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죔레는 거기에 ㅣ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평점 :
#도서협찬 #서평단
헝가리 역사에 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다소 어렵게 느껴질 내용이지만, 유려한 번역이 완독으로 이끌어준다. #노벨문학상_수상_작가 이기에 약간의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책을 받아들었다. 글의 난해함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죔레’라는 사랑스러운 강아지의 행방에 몰두하다 보니, 음률이 느껴지기 까지 하는 작가의 문장에 익숙해졌다. 한 두 문장만으로 각 장을 완성한 소설이라는 소개에 겁 먹을 필요가 없었다. 마침표가 없다 뿐, 주인공 카다 요제프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하는 흐름에 익숙해졌다.
대를 이어 죔레는 죔레가 된다. 선대 죔레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나면 다시 이 요제프의 곁을 지키고 집을 지키는 후대 강아지 역시 ‘죔레’가된다. 죔레의 자리는 항상 거기이다.(p.108)
은퇴 노인 카다 요제프는 이 죔레와 산 속의 작은 집에서 허허롭게 살아왔다. 아내 일리아를 먼저 여의고, 딸 가족과도 딱히 왕래하지 않는다. 어느 날, 이 요제프를 두고 폐하라 칭하며 섬기겠노라 한 무리의 왕정복고주의자들이 들이닥친다.
요제프의 사사로운 과거와 헝가리의 역사와 마을의 사정, 왕정복고주의자들 면면의 이야기들이 얽히며 11장을 가득 채운다.
지나간 연인과 시인의 아름다움과 시를 열렬히 칭송하기도 하고, 향수에 젖어 음유시인의 기타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이 음유시인의 이름은 작가와 동명이다. 어떤 의도와 의미가 숨겨져 있는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독서모임이나 북토크가 있으면 좋겠다.
폐하 대신 ‘요지 아저씨’로 불리기 원하는 요제프는 사실 군주제를 복원하는 일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모든 수순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식에 의거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목적과 명분에 눈 먼 자들에게 쓰이고 마는 요제프의 삶은 이제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휘말려 전복되는 삶은 씁쓸하다. 정치는 살아있는 것, 거듭된 반복의 역사, 현실과 소설이 섬세하게 교차되는 순간들에서 애감을 느꼈다. 또 중간중간 요제프의 입을 빌려 환경 오염과 (노인)복지, 경제와 같은 현실적인 사안들을 짚어가는 장면들에서 작가 가진 문제의식과 그것들을 풍자해내는 힘을 느꼈다.
죔레를 향한 사랑 고백, 테라스에서 노을을 관조하는 모습과 같은 서정적인 장면들은 먹먹하게 만든다. 끝까지 요제프의 곁을 지키는 죔레, “기쁜 흥분에 떨고 있는 죔레를 꼭 끌어안은 채, 함께 열린 창으로”(p389) 향하는 장면이 인상깊다. ‘열린’ 창에 방점을 찍고 읽었다. ”꽉 잡아“(p.389) 라고 죔레에게 속삭이는 요제프는 분명, 함께 비로소 자유로워질 것이다.
다면적인 모습을 가진 인간과 삶에 관해서 풍자하고 은유하며 생각할 거리들을 쉼 없이 제공한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연약한지 그러나 또 얼마나 강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