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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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라진 소녀들의 숲」은 조선 초를 배경으로 하는 추리소설이다. 천선란 작가가 추천사에 에놀라 홈즈를 언급하여 제법 기대감을 안고 읽기 시작했다.

어떤 작가들은 독자가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하면 불쾌해한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작가가 아니고 독자인지라 이후 전개를 대강 짐작할 수 있으면 큰 즐거움을 느낀다. 이번 책은 그런 종류의 책이었다. 읽는 동안 큰 부담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인공 민환이는 조선 최고의 수사관인 아버지의 뒤를 쫓아 자신이 나고 자란 제주로 향한다. 제주에 남겨두고 온 동생 민매월을 만난 민환이는 제주에 묻힌 아버지의 행방을 쫓고 이들 부녀가 얽힌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뒤틀렸던 자매의 관계는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회복되고 민환이는 누군가의 말을 따라서 살기보다 자신의 뜻대로 사는 이로 거듭난다.

첫째와 아버지 사이는 참 역동적이다. 첫째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 의지하고 싶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와의 투쟁을 통해 어른으로 거듭나고 싶다. 태양은 빛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림자를 상징하기도 한다. 관점에 따라 참 구식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지나는 첫째와 아버지 사이는 어찌되었든 인간과 태양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민환이에게 있어서도 아버지는 태양이다. 삶의 지침, 길잡이, 인정 욕구와 뛰어 넘어야 할 사람. 하지만 작중 사건을 겪으며 절대적이었던 아버지의 위상은 흔들린다. 빛은 필연적으로 그림자를 동반한다. 아버지에게 동생 매월이는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을 거다.

모든 인간은 좋은 인간일 수 있지만 완벽한 인간은 될 수 없다. 이 사실을 절절히 깨달은 다음에야 첫째와 아버지는 동등한 인간으로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었던 일도 용서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없던 점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환이와 매월, 두 자매는 아버지의 유산인 서로를 마주하며 상대를, 자신을, 이윽고 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기대받는 첫째(특히 장녀)가 읽는다면 위안이 될 거다.


분명 흥미진진하게 읽었으나 아쉬운 점도 존재한다. 다른 독자의 감상이 궁금해 검색을 해보니 내가 느낀 바를 짚으신 분들이 많이 계셨다. 세종 시기에 쓰인 이름이라고 하기에는 몹시 현대적인 이름,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문 촌장의 욕망, 어사의 존재...

모든 역사물이 철저하게 고증을 할 수는 없다. 당연하다. 그렇지만 역사물에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고증할지 정하는 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역사물을 만들거나 감상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 고민을 작년부터 해왔다. 어떤 것을 고증하고 어떤 것을 고증하지 않을 것인가. 고증할 것은 무엇인가. 어디까지 고민할 것인가.

암행어사가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8기통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팔도를 누빌 수는 있겠지만 국왕 직속 관리인 만큼 왕실과 나라에 충성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역사물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어떤 사고관과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지 담아내는 게 매우 힘들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된다. 현대인의 사고관을 담아내면 그건 배경이 조선시대일뿐, 당대를 담아낸 작품이라 보기 어렵지 않을까.

그럼에도 우리 역사에 주목하여 쓰여진 좋은 소설이다. 공녀 제도를 비롯해 당시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하며 같이 읽으면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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