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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짝홀짝 호로록 - 제1회 창비그림책상 대상 수상작
손소영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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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부터 정말 귀엽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몽글몽글함이 표지를 넘기기 전부터 마음을 설레게 한다. 다른 어떤 색도 아닌 노란색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포근함이 아이들에게도 와닿았나보다. 교실에 비치해두었더니 겉표지에 벌써 손때가 끼기 시작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말하고자 하는 바에 반드시 대응되는 문장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맥락이 맞닿는 지점이 있어서 인용하였다. 대화를 하든 글을 쓰든 의도한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어휘력을 요구한다. 학교에서 다양한 지문을 접하고 말뜻을 헤아리는 까닭은 여기에 있을 거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학교밥을 먹다보니 아이들의 평균적인 어휘 수준에 대한 인상 비평이 가능해졌다. 어휘력을 수치로 나타낸다면 그 수치 자체는 무시무시하게 떨어지진 않았을 거다. 피사(PISA) 읽기 순위를 근거로 제시하겠다. 그러나 그 질이 깊어지거나 좋아졌냐면...그건 잘 모르겠다. 어휘력을 여러 분야로 나눴을 때, 기존의 활자 매체 어휘를 고전적 어휘라고 칭하고 영상 매체를 기반으로 하여 파생되는 각종 신조어, 밈 등을 최신 어휘라 한다면 고전적 어휘력은 후퇴하는 중이 아닌가 싶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여러 표현을 쓸 수 있을 텐데, 다양한 상황에 하나의 표현...그러니까 본인에게 익숙한 한두 가지 표현만을 고집하는 어린이를 적잖게 만나왔기 때문이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면 한두 가지 표현만 사용하는 아이들의 세계는 그만큼 폐색되었을 거다.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여 감성적인 글을 쓰는 사람을 오글거리는 선비쯤으로 취급하는 이들의 세계도 마찬가지리라. 아이들의 세계도 그래야만 할까.


 <홀짝홀짝 호로록>이 그래서 반갑다. 어른이라면 의성어와 의태어 정도야 '껌'이다. 어른은 우리가 잘 알고 있기에 어린이들도 잘 알 거라는 착각을 쉽게 하기 마련. 부끄럽지만, 교단에 서는 사람들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좋은 그림책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도 '아, 이럴 때 이런 표현을 썼지', '이 표현과 이 색이 심상적으로 연관되지'...새삼스럽게 깨닫는 것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괜히 책표지에 손때가 벌써 묻기 시작한 게 아니다.


 1~2학년 국어 교과와 연계하는 것은 물론이고 3~4학년 국어 교과와도 연계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시 수업에서 더더욱. 한 장면을 보고 그 장면의 의성어나 의태어를 활용한 시를 써본다든지...충분히 재밌는 수업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세계는 넓어지고, 어느 한 세대의 세계가 넓어지면 그 다음 세대의 세계도 넓어질 거다. 좋은 책과 좋은 책을 가지고 하는 수업이 세계를 넓히는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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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밤 - 당신을 자유롭게 할 은유의 책 편지
은유 지음 / 창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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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마다 책방이 있던 시절, 서점 직원들은 책마다 짧은 추천사를 메모지에 적어 남기곤 했다. 때때로 주제에 따라 책을 모으기도 하였고. 그런 서점을 떠올리게 한다.

은유 작가의 「해방의 밤」은 꼭 개인이 운영하는 독립서점 같다. 작가 개인의 삶에서 중요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책들을 경험과 엮어냈으니, 글에 공감하기도 어렵지 않다. 술술 잘 읽혔다. 그러니 책 큐레이팅을 겸하는 에세이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좋든 싫든 현대인은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고자 하는 습성을 지니고 말았다. 책은 많고 읽을 시간은 없다. 아주 바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이 시간을 쪼개가며 독서에 투자하는 모습을 보면 경이로울 지경이다. 나는 그게 잘 안 되는데. 사서라 하여 모든 책을 아는 건 아니니 내 경험, 내 감성에 딱 맞아 떨어지는 책을 찾아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책마다 짤막한 감상과 추천사를 적어주는 서점도 점점 줄어들고, 그나마 있다는 독립서점도 동네에 있지 않으면 방문하기 여의찮다. 「해방의 밤」은 책을 찾으나 지식 습득보다는 개인의 경험에 어울리는, 나 자신에게 지금 필요한 문구가 있는 책을 찾아줄 수 있는 책이다. 실제로 나는 한 모임에서 노동 관련 도서를 선정해야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모임에 필요한 책을 고를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기득권도 고통받는다는 말>과 같은 글에서는, 은유 작가의 경험을 따라가다보니 나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대응을 할지를 함께 고민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있고 책에는 그 권수만큼 다양한 삶이 녹아 들어 있다. 삶과 책을 엮어낸다면 경험의 폭은 넓어지고, 타인에 대한 이해 또한 그 깊이를 더해갈 거다. 「해방의 밤」은 생각이 많은 밤에 '나'라는 개인에 제한된 경험과 감상을 훨씬 넓혀줄 수 있는 책이다. 진보 의제에 관심이 많은 여성이 읽는다면 더욱 그 효과를 크게 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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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어린이 2023.가을 - 통권 82호, 창간 20주년 기념호
창비어린이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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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선생님을 위한 클럽 창작과비평>을 통해 서평 도서 신청을 했다. 2023년 가을호의 주 테마는 청소년소설이다. 청소년소설은 작년부터 역시! <선생님을 위한 클럽 창작과비평>을 통해 관심도가 많이 늘어난 분야인지라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이때다!' 하고 잽싸게 폼을 작성했다. 이 자리를 빌어 창비에 무한 감사를...(내년에도 클럽 열어주세요...)

2022년에 사람과교육연구소의 정유진 선생님께서 진행하는 행복교실 14기를 수강했다. 교사 철학, 자기이해, 학급운영시스템, 학습이론, 프로젝트 학습법 등을 1년 동안 알차게 배웠다. 많은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지만, 개중 내 안에 크게 자리잡은 질답이 하나 있다. 어느 수업에서 나왔던 장면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학급운영시스템, 혹은 어린이왕국 프로젝트 내용을 공부할 때가 아니었을까 짐작만 한다.

"최근 모 유튜브처럼 현실을 정교하게 교실에 모방해 재현하는 학급운영방법이 유행한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현실을 따와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 해, 나도 해당 영상을 보고 상당히 자극을 받아 내가 잘 다룰 수 있는 분야인 게임 시스템을 모방하여 학급을 운영해볼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리 꼼꼼하고 철저한 사람이 아닌지라 그 모든 계획을 접고 행복교실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좌우간 나도 고민했던 지점인지라 정유진 선생님의 답이 기다려졌다.

"교실이 현실의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다. 사회에 나가면 다 겪을 것들. 지금 미리 겪지 않아도 괜찮다."

창비어린이 2023년 가을호를 읽으며 이 장면이 떠오른 까닭은 분명하다. 세 편의 특집이 어떤 방식으로든 '문학에서 현실을 어떻게 재현하느냐'는 문제와 맞닿았기 때문이다.


온갖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 모든 세대를 향한 냉소를 너무나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어린애들도 그 정도는 다 알아. 고등학생이 그걸 모르겠느냐. 이런 문구들을 읽을 때마다 섬짓하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 청소년은 청소년다워야 한다. 물론 당사자들은 이 말을 들으면 '아이 참. 선생님, 저희도 알 거 다 알아요!' 라고 말할 거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 나이에 어울리는 정서를 돌려주고 싶다. 알 거 다 알고 '쿨'하며 '힙'한 어른을 모방하는 게 아닌, 아이답고 청소년다운 정서를 말이다.

나도 현대인이기에 그리 독서량이 많지 않고 짬이 나면 유튜브를 보는 입장에서 책을 숭앙하고 뉴미디어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활자매체와 영상매체는 결국 도구이기 때문에 진짜 문제는 언제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다. '시간의 효율을 따지며 지름길을 찾기보다는 "기꺼이 더 먼 길을 돌아가"는 경험을 선사'한다는 대목을 읽으며 한창 자라나는 이들의 정서를 좀 더 키워주는 매체는 활자매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성인 또한 그러하리라. 21세기에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지는 못 할 지언정 여전히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지식을 많이 갖춘 이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타인의 심상에 공감할 수 없을 때 그 지식이 어떻게 쓰이는지 못해도 최소 10년(15년...?) 전부터, 혹은 최근 1~2년 동안 많은 이들이 느꼈을 거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정서를 가장 많이 마주하는 입장에서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정서는 무시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닌가 두렵다. 유감스럽게도 교사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을 읽고 현장의 동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보면 학생의 정서 또한 연구 대상일 교사 집단조차 정서를 '따위'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점점 강해진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나는 이 또한 두렵다. 참교육이 폭력으로 만사를 해결한다는 뜻으로 변질된 시대에 교육학도 교육철학도 없이 어린이를 만나는 일련의 과정이 섬짓하게 다가온다.(학교가 아니라 가정에서 이 역할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거다. 아이를 가진 교사들이 가정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있는지 되묻고 싶다. 그 답이 '그렇다'라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고 싶다.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노동에 시달려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 교직사회 구조가 어떻게 사회 구조와 동떨어질 수 있을까? 학교는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상아탑인가? 학교를 작은 사회라고 말할 거라면 교사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청소년문학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어른들의 몰이해와 무관심 속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이 가진 정서라는 토양을 적셔줄 수 있는 건 자신의 삶과 맞닿은 언어로 재현된 문학이다. 어떤 보호자들은 자신의 피보호자에게 실패라는 경험을 조금도 주고 싶지 않아 세상을 배양실로 삼아버리곤 한다. 그런 환경에 놓인 청소년이 누군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들의 실패와 좌절에서 비롯되는 희망을 자신의 것처럼 여길 수 있는 기회는 창작물에서 열리게 된다. 문제는 '어떻게'다.

'어떻게'와 연관하여, 트위터(오늘날의 X)에서 한때 어린이 권장도서가 어린이의 정서에 지나치게 폭력적이지 않냐는 문제가 화두로 돌았던 적이 있다. 해당 '플로우'가 막 시작되었을 때는 이 의견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훨씬 컸다. 그냥 좋은 책이라면 다 목록에 올리는 게 아니냐는 비판적인 의견도 제시되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에 아동청소년으로부터 슬픔과 고통을 거세시킬 수 없고 문학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오히려 세계의 폭이 넓어진다는 주장이 올라왔다.(정확한 표현이 이렇지는 않았다. 골조가 이러하였다. 후일 해당 트윗-이제는 게시물이다...-을 찾으면 첨부하겠다. 지원 환영.)

트위터(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트위터라고 하겠다)를 주 활동 무대로 삼는 서브컬쳐 향유층에서는 2010년을 전후로 하여 창작물 속 윤리적인 현실 재현 문제가 대두되었고, 오늘날에도 그 논의는 꾸준하게 이어져온다. 그 논의는 서브컬쳐 창작물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사회에서 화제가 되는 다양한 창작물까지 뻗친다. 그때마다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은 '같은 소재를 다루더라도 치열한 고민 끝에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그 창작물은 그저 외설적인 전시밖에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아동청소년이 접하는 창작물은 어느 정도의 보호막을 둘러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재현의 언어를 청소년에게」를 읽으며 생각을 다시 한 번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시의적절하게 이 글을 읽어서 기쁠 따름이다.

청소년이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청소년문학에서 등장인물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는 제한이 따를 수밖에 없다. 어린이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도덕적 운에 모든 해결을 맡길 수도 없으며 '세상은 이렇게 잔인하다'는 냉소만 남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터무니 없는 희망사항을 말해보라면 작품에서 제시되는 문제 해결 방식이 마냥 탈정치적이지 않기를 바란다. 현장에서 나는 5학년 어린이들 중에서도 장르문학, 특히 여성작가들의 최신 SF 작품들을 읽는 어린이를 의외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어린이들은 SNS에 능하고 어느 정도 서브컬쳐에 친숙하다는 경향성을 띠곤 했다. 최신 SF 작품에서 곧잘 찾아볼 수 있는 탈정치적이고 정치혐오적인 시선을 읽을 때마다 문학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 아동청소년이 이를 구체적으로 언어화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은은한 시선을 내재화하는 과정을 생각해본다. 탈정치의 시대에 그 폐해를 겪는 건 이 시대를 사는 가장 평범한 일반 대중이다.


우리 학년에서는 온책읽기 활동을 진행하며 한 달에 책을 한 권씩 돌려 읽고 있다. 「긴긴밤」, 「세상을 건너 너에게 갈게」와 같이 교사도 좋아하는 유명한 아동청소년 도서들이 참 많다. 상술한 바 있지만 교사 집단은 그 누구보다 아동청소년을 많이 만나는 집단이다. 교사들이 학생의 정서와 청소년문학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를 바라본다. '인간화'에 다다르는 길에는 여러 길이 있겠지만 청소년문학도 그 중 하나일 거라 생각한다. 좋든 싫든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를 면밀히 관찰하고, 그 문제에 얽힌 학생들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꼼꼼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최적의 위치이지 않은가. 교사 집단 내부의 냉소를 해결하고 아동청소년에게 재현의 언어를 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여기에 잠재되었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책임한 권력의 언어가 도처에 퍼지는 동안 사태를 재현 불가능한 것으로 남기는 쪽보다는, 이 괴물 같은 현실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재현에 한 발이라도 더 다가서는 편이리라.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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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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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라진 소녀들의 숲」은 조선 초를 배경으로 하는 추리소설이다. 천선란 작가가 추천사에 에놀라 홈즈를 언급하여 제법 기대감을 안고 읽기 시작했다.

어떤 작가들은 독자가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하면 불쾌해한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작가가 아니고 독자인지라 이후 전개를 대강 짐작할 수 있으면 큰 즐거움을 느낀다. 이번 책은 그런 종류의 책이었다. 읽는 동안 큰 부담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인공 민환이는 조선 최고의 수사관인 아버지의 뒤를 쫓아 자신이 나고 자란 제주로 향한다. 제주에 남겨두고 온 동생 민매월을 만난 민환이는 제주에 묻힌 아버지의 행방을 쫓고 이들 부녀가 얽힌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뒤틀렸던 자매의 관계는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회복되고 민환이는 누군가의 말을 따라서 살기보다 자신의 뜻대로 사는 이로 거듭난다.

첫째와 아버지 사이는 참 역동적이다. 첫째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 의지하고 싶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와의 투쟁을 통해 어른으로 거듭나고 싶다. 태양은 빛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림자를 상징하기도 한다. 관점에 따라 참 구식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지나는 첫째와 아버지 사이는 어찌되었든 인간과 태양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민환이에게 있어서도 아버지는 태양이다. 삶의 지침, 길잡이, 인정 욕구와 뛰어 넘어야 할 사람. 하지만 작중 사건을 겪으며 절대적이었던 아버지의 위상은 흔들린다. 빛은 필연적으로 그림자를 동반한다. 아버지에게 동생 매월이는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을 거다.

모든 인간은 좋은 인간일 수 있지만 완벽한 인간은 될 수 없다. 이 사실을 절절히 깨달은 다음에야 첫째와 아버지는 동등한 인간으로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었던 일도 용서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없던 점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환이와 매월, 두 자매는 아버지의 유산인 서로를 마주하며 상대를, 자신을, 이윽고 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기대받는 첫째(특히 장녀)가 읽는다면 위안이 될 거다.


분명 흥미진진하게 읽었으나 아쉬운 점도 존재한다. 다른 독자의 감상이 궁금해 검색을 해보니 내가 느낀 바를 짚으신 분들이 많이 계셨다. 세종 시기에 쓰인 이름이라고 하기에는 몹시 현대적인 이름,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문 촌장의 욕망, 어사의 존재...

모든 역사물이 철저하게 고증을 할 수는 없다. 당연하다. 그렇지만 역사물에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고증할지 정하는 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역사물을 만들거나 감상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 고민을 작년부터 해왔다. 어떤 것을 고증하고 어떤 것을 고증하지 않을 것인가. 고증할 것은 무엇인가. 어디까지 고민할 것인가.

암행어사가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8기통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팔도를 누빌 수는 있겠지만 국왕 직속 관리인 만큼 왕실과 나라에 충성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역사물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어떤 사고관과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지 담아내는 게 매우 힘들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된다. 현대인의 사고관을 담아내면 그건 배경이 조선시대일뿐, 당대를 담아낸 작품이라 보기 어렵지 않을까.

그럼에도 우리 역사에 주목하여 쓰여진 좋은 소설이다. 공녀 제도를 비롯해 당시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하며 같이 읽으면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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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 - 제15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13
나혜림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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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아동청소년에게 문학을 읽으라고 할까? 간접경험을 통해 우리가 직접 겪을 수 없는 것, 나와 다른 삶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실제로 청소년심사단은 이 작품을 읽고 “주인공을 통해 느껴 보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라는 심사평을 남겼다고 한다. 이는 「클로버」가 내게도 기꺼운 이유 중 하나다.

중학생 정인이는 수제버거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폐지 줍는 할머니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을 보낸다. 작중 표현을 인용하자면 그야말로 바늘 끝. 바늘 끝에서 탭댄스를 추듯 사는 일상은 악마가 등장하며 일상 바깥으로 빠져버린다. 악마의 유혹에 상상을 맡길 것인가,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 것인가? 원치 않은 선택 앞에서 견고하게 유지되던 정인의 마음은 어떻게 흔들리고, 어떻게 회복되는지...그 과정을 활자 너머에서 따라가는 시간은 무척 짧았다. 그만큼 즐겁게 읽었다.

21세기 현대 한국 청소년을 위한 파우스트. 읽으며 생각한 바를 간단하게 정리한다.


인간의 품위

가난하지만 우아하고, 품위를 지키는 삶을 다루는 작품은 꾸준히 있어왔다. 어떤 조건,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지켜야 하는 선을 지키며 살 것. 정인이는 가난 앞에서 마음이 무너지려고 할 때마다 '정직한 에이브' 이야기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아무리 태주가 정인을 괴롭히더라도 그 의기만큼은 해칠 수 없었을 거다. 품위는 세우는 것도, 해치는 것도 온전히 주인의 몫이다.

품위를 위선이라 치부하며 그 가치를 깎아내리는 풍조가 전에 비해 만연한 시대다. 돈이나 계급(이 둘은 사실상 동의어라고 봐도 되겠다.)이 보장만 된다면 옳지 않은 일도 어떻게든 가치로운 일이 된다. 착하게 사는 것은 속된 말로 '호구'의 행동으로 평가받고, 규칙을 지키면 바보 같은 짓을 한다고 비웃음을 산다. 가난은 빈자로 하여금 호구처럼 살지 말라고, 위선적으로 살지 말라고 끊임없이 유혹한다.

선량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을 위선자라고 비웃는 이들은 정인이의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할까? 정인이가 자신을 부당하게 해고한 수제버거집 창문을 깬 것을 '사이다'로 고평가할까? 나중에 수제버거집 주인에게 창문을 깨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이를 변상하러 가겠노라 다짐하는 모습을 보고 '고구마'라고 답답해할까?

내가 뭐라고 독자의 감상을 제한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이 작품이 최소한 그렇게 읽히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갸륵한 시선으로 정인이를 바라보는 사회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정인이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의 품위를 되돌아보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낡은 운동화, 겨울 코트 하나로 타인의 가난을 재단하고 삶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어떤 삶이 스스로를 인간답게 만드는지 자문하기를 바란다. 자신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삶이 어딘가에 있다고 (제발)간접적으로라도 알기를 바란다.

「클로버」가 반가운 까닭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근래 출간되는 작품들을 읽으며 중산층으로 살며 가난을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다루는 가난은 유리바닥은커녕 바닥조차 가지 않았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계약직 행정사무 보조로 지내며 복사기, 물티슈, 커피 필터를 담당한다는 이유로 불가촉천민이 된다는 게 이런 거'라고 말하는 시각에 갇힌다면 정인이가 복지관에서 받은 쌀과 라면이 왜 빌어먹을 것인지 어렴풋하게도 짐작해낼 수 없을 거라고 감히 짐작한다.

인간의 품위는 고급 겨울 코트 한 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삶의 갈림길에서 수없이 고민한 끝에 내린 스스로의 선택으로 세워지는 거다.

그렇다면 선택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 되어야 하는가?

사회가 가야 할 길

첫 담임을 6학년으로 시작했다. 수학여행을 추진하려면 수학여행을 갈지 말지 동의 여부부터 학부모에게 물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이 아이들을 데리고 제주도를 가기로 했다. 내가 근무하던 학교는 한때는 정말 부자들이 살던 동네였으나 지금은 그저 다세대, 다가구, 빌라가 많으며 인근 대학가 학생들을 노리는 원룸이 한창 들어오는 동네에 위치했다. 어떤 학생의 집은 그럭저럭 넉넉했다. 어떤 학생의 집은 겨울옷 앞주머니가 다 떨어져 솜이 흘러나와도 새 옷 하나 해주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모든 가정에서 수학여행 비용을 대주는 것이 쉽지는 않으리라 짐작된다.

학교에서는 사회복지 대상자라는 것을 선정하고, 그중 수학여행 비용을 내기 가장 어려우리라 짐작되는 학생을 학급마다 한 명씩 선정해 그 비용을 전액 지원하기로 했다. 우리 학교가 유별난 게 아니라, 내가 근무하는 지역 교육청의 학교들은 모두 이런 절차를 밟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른 교육청의 경우는 잘 모르겠다. 학교란 조직은 단위 학교마다, 학년마다, 학급마다 세세한 규칙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지금은 또 어떤지 모르겠다. 세월호 사건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런 지원을 받는 아이들에게 '너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꿈을 마음껏 펼쳐라'라는 말은 허상이다. 가뜩이나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고르고 골라 고른 것이 자신을 안 좋은 상황에 떨어뜨릴지, 그렇다면 얼마나 안 좋게 만들 것인지 가늠하는 일조차 어렵다. 이를 온전히 이 아이들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게 건강한 사회인가?

개개인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한 네 탓, 공부할 시간에 일하느라 성적을 올리지 않은 네 탓, 엄마가 위험하게 오토바이를 끌고 일하다가 죽은 탓, 노력을, 노오오오오력을 하지 않은 네 탓이라고. 하지만 사회는 그래서는 안 된다. 현대 복지국가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사회를 만들어가는 성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아이들을 좀 더 안전(신체적 안전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전까지)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클로버」의 세계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이 작품을 읽는 어른들은 이런 고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복지는 인간의 품위를 지켜주는 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혹자는 언더 도그마를 거론하며 그들이 선하지 않은데 어떻게 나라가 그들의 삶을 보장하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복지는 선한 자를 위해 실천하는 게 아니라, 사회를 더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사회 안전망이라고 답하겠다.


학급문고 책장에 도서관에서 지원하는 책과 내가 지금까지 차곡차곡 모은 아동청소년 도서가 가지런히 꽂아두었다. 클로버에도 내 이름 스티커가 붙어 학급문고에 자기 자리를 마련할 거다. 담임이 가져왔다는 이유만으로도 학생들은 다른 책보다 조금 더 흥미를 가지게 된다. 이 책이 학생들로 하여금 치열하게 고민하며 읽는 책이 되면 좋겠다. 정인이의 곁에서 정인이가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지켜보고, 나라면 어떤 선택을 내릴지 고민하며 자신의 삶을 어제보다 조금 더 뚜렷하게 만들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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