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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평점 :
순수하기에 고독한 남자
<행인>은 나쓰메 소세키가 <아사히 신문>에 연재했다가 건강 악화로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되어 완성된 장편소설이다. <행인>은 <춘분 지나고까지>, <마음>과 더불어 나쓰메 소세키의 후기 '에고(ego) 3부작'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출처 : 행인 p417) 그래서일까? 세 소설은 연결되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마음>은 읽기 전이라 우선 <행인>과 <춘분 지나고까지>만을 두고 생각해보았다. <춘분 지나고까지>는 <행인>보다 앞서 쓰인 작품이다. <춘분 지나고까지>를 읽고 작가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춘분 지나고까지>는 딱 여기서 끝이 났다. 우린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반면 <행인>은 여기서 좀 더 나아간다.
이치로는 아내 나오와 동생 지로의 관계를 의심하며, 지로에게 나오의 마음을 시험에 봐달라는 말까지 하게 된다.
"아아, 여자는 미치광이로 만들지 않으면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걸까?" -p.119
자신과 가장 가까운 두 존재를 믿을 수 없었던 지로, 그의 의심은 점점 커져 가족 모두를 불신하기에 이른다. 집안의 상막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지로가 집을 나갔지만, 집은 달라지지않았다. 가족은 이치로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치로 역시 가족들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집은 더욱더 숨막히는 곳이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은 다리는 없다."
가까운 사이였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는 없었던 사이, 여기까지가 <춘분 지나고까지>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말이다. 하지만 <행인>은 여기서 좀 더 생각의 범위를 확장한다. <춘분 지나고까지>의 게이타로는 좀 태평스러운데가 있는 사람이라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지만 이치로는 달랐다. 이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파고 들었고, 그 결과 결국 자신만의 답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한테 시집을 가든 여자는 시집을 가면 남자 때문에 부정해지는 거네, 그런 내가 이미 아내를 얼마나 못쓰게 만들었는지 모르네. 내가 못쓰게 만든 아내한테서 행복을 구하는 것은 너무 억지스러운 일 아니겠나? 행복은 시집을 가서 천진함을 잃게 된 여자한테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네." -p. 411
이치로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오를 부정한 존재라고 결론을 내린다. 나오 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 모두를 부정한 존재, 반면 자신은 천진함을 지닌 순수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그런 부정한 존재들에게 내가 맞출 필요가 없다고 친구 H에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아닌 그들이 자신에게 맞추어야 하는 거라고.
이치로는 왠지 나쓰메 소세키의 자아같다. 나쓰메 소세키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춘분 지나고까지>에서 인정했다면, <행인>에서는 사실 내가 이해 못하는 것은 내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속세에 너무 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같다. 그러니 자신이 아닌 타인이 자신의 경지까지 올라서야 한다고 독자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같다. 정확히는 나쓰메 소세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일본인들에게 하는 말이겠지만말이다. 서양것에 현혹되고 물질에 복종하는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에고 3부작'이라고 불리는 <춘분 지나고까지>, <행인>은 이제까지 읽어왔던 나쓰메 소세키의 그 어떤 소설보다도 강렬하고 직접적이다. 이야기는 이어지지않지만, 인물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어지는 듯해 마치 하나의 이야기같이 느껴진다. <행인>까지 읽고 나니 <마음>이 궁금해진다. 소세키는 <행인>에서 보여주었던 생각을 좀 더 확고히 했을까? 아니면 정 반대의 결말을 내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