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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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은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가?​>

대구시의 동부서 형사과에 살인사건 신고 전화가 들어온다. 피살자는 민요섭. 누군가의 칼을 맞고 살해된 것이다. 그 사건을 맡은 남 형사는 민요섭을 키워준 할머니 집에서 민요섭이 쓴 원고 뭉치를 발견하고 수사에 참고하기 위해서 가져온다.



로마 제정 초기 옥타비우스 아우구스투스의 시절, 어느 날. 베들레헴 마구간에서는 ' 예수'가 태어나고 같은 시각 벧엘 부근의 한 샴마이학파 율법사 집에서는 '아하드 페르츠’가 태어난다.

아하드 페르츠는 태어나자마자 걷고 말할 수 있었다. 놀라운 기억력과 총명을 타고난 아이는 장차 꿈이 이 땅에서 가장 우러름 받는 랍비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라면서 자신들의 신 야훼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급기야 인간의 고통을 해방 시켜줄 빵과 기적과 권세의 신을 찾아 나선다. 이집트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신 찾기는 바벨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수호신, 인도의 불교까지, 수천의 신들로 이어지며 그 교의들을 익힌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든 신들의 불합리와 악덕과, 부패와 타락에 더 많은 실망을 하고, 마지막으로 로마로 발길을 돌린다. 거기에서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는 한 무리를 만난다.




아이러니하게도 별로 배운 것도 없는 그 무리의 한낱 가벼운 말다툼에서 크게 진리를 깨달은 아하스 페르츠는 고향 유대로 돌아간다. 그리고 광야로 가서 단식과 묵상에 잠기며 참된 신의 부름을 기다린다, 40일째 되던 날, 마침내 '위대한 신성'의 음성을 듣고 직접 대면하여 하루 낮 하룻밤을 함께 긴 이야기를 나눈다.

위대한 신성과 헤어져 광야를 벗어나려던 그는 광야의 다른 쪽에서 기도하고 있는 야훼의 아들 예수를 만난다. 그곳에서 사람의 아들인 아하스 페르츠는 세 번에 걸쳐 야훼의 아들을 시험한다. 빵과 기적과 권세를 가지고 유혹하는 사람의 아들을 야훼의 아들은 위대한 신성의 말씀으로 물리친다.

그러고도 그는 다섯 차례를 더 예수와 만남을 가지는데 그 마지막이 예수가 처형되는 날 해가 가려지던 낮 열두시에서 오후 세시까지의 암흑으로 만난다.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사탄>이었다.

그러나​ 원래 그 둘(사람의 아들과 야훼의 아들)은 하나다. 단지 인간에 의해서 그 둘은 선과 악으로 나누는 이분법이 생겨났을 뿐.

민요섭의 원고 속 인물, 아하드 페르츠는 바로 민요섭 자신이며 오롯한 자신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민요섭은 전쟁고아로 외국 선교사의 양자다. 일류 중, 고등학교를 나와 명문 대학교에서 이 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다가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뛰어난 성적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삼학년에 올라가자 갑자기 성적이 뚝 떨어지고 휴학, 급기야는 퇴교로 끝낸다. 그가 경험한 신학교와 교회 목사들의 불합리는 급기야 자기가 믿는 신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분노를 느낀 그는 실천신학에 몰두하게 되고 교회를 떠난다. 마침내 양부의 재산은 물론 자신이 버는 돈마저 이웃을 위해 모두 쓰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으로 사랑을 실천한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회심을 하고 다시 기도원으로 들어와서 기도에 전념하게 되는데, 그의 회심에 대한 계기는 이 책에 확실히 밝히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낙서장과 소설의 원고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이제 너는 신앙할 수 있다. 절망했으므로, 살 수 있다. 죽었으므로."

자아에 대한 절망, 또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절망을 느낀 그는 지적 오만, 독선, 편견, 허영 같은 것들을 죽이고 진정한 신앙인으로의 회귀의 고백이자 결의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p.40-41)

우리는 '신 안에'남아 있었어야 했다고, 불합리하더라도 구원과 용서는 끝까지 하늘에 맡겨두어야 했다고, 그러고는 단정했소. 우리는 무슨 거룩한 소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새로운 신을 힘들여 만들어냈지만, 실은 설익은 지식과 애매한 관념으로 가장 조악한 형태의 무신론을 얽었을 뿐이라고, 우리가 어김없이 신이라고 믿었던 것은 기껏해야 저 혁명의 세기에 광기처럼 나타났다가 조롱 속에 사라진 이성신이거나 저급하고 조잡한 윤리의 신격화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런 다음 과장된 참회와 더불어 십자가 아래로 돌아가겠다고 했소.

p.389

​한편 민요섭을 신처럼 따르며 그의 신앙관을 온전히 이어받았으나 갑자기 변해버린 민요섭의 신앙관에 동의하지 못했던 조동팔은 배신감과 허탈감에 민요섭을 살해하고 자기도 독극물을 먹고 자살한다. 그도 나름대로 새로운 경전을 남기는데, <쿠아란타리아서>. 바로 그들이 바랐던 신, 그들이 만든 신의 경전이다.




책속의 인물, 아하스 페르츠의 질문은 곧 민요섭의 질문이며 또 나의 질문이다. 역시 "해아래 새것은 없나니…."라는 성경 말씀이 절감된다. 그동안 하나님에 대한 나의 부정과 갈등과 의문도 이미 오래전 우리의 조상들이 했던 것들이었다.  신을 찾아 떠난 그의 여행, 또한 나의 여행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의 독서도 바로 신을 찾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시작된 의문들은 너무나 많았다. 성경의 불일치에서부터 성경의 무오설, 하나님의 사랑, 자비, 용서, 완벽성, 예정론, 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최고의 불경한 질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난해하기만 한 성경을 손에서 놓고 조직신학에 관심을 가졌고 새로운 해석의 유튜브 동영상, 신학자들의 말들에도 귀를 기울여 보고 기존의 설교를 뒤집는 설교 집들도 읽어보았다. 철학서를 뒤적였고, 인문학, 문학에서 그 답을 찾아 헤매었고, 지금까지도 그 과정은 진행 중이다. 그런 내 눈에 이 책의 제목이 바로 눈에 뜨였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이미 다섯 번째 출판으로 25년 은경축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처음 접한 책이다.

생각 해 보건데, 신앙에 대한 나의 오랜 갈등과 물음이 "해를 더 많이 알고 싶어서 확실하게 해를 보려다가 두 눈이 멀어버린 장님"과 같은 어리석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이 진리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믿어 버리는 것과 "아니다"라고 한 번쯤 뒤집어 보고, 고민해 보고, 체험 해보고 난 뒤 깨닫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내 신앙이 확실하게 꽂꽂이 섰다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그래도 "피상적인 경전 해석이나 이 시대에 유행하는 편견과 오류에서 자유로워지기만 하면 반드시 부딪히게 될 의문일 뿐이다."( p.113)라는 말과 "부정은 확신하고 긍정하기 위한 것."(p.116)이라는 말에 힘입어서 나름대로 나의 비틀거리는 신앙을 합리화 시켜본다.

그러면서 나는 오늘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지혜로워진다"는 말을 마음에 담는다.

얘야, 너는 인간의 앎과 슬기를 지나치게 믿는 것 같구나.

하지만 언제나기억해라.

아무리 큰 앎과 슬기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산술처럼 풀어낼 수는 없는 것,

그분을 믿는 것이 지혜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지혜로워진다는 것. 그리고

과도한 지식으로 종종 우리의 믿음과 경건을 해치게된다는것을.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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