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이름 붙이기 -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할 때
캐럴 계숙 윤 지음, 정지인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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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 밀러가 우리에게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알려준다고 한다면, 캐럴 계숙 윤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이야기 한다.이렇게 말하면 얼핏 서로 모순처럼 들릴 것도 같은데, 사실 둘 다 폭압적인 도그마를 거부하는 상보적 관점이며, 서로 어우러져 더 완전한 원을 이루는 반쪽이자 거울상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아쉽게도 <물고기는 존재하지않는다>를 읽어보지 못한 채 이 책을 읽게되었지만 이 책이 주는 임팩트와 흥미만으로도 충분히 분류학에 대해, 생명 세계에 대해, 과학과 움벨트에 대해 다각도로 들여다보고 즐거이 음미할 수 있었다. 분류학에 대한 책이 이렇게나 흥미로운 수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 그러면서 이 책은 과연 어느 영역에 속하는 글일까를 한번씩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쉬이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저자가 사랑하는 이명법에 따라보자면 분류학 에세이, 또는 분류학 변천사 정도로 볼 수도 있겠으나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 분류이다. 소소하지만 생물만이 아니라 무생물인 책도 자연스럽게 익숙한 기준 가운데 분류하고자하는 내 안의 인간 본성이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저자는 린나이우스(나에게는 린네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지만)를 통해 체계화되고 확립된 전통분류학이 이후 다윈을 통해 진화분류학으로 나아가게되고, 이후 수리분류학의 공격과 공생, 분기학의 맹렬한 조롱과 파괴 속에서 살아남아 알파분류학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매우 상세한 스토리텔링 가운데 흥미진진하게 전달해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전통 분류학이 생성되게 한 원동력이자 핵심기준이 되어준 자연과 생물세계에 대한 인간 본연의 감각과 비전을 움벨트로 지칭한다. 


움벨트는 글자 그대로 '환경' 또는 '주변세계'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이지만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그 단어로 더 구체적인 무언가를 가리켰다. 이 생물학자들에게 움벨트란 지각된 세계, 즉 한 동물이 감각으로 인지한 세계를 의미한다.  

자연에 이름붙이기, p.35

저자는 분류학의 변천 역사를 이러한 생명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인간 특유의 시각이자 직관적인 감각체계로 설명될 수 있는 '움벨트'와 실험과 데이터로 무장한 '현대과학'의 싸움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2세기가 넘도록 진행된 그 싸움 가운데 움벨트에 기반한 직관에 의존하여 세워진 전통분류학이 끊임없이 공격받고 조롱받아왔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마침내 빌리 헤니히의 방법론에 근하여 분류학을 재정의하려는 급진적인 분기학파에 의해 물고기는 하나의 분류군의 인정할 수 없는 존재라고 선포되고만다. 분기학파의 이론에 의하면 물고기가 없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새는 공룡에 속하고 얼룩말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는 그들이 주장하는 과학적인 이론에 의하면 진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타고난 감각과 특유의 움벨트를 지닌 인간이 받아들이는 실제세계와는 괴리감이 크다. 이에 저자는 엄연히 존재하는 생명세계를 무시하고 과학의 시각만을 신봉하고 따를 필요는 없다라고 결론짓는다. 

과학은 과학대로 생명세계를 탐구하고 체계화해가겠지만 우리는 움벨트에 기반한 각자의 감각을 통해 생명세계를 탐조하며 마음껏 누리고 돌보라고 한다. 현대과학이 실행하고 있는 개념의 추구가 생명 자체의 추구를 압도적으로 내리눌러버린 나머지 실재하는 생명의 세계가 일그러져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선들을 그어야만하고. 일정한 인간적 방식들에 따라 선을 그을테지만. 우리끼리도 과학자들과도 항상 정확히 똑같은 선을 그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생명에서 읽어내는 세계는 매혹적인 관점들이 가득한 세계이며, 그 관점에는 과학도 포함된다.이 모든 관점 하나하나와 모든 생물을 다 유지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자연에 이름 붙이기, p.408

사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는 생명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이 과학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생명의 분류에는 과학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존재함을 알게되면서(움벨트, 민속분류학, 생명세계를 인지하는 뇌의 부분 등) 생각을 전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너무나 명확해 보이는 과학과 함께 다소 두루뭉실해보이는 움벨트 또한 생명세계를 지각하고 정의하는 중요한 관점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한다. 

더불어 과학에 모든 것을 의존하면서 생명 세계와 분리되어가는 세태를 안타까워하면서 각자의 움벨트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생명세계를 실제적으로 보고 듣고 누리라고, 생명에 대한 경이를 회복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단 하나의 해법은 없다. ... 분류는 옳거나 그렇지 않으면 틀린 것이라고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니다. ... 생물은 하나의 진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사고라는 백색광을 무수한 명암과 색조의 분류학으로 흩뜨릴 수 있는 프리즘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 p.409

생물학이나 분류학에 문외한이던 나에게  지혜롭고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통해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고 움벨트에 대해 지각하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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