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K-포엣poet으로 만나게 되어 기뻤던 아시아ASIA의 <안도현 시선>.얇은 두께와 핸디한 사이즈로 가방에 넣어 다니며 펼쳐보기 좋은 시집이다. 오랜만에 따스한 볕 아래서 안도현 시인의 서정적인 시를 읽는 즐거움을 누린 어느 가을날의 조각을 꺼내 본다.
아시아는 이미 계간 문예지로 만난 적이 있어 이번 시선집이 더 반갑고 궁금했다. 2017년 여름호로 만난 계간 아시아는 기존 문예지와 차별화된 감각적인 디자인에 영자 번역문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는 점, 풍성하고 흥미로운 읽을거리와 쉽게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아시아 작가들의 작품까지 함께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과 <K-픽션>에 이은 시선집 <K-포엣> 시리즈의 기획 역시 아름다운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한 걸음 앞당기는 의미 있고 고마운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도현 시선 외 고은, 백석, 허수경, 김소월, 이육사, 정지용, 윤동주, 이상, 김용택, 도종환, 박소란 시선 등 수십 권이 시리즈로 기획되었다. 시집 부심을 지닌 동지들이라면 책장에 채우고 한 권씩 꺼내 보는 즐거움도 클 것이다. <안도현 시선>은 안선재 교수가 번역을 맡았는데 고은 시인의 시를 비롯해 국내 시와 소설을 다수 번역하신 분이어서 그런지 번역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가슴에 와닿았다. 사실 어느 작품이든 번역의 완벽함에 대해선 기대 반, 우려 반이다. 오래전 읽었던 어느 시집은 국내 시인이 엮어서였는지 직역과 함께 필요에 따라 의역이 잘 되었던 느낌이었는데, 국내에서 출판되고 있는 대부분의 번역된 외국 시는 박진영이 오디션 참가자에 했던 말 중 '노래 부르는 기계'에 비유할 만큼 감정이 전혀 녹아들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았다. 의역도 직역도 아니고 시도 산문도 아닌 글자의 나열을 보며 종종 가슴이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고의적인 띄어쓰기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시인들인 만큼 칼질로 여길 수 있는 의역에 민감할 수도 있겠지만 독자에게 아무런 감동을 전하지 못 하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개인적으로 시인들도 영어 공부를 해서 직접 영문시를 쓰고, 해외의 시들을 번역해 들여오는 일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산문을 주로 다루는 번역가들은 녹여낼 수 없는 시인만의 감성의 영역이 있기에, 다른 문학은 몰라도 시는 시인이 번역해주었으면 하는 오래된 바람이 있다. 번역본을 읽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다면 해외 독자들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한강 작가의 선전을 지켜보며 번역의 중요성을 다 같이 실감하기도 했지 않은가. 요즘 신춘문예 당선 시집을 보면 파격을 넘어 난해한 시들이 보여 거슬릴 때가 종종 있다. 시적인 미는 전혀 없이 불필요한 기교에 젖거나, 자신만의 세계에 너무 깊이 빠져 타인은 들을 수 없는 옹알이를 하는 시들 말이다. 한편 개인 출판의 활성화로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책을 출간하는 시대가 되면서 SNS에는 굳이 힘들게 등단하려 애쓰지 않는 어린 작가와 시인이 난무하고 더불어 시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잡문과 단순한 감정 배설에 불과한 수많은 글들이 시詩라는 이름으로 쉽게 생산되고 있다. 시대에 맞추어 시도 변화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백 번 동감하나 문학으로서 지켜져야 할 부분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가 쉽게 쓰이는 일이 부끄럽다던 윤동주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 숙이게 되는 요즘이다. 말장난 같은 짧은 글짓기로 SNS에서 관심을 받고 자칭 장사꾼에 어울리는 별명을 쓰며 시를 팔아 돈을 벌고 방송에 나와 몸으로 뛰는 예능을 하고 있는 어떤 분을 보면서 혼자 화가 치밀기도 했다. 덕분에 시를 문학이 아닌 돈벌이로 여기는 분위기가 높아졌다. 너도 나도 책을 내고 작가가, 시인이, 작품을 구상하며 피를 토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뚝딱 찍어낸 일기장을 들고 장터에 나가 호객행위를 하고, 돈을 흥정하고, 책을 팔며 SNS에 홍보한다. 이것이 우리 문학의 앞날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열변이 길었나 생각해보니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 때문이었다. 모두 열거하기 어렵지만 하나같이 '시정신'을 지켜내고 있는 시인들이다. 그들의 연륜이 묻어난 예스러운 시도, 현대적인 감각을 담아낸 시도 좋아한다. 나이 지긋한 시인도 좋아하고 젊은 시인과 작가도 좋아한다. 고통을 피로 토해낸 시도, 따스하고 잔잔한 시도, 울컥울컥 차갑고 쓸쓸한 시도 좋아한다. 일상의 작은 사건이나 관찰에서 비롯된 시들도 좋아하는데 안도현 시인의 시도 여기에 해당한다. 사실 모든 시가 그럴 것이다. 시인의 경험과 분리된 시가 어디 있으랴. 그중에서도 안도현 시인은 여린 것들의 눈으로 세상을 읽는 힘을 지녔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꿈틀거리다가 더 낮게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어찌할 수 없어서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한때의 어스름을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저녁이야불 끄고 잘 시간이야 』 -스며드는 것- 중에서
이 시를 읽고 더 이상 간장 게장을 먹을 수 없게 된 이도 있다던가. 꽃게를 맛있게 먹는 사람이 아니라 뱃속에 알을 품고 있는 어미 꽃게의 심정을, 울컥 쏟아지는 간장에 새끼가 다칠까 끌어안으며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다독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그린 시에서 작고 낮은 것들 편에 선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나무와 나무가 모여어깨와 어깨를 대고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나무와 나무 사이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생각하지 못했다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나무와 나무 사이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울울창창鬱鬱蒼蒼숲을 이룬다는 것을산불이 휩쓸고 지나간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간격- 중에서나무와 나무의 간격으로 비로소 유지되는 숲의 알레고리를 통해 사람의 관계를 표현한 시로 역시 가슴에 와닿는다. 산불의 현장에서 깨닫고 후회했던 일련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나방이 왔다 풍뎅이가 왔다 매미가 왔다형광등 불빛 따라와서 모기장 바깥에 붙어 있다오지 말라고 모기장을 쳐 놓으니까 젠장, 아주 가까이 와서나를 내려다보며 읽고 있다영락없이 모기장 동물원에 갇힌나는 한 마리의 슬픈 포유류책을 덮고 생각 중이다저 곤충 손님들에게는 내가모기장 안쪽에 있는가바깥쪽에 있는가』-모기장 동물원- 중에서사물과 현상을 '낯설게 하기'에 충실한 시가 아닐까. 이런 시상이 떠오르기까지 모기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눈씨름 했을 장면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면서도 씁쓸해진다. 주로 여류 시인과 작가들을 좋아하지만 이런 잔잔한 감수성을 녹여내는 남성 시인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이문재 시인과 안도현 시인을 좋아한다. 시로 인해 매일의 삶이 좀 더 의미 있고 깊이 있어진다면 내 행복의 총량도 늘어나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아름다운 우리 시 한 페이지와 함께 따스한 하루 이어가시기를 빌어봅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