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하는 미술관 - 내 삶을 어루만져준 12인의 예술가
송정희 지음 / 아트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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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조금은 특별한 영어 선생님이 계셨다. 어느날 각 반 반장들에게 선물을 주셨는데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다.(그때 선물을 주신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 중 나에게 온 것은 꽤 고급스러운 일기장이었는데 마리 로랑생의 그림들이 중간 중간 지면 가득 들어가 있었다. 너무 예뻐서 일기장으로 쓰지도 못하고 마치 전시회 도록처럼 애지중지 아껴보았던 기억이 난다. 시골 구석에서는 처음 접해보는 미술의 세계였고 내가 만난 첫 여성 화가의 작품들이었다. 그래서 미술에 문외한인 나였지만 마리 로랑생의 '키스'라든지, '샤넬의 초상' 같은 작품은 아주 친숙하고도 향수 어린 기억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보면 나는 로랑생이 그린 그림만 알았을 뿐 로랑생을 알지는 못하였나보다. 예술가의 작품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과 예술가의 삶과 철학을 아는 것은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이 책, [매혹하는 미술관]을 통해 느끼게 된 것이다.

 


[매혹하는 미술관]의 표지는 조지아 오키프의  <붉은 양귀비 No VI>가 붉은 색 바탕 위에 배치되어 그 붉은 빛깔을 뿜어내고 있다. 한 마디로 강렬하고 아름답다. 책에 담긴 12인의 예술가들의 존재만큼.

제주돌문화공원내 갤러리 '공간누보'를 운영하고 있는 저자 송정희씨는 12인의 여성 예술가들을 세밀하고도 깊숙한 눈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삶과 작품을 따스하게 조명해주고 있다.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에 대한 그녀의 서술은 유려하고도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구석이 있다. 사실 책을 읽는 속도가 느리지 않은 나이지만 이 책만큼은 슥슥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빨리 다 읽어버리기가 아까웠다기보다는 각 예술가들의 삶을 마음으로 공감하며 문장을 한번 곱씹어보게되고, 작품을 한번 더 들여다 보느라 시간이 제법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에 겨우 한 두 예술가의 삶을 들여다보기에도 마음이 벅찼던 것 같다. 이처럼 오래도록 음미하며 읽은 책은 참 오랫만이다. 송정희님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단번에 호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서평을 슥슥 써내려가기에도 역시나 참으로 쉽지 않은 책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서평은 욕심을 내려놓고 그저 이 책의 한 조각만이라도,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을 한 조각만이라도 나누려는 마음으로 최소한으로 쓰려고 한다.

이 책에 담긴 여성 예술가들은 조지아 오키프, 마리 로랑생, 천경자, 수잔 발라동, 키키 드 몽파르나스, 카미유 클로델, 판위량, 마리기유민 브누아, 프리다 칼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케테 콜비츠, 루이스 부르주아이다. 


조지아 오키프

그녀는 또한 직감적으로 꽃이 갖는 낡은 여성성을 어떻게 전복해야 할지를 아는, 붓을 든 전략가였다. 꽃의 '예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쁘다'라는 말이 갖는 고정관념과 범주화를 전복하려고 했다. 멀리서 보이는 꽃의 외형에 머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가까이서 크게 보아야 열리는 꽃의 내면세계. 그때 보이는 낯선 아름다움에 주목한 것이다. 

오키프는 뼈와 뼈 사이의 구멍을 일종의 뷰파인더로 사용해 더 추상적인 세계로 자신의 그림을 밀고 나갔다.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뼈 구멍을 통해 본 그녀의 세상에서는 언제나 땅보다 하늘이 더 컸다.


꽃을 줌인 하듯 확대하여 즐겨 그리던 오키프는 남편 스티글리츠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고 오랜 고통의 시간을 거친 후 이제는 뼈를 줌인 하듯 확대하여 그 사이의 하늘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처럼 사물을 바라보는 오키프의 시선은 남달랐던 것 같다. 시골 학교의 미술교사에 불과했던 오키프를 미국현대미술의 중앙으로 이끌어준 것은 스티글리츠였다. 그러나 스티글리츠와의 관계가 뼈 아프게 끝나고 그 상처를 끝끝내 극복해고 살아남은 오키프는 더 깊은 자신의 예술세계로 들어간다. 그 상처의 과정은 안타깝지만 오키프가 스티글리츠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더욱 깊고 넓게 세워가게 된 것은 오히려 다행이다.오키프는 추상주의라든지, 사실주의라든지 이런 화풍에 얽매일 수 없는 영혼이었다. 그녀에게 지도를 바라는 많은 화가들에게 그녀가 하는 조언은 간단했다. "마음대로 그릴 것" 아마도 이것이 오키프 자신만의 화풍일 것이다. 무언가 특별한 대상을, 특별한 기법으로 그려서 그녀의 그림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재구성하여 그렸기 때문에 특별해보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녀의 그림은 이토록 특별하다.


수잔 발라동

발라동이 1927년에 그린 자화상을 보면 화가가 된 후 그녀가 진정으로 추구한 것을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되돌려놓는 변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부풀리거나 포장하지 않았다. 그녀의 자화상은 강인하고 굴곡진 그녀의 내면을 현실적인 표정으로 살려냈다.


여성 화가가 드물던 시대에 그것도 당대의 내로라 하는 화가들이 모델로 삼았던 여인이 붓을 잡았다. 수잔 발라동, 그녀는 화가가 그리는 피동적인 대상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그리고 표현하는 그림의 주체가 된 것이다. 이것은 화가들의 시선에 자신의 이미지를 맡기듯 삶에 끌려가는 피주체가 아니라 스스로가 당당한 삶의 주체임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려지는 인생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강한 저항. 더구나  그녀는 자화상을 통해 그간 화가들이 바라본 자신의 이미지,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여인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뒤집어버린다. '자화상'이나 '푸른 방'과 같은 작품을 통해 당시 세상이 강요하는 여인의 모습을 깨부수고 '아름다워야할 의무'에 맞서 '아름답지 않아도 될 권리'를 가져도 된다고 당당히 대변해준다. 그녀는 당시에 드로잉 300점, 유화 450점, 에칭 30점에 달하는 많은 작품을 남겼고 르누아르나 드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수많은 전시회를 가졌다. 여성으로서 프랑스 최초로 국립예술협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최초의 국립예술협회 전시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세기가 지나도록 그녀의 이름은 잊혀졌다. 화가 위트릴로의 어머니로, 르누아르의 뮤즈로만 기억될 뿐. 이 또한 여성 화가로서의 슬픔의 한 단면이지 않을까 생각해보게된다. 


판위량

어린 시절 판위량은 몸종이었고 창기였다. 육체는 속박이었고 복종이었다. 나약함이고 굴욕이었다. ... 그녀가 몸종, 창기였을 때 그녀의 육체는 다름 사람을 위한 도구였다. ... 판위량은 누군가에게 소유되고 행위를 강요받는 자신의 육체를 감정과 영혼을 가진 자유의 표상으로 역전시켰다. ... 비로소 자신의 육체를 남을 위한 도구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무기로 바꾼 것이다. 

고아이자, 창기였던 판위량은 어느 연회에서 와세다 대학을 나온 엘리트 공무원 판찬화를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된다. 판찬화는 그녀의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고 그녀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결혼까지 하였다. 그리고 판위량이 문학과 예술에 눈을 뜨게 돕는다. 이후 상하이미술전문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남편 판찬화의 후원에 힘입어 프랑스로 유학까지 떠난다. 이후 파리의 리옹미술전문학교와 이탈리아의 로마국립미술원에서 배우며 서양화와 중국전통회화를 결합하여 독자적 화풍을 개척한 최초의 중국 화가가 된다. 그러나 그녀의 누드화에 담긴 솔직하고 현대적인 화풍과 창기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중국에서 활동하기 어렵게 했고 결국 프랑스로 떠나 장장 40년을 타국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에술활동을 펼치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끝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남편 판찬화의 죽음을 애도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굴곡진 인생이지만 판찬화의 헌신적인 사랑과 후원, 자신을 불사르며 쏟을 수 있었던 미술이 있었기에 판위량, 그녀의 삶은 외롭지만 외롭지 않고, 슬프지만 슬프지않은 아름다운 생이었다 여겨진다.



이 외에도 이 책에는 마리 로랑생, 천경자, 카미유 클로델, 키키 드 몽파르나스, 마리기유민 브누아, 프리다 칼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케테 콜비츠, 루이스 부르주아의 삶과 사랑, 예술혼이 가득 담겨있다. 너무나 꾹꾹 담겨있어서 이 책이 다소 무겁게 느껴질 정도이다. 더 언급하고 싶은 화가들이 많지만 이만 서평을 마무리해야겠다. 때로는 세상의 시선을 벗어던지고자, 때로는 누군가의 뮤즈라는 이름을 부수며, 때로는 육체의 고통을 극복하며 생을 부여잡고자, 때로는 시대가 주는 아픔을 널리 알리고자 그녀들은 예술이라는 용광로 가운데로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을 온전히 살라내며 예술을 살고, 삶을 살아낸다. 그 삶이 너무나 아름답고 강렬해서 이 책의 표지 또한 그러한가보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솔직한 서평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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