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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보는 그림 - 매일 흔들리는 마음을 다독이는 명화의 힘
이원율 지음 / 빅피시 / 2025년 4월
평점 :

"삶이 당신을 쓰러뜨릴 때, 예술이 당신을 일으켜 세운다."
-구스타프 클림트-
책의 제목을 보고 앞표지에 쓰인 클림트의 문장을 보니 이건 나를 위한 책인가보다 싶었다. 그림에 문외한으로 살아온 세월이 길지만 한 때 정말로 삶이 나를 쓰러뜨릴 뻔했던 순간에 나를 조용히 붙잡아준 그림 한 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림을 포함한 예술을 여유있는 사람이, 여유있는 순간에 누리는 사치의 영역이라고 생각한 때도 있었는데, 알고보니 예술은 생을 지속하기 위한 몸부림이자, 응급처치이기도 했다.
이 책은 목차만 보아도 마음을 추스리는 데 도움이 될 정도로 소제목들이 어여쁘다. 그중 <3장 버텨야하는 순간>은 "슬픔은 깊이를 만들고 아픔은 강인함을 만든다."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데 참 아름다운 문장이다. 이 문장처럼 녹록치 않은 인생을 통해 '깊이'와 '강인함'을 선물 받은 열 여덟명의 화가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통해 나는 잔잔한 위로와 중년기에 필요한 지혜를 얻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생
암수술 후유증으로 관절이 자유롭지않게되자 손가락에 붓을 묶고 그림을 이어갔던 마티스는 이후 약해진 폐로 인해 물감을 쓸 수 없게되자 가위로 색종이를 오리면서 창작활동을 이어간다.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던 모네는 그래도 붓을 놓지않았고 말년에 백내장수술 후유증으로 사물이 시퍼렇게 보이는 청시증을 앓았지만 이 또한 받아들이며 새로운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일생 서른 다섯 번의 수술과 두 번의 유산, 오른발의 절단에도 프리다 칼로는 꺾이지 않고 끝끝내 삶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예술을 포기한다해도 아무도 이상히 여기지 않을 순간들에 그들은 '오히려' 붓을, 가위를, 자신의 생을 움켜쥐고 살아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위대한 예술이 되었다. 삶에서 때마다 마주하는 풍랑에 꺾이지 않고 헤쳐나가는 몸부림은 그 모두가 위대한 작품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는 생에 대한 애착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일 것이다.
"신은 그녀에게 무자비했다. 하지만 칼로는 굴복하지 않았다. 배 앞머리가 파도를 마주해야 침몰하지 않듯, 그녀는 밀려오는 풍랑을 당당히 직시했다. 휩쓸리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채 파도를 타고 헤엄치는 법을 익혔다. '결국'으로 끝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삶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생으로 바꾼 것이다. "

'결핍과 약점'을 예술의 동력으로
너무나 내성적이라 상대의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었던 헤르메스회는 오랜 유학생활로 기진맥진하여 방에서 가만히 시간을 보낼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집의 내부와 아내를 주로 그리게 되었고 이 '싱거운 일상'의 회화로 인해 그는 가장 존재감 있는 위로의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어머니 수잔 발라동의 무관심과 부재로 외로움과 결핍에 시달렸던 모리스 위트릴로는 알코올중독 치료를 위해 그림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미술을 통해 깊은 상처와 외로움을 넘어서 평정에 이르게되고 그 회복의 여정은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남겨지게 된다.
폭언과 다툼이 만연하는 가정에서 움튼 잭슨 폴록의 불안은 알코올 중독으로 더욱 커져 그를 삼킬 지경이 되었지만 폴록은 이 불안과 극단의 감정을 예술의 연료로 삼았다.
되돌아보면 사실 예술가에게는 그들이 가진 것 그대로가(심지어는 결핍마저도) 가장 좋은 소재이자 동력임을 보게된다. 나의 삶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어가고 있다면... 그 작품에는 내가 가진 것 외에 더 필요한 것이 없을 게다. 그것이 때로는 불안과 결핍, 상처일지라도 그마저도 오히려 좋은 연료가 될 것이다.
"폴록을 정상으로 이끈 것도, 파멸로 이끈 것도 불안이었다. 이 감정은 그에게 고통을 안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깨어있게 만들었다. 불안이 준 극단의 상태 덕에 되레 여러 명작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의 생은 마음 속 여러 감정을 어떻게 해야 삶의 동력이자 영감의 원천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지를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모리스 위트릴로에 대해 한번 더 언급하고싶다. 사생아였던 수잔 발라동의 사생아 아들, 어머니로부터 외면당한 오랜 시간, 어머니로 인한 기묘한 관계들... 사실 원망과 미움으로 충만하더라도 만인이 이해할 수 있는 생이었지만 그는 미움으로 자신의 삶을 소진하지 않았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로 괴로워하기를 멈추고 묵묵히 몽마르트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내었다. 소중한 삶을 미움이나 원망으로 소진하지 않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로 괴로워하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면 삶은 언젠가 내게도 꽤 괜찮은 길을 열어줄 것이다.
"마흔 무렵이 되면 초연해질 줄 알았습니다. 언제나 의젓하고,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여린 꼬마가 웅크려 있고, 그 옆에는 아직도 세상 모든게 서툰 청년이 서성이고 있다는 것을요. 이렇게 인생의 이치에 실망감이 밀려오면, 저는 예술을 통해 마음을 다독이곤 합니다. "
- 이원율/ 마흔에 보는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