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 왜 고양이들은 학살을 당해야만 했는가?
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책의 목적과 방법론에 대하여

    단턴의  이 책의  목적은 "18세기 프랑스의 사고방식"을 기술하는데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즉 어떻게 세계를 해석했고 세계에 의미를 부과했으며 감정을 불어넣었는가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15) 단턴은 프랑스 계몽주의 시기의 역사를 다루는 역사학자로서 주로 위로부터의 엘리트주의적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역사, 즉 민중의 삶을 다루는 역사를 다룬다. 구체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이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는 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의 파편을 한 데로 모으고 있다. 농민들의 민담, 한 파리 인쇄소에서 벌어졌던 고양이 죽이기 대소동, 몽펠리에 주민의 도시 설명서, 경찰 수사관의 조서, <백과전서>의 서문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단턴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그리고 그를 통해 하층민들의 삶으로부터 파생되는 '의미구조'로서의 문화가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분석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의미구조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문화'는 상류계급으로의 계급적 편향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층 계급의 자기 정당화의 기제로서 다시 정의된다.

     단턴의 이러한 방법론적 전략은 기존의 역사서술의 방법론(Methodology)에 큰 혁명과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일대의 전환적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도 같았다. 이른바 '역사 인류학'적 방법론이라고 지칭되는 새로운 역사 방법론에 입각한 글쓰기가 이 책에서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단층을 분절하여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구조의 결을 인류학적 방법론을 통해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그를 통해 민중들의 삶과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이것은 실증주의적이고 사실주의적 역사해석 방법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단편적인 것들의 층위에서 의미가 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해석하는 것이며 결코 전체적인 것에 경도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서 강요되는 '대표성'도 주장하지않는다. 단턴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의미해석'의 다양성과 개방으로서의 역사해석의 가능성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우리는 기존 역사자료에 대한 무한한 의미해석의 개방성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시기를 살아간 역사적 주체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해석과 의미부여의 방식을 다시 읽어내려갈 수 있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인쇄공들은 왜 고양이를 죽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참고로 이 리뷰에서는 이 책의 1장, 2장, 5장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내가 최총의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고 나의 해석이 완벽한 것이라고 자처하지도 않는다. 이 책은 구체제의 모든 사회 집단과 지리적 지역에 걸친 사상과 재고조사표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이 책은 전형적인 사례연구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전형적인 농민'이나 '대표적인 부르주아'같은 것이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18)

 2. 고양이는 왜 학살을 당해야만 했을까?

   이 책의  1장은 <마더 구스 이야기>를 통해 농부들 사이에 오고 갔던 민담이라는 하나의 장르에 담긴 의미가  통시적, 공시적 과정을 통해 어떻게 다르게 변환되어 가는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먼저 단턴은 <빨강모자 소녀>에 대한 에릭 프롬과 베텔하임의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인용한다. 그 핵심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 자체가 역사성이 없는 무의식의 무역사성을 보편적 구조로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단턴은 민담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역사적 변동과정을 거쳐서 의미구조가 변동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을 통해 다시 역사주의로 되돌아온다.(29) 

 

   다시,  역사주의적 문제의식을 견지한 채로 돌아와 역사인류학적 방법론을 통해서 살펴본 18세기까지의 민담에 대한 구체적 분석의 결과는 <신데렐라>, <빨강 모자 소녀>, <엄지 소년> 등의 민담의 일반적 윤곽을 상정하기에 충분한 판본의 잔존이다. 이 민담은 일반적 주제, 문체 및 어조, 특징 등의 공통적인 요소들에 의해 하나의 의미구조 혹은 의미의 망(網)속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36) 여기서 단턴은 구전 문학 연구의 특이한 성과들을 끌어들여 이를 민담 연구에 다시 적용시킨다. 그 핵심적 내용은 바로 낡은 텍스트의 주제가 그것을 다시 새롭게 구성하는 창조자에 의해서 새롭게 된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전체적 윤곽을 흩트려 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세부적 내용들을 다양한 방향으로 변주시키는 독특한 전략이다. 하지만 민담 속에 담긴 민중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경험한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 의미, 공통의 근거는 그대로 담겨져 있다.

   위에서 제시된 몇 가지 종류의 민담에 관한 체계적 분석(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을 통해 단턴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즉 "여러 민담들은 동일한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각 국가에서의 다른 전통 속의 판본들은 완전히 다른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77) 우리식으로 이야기한다면 각 국가의 민중들은 각 이야기들에 대해 부여하는 특징적 의미들을 다르게 지니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그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차이를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적 세계 인식의 차이는 프랑스인들에게 프랑스적인 것 혹은 프랑스성이라는 개념을 부여하게끔 한다.(97) 이것은 프랑스의 민중 문화의 양식을 대변하는 언어적 특질의 집합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독특한 그들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구체제의 사회 속에 만연했던 사회적 계급과 지역적 특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특수하게 프랑스적인 속성, 가치, 태도, 그리고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을 소통시켰던 것이다."(100)

  제 2장은 생-세브랑 가의 인쇄공들이 벌인 무자비한 고양이 대학살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왜 노동자들(인쇄공들)은 고양이를 죽여야만 했었는가? 우리들의 시선으로 보면 인쇄직공들이 부르주아지들의 '고양이'를 상징화시킨 뒤 죽인 그 '행위'가 혐오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18세기에 일어났던 이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 뒤에 숨겨진 의미들의 층위들은 우리에게 그 당시노동자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이것이 '고양이 대학살'에 대해서 단턴이 주목하고 있는 지점이자, 방법이다.  그리고 그는 그 사건에 나타난 '상징'과 '의미', 그리고 '사건'의 제 관계를 규명한다. 

    노동자들로서의 인쇄공들은 '고양이'에 하나의 상징을 부여한다. 왜 고양이인가? 그들이 고양이에게 상징을 부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것이 하나의 증오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를 증오하는 노동자들로서의 인쇄공들은 그 고양이에 상징을 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부르주아의 애정의 대상물로서 널리 보급된 동물이었으며, 노동자들은 그것만도 못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18세기 인쇄공들은 부르주아지들과의 주-종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17세기와 18세기의 역사적 간극에서 인쇄공들이 처한 경제적 위치는 매우 불안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정부의 지원을 받던 대규모의 인쇄소들이 대부분 몰락하고 독점-지배의 체제가 형성되자, 인쇄공들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너무도 불안전한 것으로 된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스위스의 인쇄소의 위치는 직인과 주인들, 그리고 인쇄공들의 평화로운 공존으로 충만했던 인쇄술이 처음 발명되었던 이상향의 시기의 풍경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고양이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단순히 그 동물이 부르주아지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과 분노를 표상했기 때문은 아니다. 달리 말한다면 고양이가 대학살을 당하게 된 이유는 근대초 노동관계에 대한 고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단턴은 여기에 또 다른 원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양이가 사육제(카니발)에서 중요한 의식/의례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샤리바리라는 사육제의 기간은 기존의 금욕적 사회관계가 전도되는 것이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기간이다. 이 기간에서 고양이는 민중들의 억압적 삶의 욕구들이 구체적으로 분출되는 것에 필요했던 하나의 희생물이였던 것이다. 이른바 18세기 전 유럽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잔인성의 예식의 희생물로서의 고양이는 나름의 상징과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단턴은 그것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한다.(135~138) 1) 고양이는 마법성을 지닌 동물이다. 2) 고양이는 주술적인 힘을 지녔다. 3) 고양이는 인간의 은밀한 부분으로서의 성(性)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단턴이 보기에 고양이를 죽이는 학살의식은 노동자들의 문화적 상징과 의미의 체계 속에 깊은 내적 연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적 주제를 가지고 유희를 즐기는 하나의 방식이며 경험을 의미화하는 방식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 의식과 상징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연출하며 재연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 의미적 연출극으로 다시 탄생하게 되어 노동자 계급의 문화적 정체성 형성의 메커니즘으로 전환된다. 여기서 단턴이 중요하게 지적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19세기 이전, 즉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앙 레짐시기까지의 노동자들의 저항은 계급적 성격보다는 직업적 성격이 보다 강했으며 그것은 실제적 차원의 저항보다는 상징적 차원의 저항이 강했다는 것이다.(148)

      제 5장에서는 18세기 계몽주의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던 백과전서주의를 대표하는 저서라고 할 수 있는 <백과전서>를 분석한다.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백과전서를 "인간 지식의 질서나 연쇄에 대한 체계적 설명"이라고 지적한다.(275) 여기서 '지식의 나무'라는 매우 중요한 메타포가 등장한다. 이 메타포는 지식의 가지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유기적 전체로 자라날 수 있다는 관념을 나타내고 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백과전서>를 기술하는 방법과 유형은 '베이컨'의 그것에서 차용되어 왔으나 그것의 강조점을 서로 다른 곳에 놓이게 된다. 이 <백과전서>에서 가장 특이할 만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설정학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이다. 그들은 "종교를 철학에 종속시킴으로써 그것을 효과적으로 탈기독교화시킨다."(284)이는 종교에 대한 학문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을 이성적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하게 복속시켰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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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턴은 또한 달랑베르의 <예비적 논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예비적 논고>의 마지막에서 달랑베르느는 자신의 동료 계몽 사상가들을 문인 중의 극치, 뉴턴과 로크의 후예라고 찬양함으로써 이러한 의미의 변천에 기여하였다. <백과전서> 전체는 그 표지에 '문인 사회'의 저작이라고 언명하였던 한편 그의 동료와 적 모두가 <백과전서>와 계몽 사상을 동일시하였다. 이것은 문명=문인=게몽 사상'이라는 등식을 구현하려던 것처럼 보이며 역사의 모든 진보적 조류를 계몽 사상의 무리에 흡수시키려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예비 논고>의 역사적 논리는 인식론적, 형태론적 논리로 수행된 저작을 완성시켰다. 이것은 계몽 사상가들을 문인과 동일시하고 문인을 역사의 동인으로 제시함으로써 계몽 사상가들을 정당화시켰다."(295~296)

    결론적으로 본다면 백과전서파들은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자신의 계몽사상을 하나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체계로 구성하려 했던 욕망을 구축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이용하여 그것이 권력과 동일한 것으로 등치될 수 있었던 것을 인지한 백과전서파들은 그를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하나의 인식적 지도 그리기의 일환으로 <백과전서>를 기술한 것이다. 이것은 백과전서파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경험, 그리고 의미 부여의 하나의 방식이자 그를 통해 세계를 다시 구성할 수 있으리라는 욕망의 표현이다.

 3. 새로운 역사 서술의 방법론적 정초를 위하여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은 결국 역사가의 새로운 역사서술의 방법을 정초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단턴의 역사 서술 방법은 기왕의 그것과는 너무도 다른 '단절'을 형성하기에 충분하다. 단턴의 이 책은 전체사에 편중된 역사서술, 실증적인 것을 최대의 극한치로 올려 놓는 역사서술, 진화론적이고 목적론적이며, 심지어 기능주의적인 역사서술, 구조중심의 거대한 변환을 중심적으로 다루는 역사서술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말끔히 치워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민중들의 삶이 숨을 쉴수 있도록 어떤 새로운 장(場)을 펼쳐낸다. 단턴의 이 책은 민중들이 경험했던 18세기, 프랑스 파리에서의 삶, 즉 프랑스적인 것, 프랑스성으로 지칭되는 삶의 결정들에 담긴 의미들, 상징들의 요소들을 추출하는 것을 다층적으로 펼쳐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단턴의 이 책은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의 가능성의 장(場)을 무궁무진하게 펼쳐낸다. 역사의 단층들에서 비켜나 있던 어떤 것들을 다시 위치시키고 그것들이 지닌 의미들을 다시 취하는 것, 그것은 역사가들의 눈에 비친 새로운 세상이 가지고 오는 어떤 아름답고 찬란한 혼란과도 같은 것이다. 다른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의 첫 삽을 단턴이 펐다면 이제 우리는 부드러워진 대지의 평면에 보다 심층적이고 의미가 다채로운 이야기들의 삽을 퍼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임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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