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호랑이
네주 시노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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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성적 학대 피해자의 회고록, 이라는 단순한 말로 이 책을 규정하지 못하겠다. 더 깊은 지점까지 끌어들이고 평면적으로 바라보던 세계를 확장시킨다.

새로운 형식의 증언문학이다.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다른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을 매개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생존자 혹은 피해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보호자가 되기를, 침묵 속에 있던 호랑이를 우리 밖으로 끌어내는 목소리가 되기를.

문학에 관한 자신의 역량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문학은 구원의 도구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겪은 일을 다면적으로 분석해내는 수단이 된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비추어 강간범 의붓아버지의 사고방식을 해부하고 추적해본다. 침묵을 깨고 그의 행위에 관해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자신을 에두르고 있던 세계를 부수는 일이다. 작가는 다시 또 잃어야 하는 것들도 담담히 말한다. 단란한 가족이나 살았던 고향, 어린 시절 추억과 관련한 것들.

이 책의 제목에 들어있는 ‘호랑이’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가져왔다. 시 속에서 창조신은 호랑이를 만들고 어린양도 빚어냈다. 작가는 강간범을 호랑이라 칭하며 “나를 강간한 자와 나는 같은 흙으로 빚어졌을까? 어떤 점에서 우리는 서로 비슷할까? 내가 그를 이해할 가능성이 정말 있을까?”(p.245)라고 끊임없이 사유한다. 독자 역시 작가가 계속해서 물어오는 것에 관한 답을 찾고 통찰하게 만든다.

단순히 선악,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누고 회복탄력성, 극복, 새로운 삶에 대한 찬미로 가득한 책이 아니다. 파편이 된 기억들을 증거와 하나씩 맞추어보며 적나라게 드러낸다. 어둠, 악의 흔적이 얼마나 끈덕지게 삶을 위협하는지, 읽히기를 원하지 않지만 기어이 글로 남기는 것에 관해 숙고하는 과정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문학에서 흔히 성폭력 피해자들을 그리는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인 시선을 비판하기도 한다.

또 “생존자의 신화”가 종용하는 해피엔드에 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압적으로 삶을 휘젓는 사건이 있었고, 시간은 계속해서 순환한다. 이미 ‘사건’이 일어났고, “지상에서 그런 일을 겪는 아이가 있는 한,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p.115-116)
“그 일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그 소녀는 나고, 그 일은 지금의 일이다.“(p.77)

읽다보면 부조리한 것들을 더 부추기는 사회, 무감각함에 분노하게 된다. 형을 살았으니, 죄값을 치뤘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또 새롭게 삶을 살고 가정을 일구고 가족사진을 찍는 의붓아버지의 근황까지 읽고 나면, 작가는 담담하더라도 읽는 자는 분기로 타오른다.

그러나 작가는 누구나 어떤 경계에 설 수 있음을 말한다. ”마음에 품은 욕심을 실행에 옮기는 것의 의미“(p.345)를 언급하면서 정상세계를 벗어나 ”딴 곳“에 이르게 하는 모종의 음험한 속내가 존재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그것을 저지하는 호의가 존재하는 것도 믿는다고 덧붙인다. 말미에 당부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그 경계에서 결코 “떨어지지 말라, 떨어지지 말라, 떨어지지 말라.”(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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