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 왜 고양이들은 학살을 당해야만 했는가?
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책의 목적과 방법론에 대하여

    단턴의  이 책의  목적은 "18세기 프랑스의 사고방식"을 기술하는데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즉 어떻게 세계를 해석했고 세계에 의미를 부과했으며 감정을 불어넣었는가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15) 단턴은 프랑스 계몽주의 시기의 역사를 다루는 역사학자로서 주로 위로부터의 엘리트주의적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역사, 즉 민중의 삶을 다루는 역사를 다룬다. 구체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이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는 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의 파편을 한 데로 모으고 있다. 농민들의 민담, 한 파리 인쇄소에서 벌어졌던 고양이 죽이기 대소동, 몽펠리에 주민의 도시 설명서, 경찰 수사관의 조서, <백과전서>의 서문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단턴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그리고 그를 통해 하층민들의 삶으로부터 파생되는 '의미구조'로서의 문화가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분석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의미구조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문화'는 상류계급으로의 계급적 편향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층 계급의 자기 정당화의 기제로서 다시 정의된다.

     단턴의 이러한 방법론적 전략은 기존의 역사서술의 방법론(Methodology)에 큰 혁명과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일대의 전환적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도 같았다. 이른바 '역사 인류학'적 방법론이라고 지칭되는 새로운 역사 방법론에 입각한 글쓰기가 이 책에서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단층을 분절하여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구조의 결을 인류학적 방법론을 통해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그를 통해 민중들의 삶과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이것은 실증주의적이고 사실주의적 역사해석 방법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단편적인 것들의 층위에서 의미가 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해석하는 것이며 결코 전체적인 것에 경도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서 강요되는 '대표성'도 주장하지않는다. 단턴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의미해석'의 다양성과 개방으로서의 역사해석의 가능성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우리는 기존 역사자료에 대한 무한한 의미해석의 개방성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시기를 살아간 역사적 주체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해석과 의미부여의 방식을 다시 읽어내려갈 수 있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인쇄공들은 왜 고양이를 죽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참고로 이 리뷰에서는 이 책의 1장, 2장, 5장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내가 최총의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고 나의 해석이 완벽한 것이라고 자처하지도 않는다. 이 책은 구체제의 모든 사회 집단과 지리적 지역에 걸친 사상과 재고조사표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이 책은 전형적인 사례연구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전형적인 농민'이나 '대표적인 부르주아'같은 것이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18)

 2. 고양이는 왜 학살을 당해야만 했을까?

   이 책의  1장은 <마더 구스 이야기>를 통해 농부들 사이에 오고 갔던 민담이라는 하나의 장르에 담긴 의미가  통시적, 공시적 과정을 통해 어떻게 다르게 변환되어 가는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먼저 단턴은 <빨강모자 소녀>에 대한 에릭 프롬과 베텔하임의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인용한다. 그 핵심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 자체가 역사성이 없는 무의식의 무역사성을 보편적 구조로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단턴은 민담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역사적 변동과정을 거쳐서 의미구조가 변동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을 통해 다시 역사주의로 되돌아온다.(29) 

 

   다시,  역사주의적 문제의식을 견지한 채로 돌아와 역사인류학적 방법론을 통해서 살펴본 18세기까지의 민담에 대한 구체적 분석의 결과는 <신데렐라>, <빨강 모자 소녀>, <엄지 소년> 등의 민담의 일반적 윤곽을 상정하기에 충분한 판본의 잔존이다. 이 민담은 일반적 주제, 문체 및 어조, 특징 등의 공통적인 요소들에 의해 하나의 의미구조 혹은 의미의 망(網)속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36) 여기서 단턴은 구전 문학 연구의 특이한 성과들을 끌어들여 이를 민담 연구에 다시 적용시킨다. 그 핵심적 내용은 바로 낡은 텍스트의 주제가 그것을 다시 새롭게 구성하는 창조자에 의해서 새롭게 된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전체적 윤곽을 흩트려 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세부적 내용들을 다양한 방향으로 변주시키는 독특한 전략이다. 하지만 민담 속에 담긴 민중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경험한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 의미, 공통의 근거는 그대로 담겨져 있다.

   위에서 제시된 몇 가지 종류의 민담에 관한 체계적 분석(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을 통해 단턴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즉 "여러 민담들은 동일한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각 국가에서의 다른 전통 속의 판본들은 완전히 다른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77) 우리식으로 이야기한다면 각 국가의 민중들은 각 이야기들에 대해 부여하는 특징적 의미들을 다르게 지니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그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차이를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적 세계 인식의 차이는 프랑스인들에게 프랑스적인 것 혹은 프랑스성이라는 개념을 부여하게끔 한다.(97) 이것은 프랑스의 민중 문화의 양식을 대변하는 언어적 특질의 집합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독특한 그들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구체제의 사회 속에 만연했던 사회적 계급과 지역적 특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특수하게 프랑스적인 속성, 가치, 태도, 그리고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을 소통시켰던 것이다."(100)

  제 2장은 생-세브랑 가의 인쇄공들이 벌인 무자비한 고양이 대학살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왜 노동자들(인쇄공들)은 고양이를 죽여야만 했었는가? 우리들의 시선으로 보면 인쇄직공들이 부르주아지들의 '고양이'를 상징화시킨 뒤 죽인 그 '행위'가 혐오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18세기에 일어났던 이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 뒤에 숨겨진 의미들의 층위들은 우리에게 그 당시노동자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이것이 '고양이 대학살'에 대해서 단턴이 주목하고 있는 지점이자, 방법이다.  그리고 그는 그 사건에 나타난 '상징'과 '의미', 그리고 '사건'의 제 관계를 규명한다. 

    노동자들로서의 인쇄공들은 '고양이'에 하나의 상징을 부여한다. 왜 고양이인가? 그들이 고양이에게 상징을 부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것이 하나의 증오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를 증오하는 노동자들로서의 인쇄공들은 그 고양이에 상징을 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부르주아의 애정의 대상물로서 널리 보급된 동물이었으며, 노동자들은 그것만도 못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18세기 인쇄공들은 부르주아지들과의 주-종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17세기와 18세기의 역사적 간극에서 인쇄공들이 처한 경제적 위치는 매우 불안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정부의 지원을 받던 대규모의 인쇄소들이 대부분 몰락하고 독점-지배의 체제가 형성되자, 인쇄공들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너무도 불안전한 것으로 된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스위스의 인쇄소의 위치는 직인과 주인들, 그리고 인쇄공들의 평화로운 공존으로 충만했던 인쇄술이 처음 발명되었던 이상향의 시기의 풍경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고양이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단순히 그 동물이 부르주아지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과 분노를 표상했기 때문은 아니다. 달리 말한다면 고양이가 대학살을 당하게 된 이유는 근대초 노동관계에 대한 고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단턴은 여기에 또 다른 원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양이가 사육제(카니발)에서 중요한 의식/의례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샤리바리라는 사육제의 기간은 기존의 금욕적 사회관계가 전도되는 것이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기간이다. 이 기간에서 고양이는 민중들의 억압적 삶의 욕구들이 구체적으로 분출되는 것에 필요했던 하나의 희생물이였던 것이다. 이른바 18세기 전 유럽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잔인성의 예식의 희생물로서의 고양이는 나름의 상징과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단턴은 그것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한다.(135~138) 1) 고양이는 마법성을 지닌 동물이다. 2) 고양이는 주술적인 힘을 지녔다. 3) 고양이는 인간의 은밀한 부분으로서의 성(性)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단턴이 보기에 고양이를 죽이는 학살의식은 노동자들의 문화적 상징과 의미의 체계 속에 깊은 내적 연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적 주제를 가지고 유희를 즐기는 하나의 방식이며 경험을 의미화하는 방식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 의식과 상징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연출하며 재연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 의미적 연출극으로 다시 탄생하게 되어 노동자 계급의 문화적 정체성 형성의 메커니즘으로 전환된다. 여기서 단턴이 중요하게 지적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19세기 이전, 즉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앙 레짐시기까지의 노동자들의 저항은 계급적 성격보다는 직업적 성격이 보다 강했으며 그것은 실제적 차원의 저항보다는 상징적 차원의 저항이 강했다는 것이다.(148)

      제 5장에서는 18세기 계몽주의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던 백과전서주의를 대표하는 저서라고 할 수 있는 <백과전서>를 분석한다.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백과전서를 "인간 지식의 질서나 연쇄에 대한 체계적 설명"이라고 지적한다.(275) 여기서 '지식의 나무'라는 매우 중요한 메타포가 등장한다. 이 메타포는 지식의 가지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유기적 전체로 자라날 수 있다는 관념을 나타내고 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백과전서>를 기술하는 방법과 유형은 '베이컨'의 그것에서 차용되어 왔으나 그것의 강조점을 서로 다른 곳에 놓이게 된다. 이 <백과전서>에서 가장 특이할 만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설정학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이다. 그들은 "종교를 철학에 종속시킴으로써 그것을 효과적으로 탈기독교화시킨다."(284)이는 종교에 대한 학문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을 이성적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하게 복속시켰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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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턴은 또한 달랑베르의 <예비적 논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예비적 논고>의 마지막에서 달랑베르느는 자신의 동료 계몽 사상가들을 문인 중의 극치, 뉴턴과 로크의 후예라고 찬양함으로써 이러한 의미의 변천에 기여하였다. <백과전서> 전체는 그 표지에 '문인 사회'의 저작이라고 언명하였던 한편 그의 동료와 적 모두가 <백과전서>와 계몽 사상을 동일시하였다. 이것은 문명=문인=게몽 사상'이라는 등식을 구현하려던 것처럼 보이며 역사의 모든 진보적 조류를 계몽 사상의 무리에 흡수시키려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예비 논고>의 역사적 논리는 인식론적, 형태론적 논리로 수행된 저작을 완성시켰다. 이것은 계몽 사상가들을 문인과 동일시하고 문인을 역사의 동인으로 제시함으로써 계몽 사상가들을 정당화시켰다."(295~296)

    결론적으로 본다면 백과전서파들은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자신의 계몽사상을 하나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체계로 구성하려 했던 욕망을 구축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이용하여 그것이 권력과 동일한 것으로 등치될 수 있었던 것을 인지한 백과전서파들은 그를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하나의 인식적 지도 그리기의 일환으로 <백과전서>를 기술한 것이다. 이것은 백과전서파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경험, 그리고 의미 부여의 하나의 방식이자 그를 통해 세계를 다시 구성할 수 있으리라는 욕망의 표현이다.

 3. 새로운 역사 서술의 방법론적 정초를 위하여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은 결국 역사가의 새로운 역사서술의 방법을 정초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단턴의 역사 서술 방법은 기왕의 그것과는 너무도 다른 '단절'을 형성하기에 충분하다. 단턴의 이 책은 전체사에 편중된 역사서술, 실증적인 것을 최대의 극한치로 올려 놓는 역사서술, 진화론적이고 목적론적이며, 심지어 기능주의적인 역사서술, 구조중심의 거대한 변환을 중심적으로 다루는 역사서술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말끔히 치워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민중들의 삶이 숨을 쉴수 있도록 어떤 새로운 장(場)을 펼쳐낸다. 단턴의 이 책은 민중들이 경험했던 18세기, 프랑스 파리에서의 삶, 즉 프랑스적인 것, 프랑스성으로 지칭되는 삶의 결정들에 담긴 의미들, 상징들의 요소들을 추출하는 것을 다층적으로 펼쳐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단턴의 이 책은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의 가능성의 장(場)을 무궁무진하게 펼쳐낸다. 역사의 단층들에서 비켜나 있던 어떤 것들을 다시 위치시키고 그것들이 지닌 의미들을 다시 취하는 것, 그것은 역사가들의 눈에 비친 새로운 세상이 가지고 오는 어떤 아름답고 찬란한 혼란과도 같은 것이다. 다른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의 첫 삽을 단턴이 펐다면 이제 우리는 부드러워진 대지의 평면에 보다 심층적이고 의미가 다채로운 이야기들의 삽을 퍼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임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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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73)

토요일 오전에 결혼식에 갔다가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 2006)의 역자를 만났다. 바로 물어본 것은 책의 근간 여부였는데, 벌써 깔렸다는 것이었다, 이번주에 말이다(알라딘의 새로나온 책 코너는 언제나 뒷북친다). 몇달 전 근간 소식을 접하고 고대하던 책이었던 만큼 제일 먼저 꼽는 건 당연한 일이겠다(이미지를 띄우는 기능이 오락가락 하는 바람에 이 페이퍼는 언제 완결될지 알 수 없다).

 

 

 

 

한 차례 날려먹고 다시 쓴다. 하지만 조금 짧게. 어쨌든 가라타니 고진(1941- )은 현재 비평가로서 일본 최강이며 그런 만큼 최우량의 퀄리티를 보증한다. 신간 또한 예외가 아닐 거라고 믿어봄 직하다. 책의 표제가 된 글은 이미 <문학동네>(2004년 겨울호)에 '근대문학이 종말'이란 제목으로 게재되어 국내에서도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리고, 그걸 포함하고 있는 고진의 최신간 비평집이 <근대문학의 종언>이며 일어판은 작년 11월에 출간됐다. 그런데 불과 5개월 만에 국역본이 출간된 것이니까 이런 유형의 책에 관한 한국의 출판관행에 견주어 이례적이며 파격적이다. 그 '스피드'에 있어서 거의 일본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자와 출판사의 '순발력'이 놀라울 뿐(역자는 이미 고진의 비평집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2004)를 옮긴 바 있는 '전문가'이다).  

 

일어본의 부제는 '가라타니 고진의 현재'이고, '가라타니 고진 사상, 총결산과 새로운 전개'라는 광고문구가 큼지막하게 달려 있다. 그의 <일본근대 문학의 기원>이 '대외적인' 출세작이었으므로 <근대문학의 종언>을 계기로 '총결산'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래저래 합당하다. 그 종언 이후의 새로운 전개(신전개)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두번째 책은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아카넷, 2006)이다.  흔히 신랄한 독설가이자 <인간과 초인> 같은 희곡 작가로 잘 알려진 버나드 쇼이지만, 사회주의 사상서까지 쓴 줄은 미처 몰랐었다. '이상주의, 점진주의, 의회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주의 이념으로 영국 노동당의 정치노선을 대변한다는 것이 페이비어니즘인데, 쇼는 그 핵심멤버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참고가 될 만한 칼럼의 일부를 옮겨오면 이렇다. 김성이 교수(이화여대, 사회복지학)의 국민일보 칼럼(05. 12. 14)이었다.

 

 

 

 

-근세 영국의 사회보장제도는 베버리지 보고서에서 기인한다. 베버리지는 “나는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적 조건하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다” 라는 이념으로 영국 사회보장에 기초가 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베버리지 보고서를 기초로 하여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하는 영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설립되게 되었다. 이베버리지에게 영향을 준 것은 영국의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페이비언 협회의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버리지는 청년기 때 토인비홀에서 불우이웃을 위한 사랑실천 운동을 했으며,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하여 자본주의의 자유시장체제와 사회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페이비언 협회는 1884년 영국에서 소수의 지식인에 의해 설립되어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단체로 발전되었다. 페이비언(Fabian)이란 한니발 대군을 격파한 로마 장군 파비우스(Fabius)에서 기인한다. 그는 카르타고 전쟁에서 접전을 피하고 꾸물거린다고 로마 시민으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호기를 포착해서 한니발을 격퇴하여 로마를 구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페이비언주의의 기본 이념은 점진적 사회개혁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페이비언 협회는 사회개혁의 네 가지 원칙을 강조한다. 첫째, 민주적이어야 한다. 모든 국민이 사회개혁에 대하여 대응할 준비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둘째, 점진적이어야 한다. 개혁의 속도가 사회혼란을 야기시켜서는 안 된다. 셋째, 도덕적이어야 한다. 부도덕한 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더욱 도덕적이어야 한다. 넷째,그 어떤 개혁도 입헌적이고 평화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페이비언 협회는 침투와 설득이라는 전략으로서 사회개혁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설득의 대상으로 삼았다. 페이비언 협회의 노력 결과 런던의회가 개최되었고 구빈활동에 개혁을 가져와 영국 복지국가의 기본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복지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복지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의 개념이 조화로운 박애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 뉴라이트운동은 모든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존중해야 하며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해치는 어떠한 장애물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맞서 싸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한 싸움은 설득과 관용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뉴라이트의 정치이념이 '페이비언 사회주의'와 조화를 이루는 것인지는 의문이지만(어찌됐든 사회주의 아닌가!), 그리고 현재의 영국이 '복지국가'의 모델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페이비언 사회주의 유래와 내용은 그러하다고 한다. 쇼의 책은 그 이념적 정수를 짚어내고 있는 책이고. 버나드 쇼의 신간들 가운데에서는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이너북, 2005)을 바그너의 원작 <니벨룽의 반지>(책과소금, 2005)와 함께 읽어보는 게 그간의 희망사항이었는데,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추가해야 될 모양이다. 덧붙여, 지난번에 자유주의 관련서들을 짚어보았던 김에 이번에는 사회주의 관련서 몇 권의 이미지도 띄워둔다.   

 

 

 

 

세번째 책은 지구상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던 나라, 그리고는 현실 사회주의를 지난 세기에 끝장낸 나라 러시아의 경제사를 다룬 따찌야나 찌모쉬나의 <러시아 경제사>(한길사, 2006)이다. 다루는 범위는 방대해서 고대 러시아부터 푸틴(뿌찐) 시대까지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총2부 1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기술되어 있다. 제1부은 고대부터 1917년 10월 혁명 이전까지의 시기인데, 기존 연구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부분들-고대와 중세의 러시아 경제-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좀더 상세히 알 수 있다. 제2부는 10월 혁명부터 뿌찐 시대 초기까지의 경제개혁을 다루고 있는데, 기존의 책들과는 시각이 전혀 새로운 뿐만 아니라, 1990년대의 시장경제 체제개혁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워낙에 이 분야의 책들이 드문지라 따로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러시아 경제발전사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정치, 사회 등 폭넓은 범위에 걸쳐 풍부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교양서로서도 가치가 있다"고 하니까 두루 읽어보심이 어떠할까? 참고로, 저명한 경제사학자 알렉 노브의 <소련경제사>(창비, 1998)는 이미 오래전에 출간된 바 있다. 나란히 꽂아둠이 마땅하다.  

 

 

 

 

네번째 책은 알코올 소비 세계 1위국인 러시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테마의 책이기도 한데(러시아의 술 얘기는 <굿모닝 러시아> 참조),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장 메종디외의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알코올>(정신의서가, 2006)이다. 부제는 '사랑의 이야기'.(아마 러시아판이었다면, '알코올 중독 이야기' 정도가 부제로 어울림직하다.) 내용은 제목 대로라면,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알코올이 무슨 역할을 할까, 정도를 기대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알코올 중독이라고 말하는 알코올 의존증과 남성성·여성성의 관련성을 살펴본다"고.

"오랫동안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을 치료해 온 지은이가 만난 남녀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의 사례를 분석하여 술의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사랑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벗겨낸다. 이 책은 알코올 의존증에 대한 흔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알코올 의존자들은 어쩌다가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을까? 이는 알코올 중독의 원인이 술뿐이 아닌 심리적인 데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은이가 찾아낸 심리적 원인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고정된 타입을 강요하는 사회문화이다. 남성은 과음으로 남성성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반대로 여성은 여성스러움이 강요하는 결함을 은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술 없이는 이성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남녀의 생리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더 나아가 사람은 관계를 가깝게 만들기 위해 술을 마시는가, 아니면 술은 역설적으로 관계를 갈라놓는 벽인가의 흥미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 이런 내용 소개보다 좀더 눈길을 끄는 것은 책의 한 소제목인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술을 마셔요, 내 사랑" 같은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러브샷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러브샷 때문에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는 얘기는 들어본 바 없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고 싶지만/있지만, 사랑해서는 안되는 사람을 두고서 술을 마신다. 엄청. 그게 알코올 중독의 흔한 시작 아닌가?(하다못해 황태자 주지훈도 한번 실연을 하고 소주를 하루에 3-4병씩 한달을 퍼마셨다지 않은가?) 그리고는 이렇게 주절거리곤 한다: "당신과 나, 알코올과 함께, 죽는 날까지". 결론? "알코올이냐 여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알코올이라면 황태자급에 해당하는 이들이 작가, 예술가들이다. 이 주당들의 면면들은 <알코올과 예술가>(마음산책, 2002), <작가와 알코올 중독>(랜덤하우스중앙, 2005) 등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문학작품으로는 '미라보 다리'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알코올>(문학과지성사, 2001)이 가장 유명하다. 이 시집 연구서로는 황현산 교수의 <얼굴 없는 희망>(문학과지성사, 1990)이 있다.  

 

 

 

 

네번째 책은 미국의 전설적인 얼터너티브 록밴드 '너바나'의 리드싱어였던 커트 코베인(1967-1994)의 평전으로, 음악/연예 전문기자라는 찰스 크로스의 <커트 코베인 평전>(이룸, 2006)이다. 27살에 자살을 선택한 코베인은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이를 정서적 바탕으로 하여 현실에 대한 분노와 좌절, 냉소 등을 펑크록에 담아 표출했다고.

 

 

 

 

사실 나는 너바나의 음악이나 커트 코베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그의 아내였던 커트니 러브를 먼저 알았을 정도이다).

미국의 현대 팝음악에 대한 나의 취향은 '도어즈'의 짐 모리슨에서 R.E.M 정도까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에 '전설'로 남은 리더이고, 그룹인지라('너바나'는 물론 불교에서 해탈을 뜻하는 '니르바나'를 영어식으로 읽어준 것이다. 그런데, 밴드 이름이 '니르바나'라고 하면 왜 촌스럽게 들릴까?) 이런저런 귀동냥으로부터 면제될 수 없었다. 또,코베인의 개인사 못지 않게 당대의 문화사에 대한 식견도 얻을 수 있을 거 같아 이 평전에 눈길이 간다.  

다소 늦게 눈에 띄었지만, 이 평전과 마침 같이 읽을 만한 책으론 조지프 하스/앤드류 포터 공저의 <혁명을 팝니다>(마티, 2006)가 있다. 하버마스의 제자들이라는 두 저자는 1960년대 이후 서구를 휩쓴 반문화(counter culture) 운동의 '신화'를 낱낱히 까발린다고. 한 서평에 따르면, "잘못된 반문화의 이상에 헌신"해온 서구의 진보 좌파에 대한 통렬한 공격을 가한다. '문화적 저항'이란 신화에 (아직도) 기대와 미련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볼 만한 책으로 보인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작가 김훈의 첫 소설집 <강산무진>(문학동네, 2006)이다. 여러 일간지에서 이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는데, 여기서는 문화일보(06. 04. 17)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온다.

-김훈(58). 1995년에 장편소설 <빗살무늬 토기>를 펴낸 직후 바로 문단의 큰 나무가 돼버린 사나이. 장편소설 <칼의 노래>(2001년), <현의 노래>(2004년)로 우리말 문학의 아름다움을 한껏 쳐든 언어의 수공업자. 그가 첫 중·단편 소설집 ‘강산무진(江山無盡)’을 펴냈다. 8편의 작품을 모은 책의 제목은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의 산수화 이름에서 따왔다. 책이 담고 있는 풍경은 이승과 저승, 생시와 꿈의 경계를 넘어 무한히 펼쳐져 있는 그림의 강산을 닮았다. 주인공들은 대부분 삶의 불우(不憂)와 슬픔을 늙어가는 육신에 혼자서 짊어지고 막막한 시선으로 이 세상과 그 너머의 풍경을 응시한다. 이들은 자신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도 ‘밥벌이’를 신경써야 하는 당대의 일상을 아픈 심신으로 힘껏 견디면서도 끝내 신음소리를 흘리지 않는다.(*김훈은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쓴다. 에세이스트들의 천형처럼.)

-지난 13일 저녁, 경기 일산에 있는 작가의 집 주변의 한 맥주전문점에서 만났을 때 그는 가능하면 소설 이야기를 피하려 했다. 출판사 측은 그가 소설집 출간을 기념한 기자간담회를 싫다고 해서 지인들과의 술자리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문예지 ‘문학동네’의 신수정 주간과 류보선, 서영채, 이문재, 황종연씨 등 편집위원들, 그리고 일산파 젊은 문인들인 김연수, 김중혁씨 등이 ‘김훈 선생’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며 소설동네의 경사를 축하했다.

-첫 소설집을 낸 작가는 이날 미치도록 부끄럽다고 되뇌었다. 그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억지로 말을 시키자, 이번 소설집이 ‘나’의 이야기에 머무르고 ‘너’ ‘우리’에게까지 넓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더듬더듬 말을 꺼내놨다. 자전거 레이서로서 시속 30㎞까지 달릴 수 있다고 자랑을 할 때와는 판이한, 어눌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나는 편협한 글밖에 못 써요. 개인만 가지고 쓰잖아요. 시대 전체를 보고 역사의 구조를 통찰하는 황석영, 조정래 같은 작가도 있는데, 나는 그게 안 보이니…. 그래도 내 팔자가 있기 때문에 나는 내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의 ‘내 글’은 아내의 죽음을 맞거나(‘화장’) 자신이 암에 걸려 죽음 앞에 있으며(표제작 ‘강산무진’)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뒀고(‘고향의 그림자’) 하청업체 사장을 하다가 부도후 택시운전을 하는(‘배웅’) 인물들이 주변 사람들의 삶과 부딪치며 빚어내는 내면 풍경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신 주간은 책 뒤의 해설을 통해 그의 소설이 고대(‘빗살무늬의 토기’)와 역사(‘칼의 노래’ ‘현의 노래’)를 거쳐 3각 꼭짓점처럼 당대의 현실에 이르렀다고 묘파했다.

-탁월한 문학기자로, 에세이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소설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때, 많은 이들이 그의 문체로 소설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나도 그렇다.) 삶에 깃든 슬픔과 허무를 아름다움으로 한껏 밀어올리는 그의 문체 미학이 저잣거리의 잡사를 다루는 소설에 들어올 수 없다고 여겼던 것. 그는 그러나 발품을 팔아 얻어낸 삶의 거래 현황을 소설 속에서 치밀하게 묘사, 현장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우리 삶의 남루한 구석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독자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안기고 있다.(*아직 확언할 수 없다.) 신 주간은 이를 “새로운 형태의 서정을 획득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주변의 높은 평가와 달리 작가 스스로는 “산문보다 소설 쓰는 게 훨씬 어렵고, 짧은 구조에 완결성을 가져야 하는 단편 쓰기는 참 힘들다”며 “소설을 업으로 삼지 못하고 아마추어로 영원히 머물 것”이라며 사뭇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내 생각도 그렇다.) 그는 그러면서도 소설을 쓰는 일은 모국어와 몸을 힘껏 써야 한다는 점에서 연애하는 것과 같다며 소년처럼 설레는 듯한 미소를 보여주기도 했다. 소설에서 ‘몸’의 미학에 천착해 온 그는 집필할 때 연필로 쓰는 것을 고집하는 까닭이 어깨로부터 팔에 전해지는 힘을 느끼는 게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내가 김훈에게서 가장 높이 사는 것은 이 '소년'의 '연필로 쓰기'이다. 소설의 내용은 상관없다. 거기에 비하면 사소하다. 작가 김훈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앞으로의 창작 계획을 묻자 그는 요즘 병자호란, 한일합방 등 우리 역사의 치욕이 어떻게 된 것인지 책과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했다. “인간의 삶은 영광과 자존, 찬란함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소설이 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게 내 일이지요.”(*그 역사의 치욕이 그의 치욕과 어떻게 상관적인지는 다른 자리에서 지적한 바 있다. 김훈에 대한 나의 신뢰는 간혹 위악적인 그의 포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관성'에 대한 그의 집요한 몰입에 놓인다. 그는 '열심히' 자신의 길을 갈 것이며, 자신의/역사의 치욕을 되뇌일 것이다. 나는 그가 훌륭한 소설가가 아니어도/못 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06. 04. 15-17.

P.S. 마감후에 눈에 띈 책은 (드디어 출간된) 미하일 바흐친의 <말의 미학>(길, 2006). 원제는 '언어적 창조의 미학'인데, 보기 이해하기 쉬운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바흐친 사후에 편집된 책으로 기억되는데(러시아판 1979년), 초기 바흐친의 주요 이론적 관심과 주장들을 모아놓은 그의 주저이다. 국내에서 한풀 꺾인 듯한 바흐친 '열기'에 다시 기름을 붓는 격이 될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모처럼 출간된 '무게' 있는 저서(580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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