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지만 우아하고, 품위를 지키는 삶을 다루는 작품은 꾸준히 있어왔다. 어떤 조건,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지켜야 하는 선을 지키며 살 것. 정인이는 가난 앞에서 마음이 무너지려고 할 때마다 '정직한 에이브' 이야기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아무리 태주가 정인을 괴롭히더라도 그 의기만큼은 해칠 수 없었을 거다. 품위는 세우는 것도, 해치는 것도 온전히 주인의 몫이다.
품위를 위선이라 치부하며 그 가치를 깎아내리는 풍조가 전에 비해 만연한 시대다. 돈이나 계급(이 둘은 사실상 동의어라고 봐도 되겠다.)이 보장만 된다면 옳지 않은 일도 어떻게든 가치로운 일이 된다. 착하게 사는 것은 속된 말로 '호구'의 행동으로 평가받고, 규칙을 지키면 바보 같은 짓을 한다고 비웃음을 산다. 가난은 빈자로 하여금 호구처럼 살지 말라고, 위선적으로 살지 말라고 끊임없이 유혹한다.
선량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을 위선자라고 비웃는 이들은 정인이의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할까? 정인이가 자신을 부당하게 해고한 수제버거집 창문을 깬 것을 '사이다'로 고평가할까? 나중에 수제버거집 주인에게 창문을 깨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이를 변상하러 가겠노라 다짐하는 모습을 보고 '고구마'라고 답답해할까?
내가 뭐라고 독자의 감상을 제한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이 작품이 최소한 그렇게 읽히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갸륵한 시선으로 정인이를 바라보는 사회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정인이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의 품위를 되돌아보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낡은 운동화, 겨울 코트 하나로 타인의 가난을 재단하고 삶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어떤 삶이 스스로를 인간답게 만드는지 자문하기를 바란다. 자신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삶이 어딘가에 있다고 (제발)간접적으로라도 알기를 바란다.
「클로버」가 반가운 까닭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근래 출간되는 작품들을 읽으며 중산층으로 살며 가난을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다루는 가난은 유리바닥은커녕 바닥조차 가지 않았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계약직 행정사무 보조로 지내며 복사기, 물티슈, 커피 필터를 담당한다는 이유로 불가촉천민이 된다는 게 이런 거'라고 말하는 시각에 갇힌다면 정인이가 복지관에서 받은 쌀과 라면이 왜 빌어먹을 것인지 어렴풋하게도 짐작해낼 수 없을 거라고 감히 짐작한다.
인간의 품위는 고급 겨울 코트 한 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삶의 갈림길에서 수없이 고민한 끝에 내린 스스로의 선택으로 세워지는 거다.
그렇다면 선택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 되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