더하고 가두고, 허무하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에 「여름에 내가 원한 것」 이라는 사건을 만들어 냈다.


마지막 장을 덮고 여운이 길었다. 밤을 지새며 실컷 웃고 떠들었는데 문득 친구의 눈에 얼핏 스쳐가는 쓸쓸한 허무를 본 것만 같았다.


그렇다.

무언가를 향한 안달복달과 그 후에 오는 소강상태는 아무렴 이 계절의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건 여름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서사다. - P56

단맛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단맛을 만들어내는 쪽도 좋다. 설탕에 시간을 더하고 가두기. 허무하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에 사건을 만들어내기. - P153

그리움을 완성해주는 것은 내가 그에서 멀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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