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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만든 세계 - 통화·공급망·기술을 둘러싼 패권전쟁
유재일 지음 / 김영사 / 2026년 8월
평점 :

『미국을 만든 세계』는 은에서 시작해 자본과 금융으로,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고, 그 과정에서 패권국이 탄생했는지를 보여준다.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흥미롭게 느낀 것은 세계사의 주요 사건들이 서로 동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돈과 자본, 기술과 군사력, 국가 권력이 서로 연결되면서 다음 패권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1장은 근대의 달러라고 할 수 있었던 은에서 시작한다. 은은 대륙과 대륙을 연결하는 매개이자 당시의 기축통화 역할을 했다. 은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은 자연스럽게 해양 패권을 둘러싼 전쟁으로 이어졌다.
당시 세계 은 생산량 2위였던 일본 역시 은을 바탕으로 대항해 시대의 흐름에 뛰어들었고, 무기를 확보하며 동북아시아의 패권 경쟁에 나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선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을 단순히 조선과 일본의 전쟁으로만 보지 않고, 전통적인 무기에서 열병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전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흥미로웠다. 일본은 화약의 원료인 염초를 수입해야 했던 반면, 조선은 화포를 만드는 주물 기술과 화약을 만드는 자조법을 발전시켜왔다. 그 결과 해전에서는 조선의 함포가 위력을 발휘했고, 육상에서는 일본의 조총이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전쟁 하나를 바라보더라도 그 뒤에는 당시의 기술과 자원, 무역과 국제관계가 함께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을 매개로 일본과 유럽인이 교역했던 ‘남만 교역’에서 이후 ‘데지마 무역’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흥미롭다. 해금 정책을 펼치던 명나라와 포르투갈·스페인 사이에서 이루어진 중계무역은 당시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고, 시차를 두고 조선에도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문명이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은은 자본과 신용으로 진화한다. 그렇게 은화는 단순한 화폐를 넘어 자본과 신용이라는 새로운 힘으로 발전한다. 채권과 주식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금융 시스템이 등장하고, 화폐는 결국 ‘신뢰’라는 형태로 진화한다.
자본을 굴려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부를 증식하는 거대한 흐름의 중심에는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국민국가를 선언한 네덜란드가 있었다. 특히 동인도 회사의 신용과 자본을 바탕으로 네덜란드가 해상 무역의 패권을 거머쥐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전쟁 역시 단순한 무력 충돌만으로 볼 수 없었다. 해양 패권과 금융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었다. 명예혁명 이후 네덜란드의 자본을 끌어들여 힘을 키운 영국은 결국 네덜란드를 넘어섰고, 네덜란드는 서서히 패권 경쟁에서 이탈한다. 이후 영국은 스페인에 이어 바다의 강자로 떠오르고,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면서 새로운 도전자 프랑스를 상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자본과 군사력, 그리고 공급망의 결합이다. 자본이 단순히 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과 국가 권력, 공급망과 결합하면서 해양제국의 힘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책을 통해 펼쳐진다. 앞으로 세계의 패권이 어떻게 이동해가는지 더욱 궁금해지는 지점이기도 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세계의 질서를 다시 한번 바꿔놓았다. 유럽에서 발생한 버블과 공황은 미국으로까지 영향을 미쳤고, 위기 속에서 몰락하는 자본이 생기는 한편 살아남은 자본은 더욱 집중되며 급성장했다.
여기서 개인적으로 의외였던 것이 『오즈의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나는 『오즈의 마법사』를 그저 신비롭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로만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당시의 세계사와 미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배경으로 바라보면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미국의 정치와 경제 현실을 풍자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어린 시절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 하나에도 그 시대의 역사와 사회적 맥락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제2차 산업혁명으로 대규모 고용과 소비가 발생하면서 세계는 20세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석유와 전기의 등장은 물질문명의 판도를 바꾸었고, 기술의 도약은 다시 새로운 자본 축적을 만들어냈다. 결국 기술은 새로운 부를 만들고, 새로운 부는 다시 패권을 움직이는 힘이 된 셈이다. 전기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테슬라와 에디슨 역시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는 한 부분일 뿐이었다. 개인의 발명과 기술 경쟁을 넘어 금융 자본이 에너지 패권을 장악하는 과정이 이어지고, 독점과 정경유착이 극에 달하는 가운데 자본의 집중과 제국주의의 팽창, 사회주의 세력의 확대가 동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미국이라는 압도적인 단일 패권국이 등장한다.
16세기 대항해시대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 뒤를 이은 네덜란드, 산업혁명을 거쳐 금융 질서를 완성한 대영제국, 그리고 20세기의 미국. 이렇게 패권의 역사를 바라본다는 건 뭘 의미하느냐?
책을 따라가다 보면 세계사의 흐름이 결국 부와 지배의 이동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패권의 변화에는 수많은 요인이 작용하지만, 이 책은 그 가운데 자본과 기술, 군사력과 국가 권력의 결합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026년의 세계 역시 전혀 다른 시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처럼 물리적인 군사력만으로 패권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비군사적 수단이 동시에 결합되는 복잡한 경쟁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까?
저자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원가 경쟁력’을 바탕으로 성장해왔지만, 반도체의 성과에만 도취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AI와 첨단기술의 시대에 구시대적인 제도가 새로운 도약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며,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부분에서는 나 역시 최근 세계의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가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가 말하는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표현도 그래서 더욱 눈에 들어왔다.
결국 흐름을 바꾸는 것은 사람이다. 저자는 이책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세계의 중심에 섰는지를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은에서 시작해 자본과 금융으로, 금융에서 산업과 기술로, 그리고 기술에서 다시 새로운 자본과 패권으로 이어지는 세계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 달라진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전쟁과 산업혁명, 기업의 성장과 금융의 발전이 각각 따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패권을 차지한 국가들은 끊임없이 도전하고 개척하고 새로운 기회를 선점해왔다.
결국 변화의 흐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흐름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에 도전하며, 어떻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갈 것인가일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저자는 지금까지 세계의 패권이 어떤 흐름을 따라 움직여왔는지를 세계사라는 틀에만 가두지 않고 부와 지배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낸다.
도전하고, 개척하고, 도약하는 진취적인 자세가 흐름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움직이는 방향이 어느 순간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세계의 패권을 만들어온 수많은 변화의 역사를 바라보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와 앞으로 만들어갈 미래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