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크리스찬 디올과 뉴 룩 - 크리스찬 디올의 젊은 날 이야기
정진주 지음 / 작가의펜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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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악마와 크리스찬 디올과 뉴룩

정진주
작가의 펜

세계경제 대공황 시기때문에 장기적인 실업신세와 아버지의 사업부도로 한 때 갤러리를 운영하며 잘 나갔던 때에서 경제적인 몰락으로 인해 끼니걱정을 하게되었고 이후 2차세계대전을 겪은 크리스챤 디올은 프랑스에서 독일의 식민통치아래서 살았고 징집이 되어 전투병으로 투입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다행이랄 순 없지만 가지고 있는 결핵이라는 병때문에 2차 보충역으로 배정되어 농업의 노동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이런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도 디올은 절망하지 않았고 주변의 좋은 친구들의 격려와 지원덕분에 조금씩 일어설 수 있었고 배우고 싶었던 미대건축과의 전공을 부모님의 반대로 진학할 수 없었고 관심이 없는 정치학도로 진학했지만 가지고 있는 소질들을 통해서 독학과 친구의 도움으로 의상디자인을 할 수 있게되었고 이후에 자신의 디자인이 잘 팔리는 수준에 이르게 됐다.
독일의 식민통치 하에 프랑스의 자랑인 맞춤복 디자인 등의 전문적인 사업을 독일에서 가져가 자국에서 부흥시키려 했던 일도 있었으나 크리스찬 디올과 그의 벗 피에르 발망의 스승인 를롱의 용단과 디자이너들의 저항으로 그것만은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기도 했다. 를롱의 작업실에서 일하는 직원이자 제자격이었던 두 사람 중 피에르발망이 먼저 독립하여 자신의 작업실을 차렸고 2년 후에 디올도 자신의 작업실을 꾸려 독립하기도 했다.

당시에 디올의 친구 중에는 피에르 발망 외에도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디올처럼 정치학을 전공한 프라다도 있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의 유명 의상브랜드들이 20세기 초중반에 설립되어 부흥되어 온 것이었다. 디올의 인복은 타고난 듯 싶다. 물론 그의 인성도 한 몫을 했을터인데 그의 가정의 몰락 즉, 아버지의 사업부도, 막내동생의 정신병으로 인한 감금, 그 이후 절망적인 현실로 인한 어머니의 죽음, 여동생이 독일식민지하에서 활동한 레지스땅스 이후의 거식증으로 인한 간병경험 등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딛고, 절망하지 않은 면면을 톻해 디올에 반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프랑스의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디자이너들이 협력하여 패션쇼를 연 것이 포문이 되어서 의상브랜드로서의 이미지와 전문성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고난 속에서 꽃피울 때에 진정 향기다운 향기를 낼 수 있었던 것으로 크리스찬 디올과 그의 스승 를롱과 주변의 열렬한 지지자들과 디올을 비롯한 발렌시아가, 프라다, 조르지오아르마니, 까르띠에, 피에르 발망, 니나리찌, 에르메스, 반 클리프앤 아펠과 같은 현재 유명해진 당시의 디자이너들의 나름의 인생의 굴곡을 지나 인내를 가지고 결실한 결과가 오늘날의 프랑스발 명품이 아니겠는가.
그런 것을 볼 때 명품은 공연히 명품이 아니며 그만한 가치를 인정받을만한 뭔가가 있었단 증거이다. 다소 명품을 부의 자랑과 허영의 소산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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