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을 나누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몇 가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먼저 아이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바로잡거나 혼내거나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 없이, 아이들이 하는 얘기를 제대로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몸짓과 표정, 에너지까지도 살펴야 한다. 이는 우리가 깨어있는 상태로 받아들이면 다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다. - P280

우리가 정답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아이들이 질문하는 것을 즐기도록 가르친다는 것은 배움을 향한 애정과 인생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을 보여주는것이다. 또한 현실은 본래 정량화하기 힘들며 알 수 없는 부분도 많아서 단순 분류가 안 된다는 사실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정답을 몰라도 괜찮고, 정답을 몰라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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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실험, 가장 근본적 실험 (너무 심오한 차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그것은 우리에게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 대상과의 관계에 있다. 동물들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근본적 실패가 발생하며, 이 실패는 너무도 근본적이라 다른 모든 실패도 이로부터 비롯된다. - P450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일은 1889년에 있었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졌다. 달리 말해 그의 정신 질환이 발병한 것이 정확하게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의 광기(즉 인류와의 결별)는 그가 말을 위해 울었던 그 순간 시작되었다. - P451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발적 사랑이다.(테레자는 다시 한 번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며 깊은 회한을 느꼈다. 어머니가 모르는 마을 여자 중 하나였다면 아마도 그녀의 쾌활한 천박성이 테레자에게 호감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아! 어머니가 남이었다면! 어머니가 자기 얼굴 윤곽을 그대로 지녔으며 그녀로부터 자아를 탈취해 간 것에 대해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항상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너의 아버지와 너의 어머니를 사랑하라!‘라는 천 년간의 명령이 그녀로 하여금 자기와 어머니의 닮은 점을 받아들이고 이러한 폭력을 사랑이라고 명명하도록 강요한다는 점이었다. 테레자가 어머니와 결별한 것은 어머니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어머니와 인연을 끊지 못한 것은 어머니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기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 P462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 줄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 P463

그녀는 목욕물을 받았다. 그녀는 뜨거운 물속에 누워 자신이 일생 동안 자신의 허약함을 빌미로 토마시를 이용해 먹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는 힘 있는 자들 중에서 범인을 찾고 약한 사람들 속에서 무고한 희생자를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금 테레자는 자신들의 경우는 정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꿈조차 이 강한 남자의 약점을 찾아내 그를 뒷걸음질치게 만들려고 테레자의 고통을 과시한 것이다. 테레자의 약함은 그가 더이상 강하지않아 그녀 품에서 토끼로 변할때까지 매번 그에게 타협을 강요했던 공격적인 약함이었다. 그녀는 쉴새없이 그 꿈에 대해 생각했다. - P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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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 P435

창세기 첫머리에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고 씌어 있다. 물론 창세기는 말(馬)이 아니라 인간이 쓴 것이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와중에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한 유일한 권리다.
이 권리가 당연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서열의 정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자가 이 게임에 끼어들기만 한다면 끝장이다. 신이 "너는 다른 모든 별들의 피조물 위에 군림하거라."라고 말한 다른 행성에서 온 방문자가 있다면, 창세기의 자명함은 금세 의문시된다.
화성인에 의해 마차를 끌게 된 인간, 혹은 은하수에 사는 한
주민에 의해 꼬치구이로 구워지는 인간은 그때 가서야 평소 접시에서 잘라 먹었던 소갈비를 회상하며 송아지에게 사죄를 표할 것이다. - P445

창세기에서 이미 신은 인간에게 동물 위 군림할 권한을 주었으나, 그 권한이란 단지 빌려 준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될 수도 있다. 인간은 이 행성의 주인이 아니라 단지 경영인에 불과하고 어느 날엔가 경영 결산을 해야만 할것이다. 데카르트는 한술 더 떴다. 그는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름 아닌 그가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는 사실에는 필경 심오한 물리적 일관성이 있다. 인간은 소유자이자 주인인 반면, 동물은 자동인형, 움직이는 기계, 즉 ‘Machina Animata‘에 불과하다고 데카르트는 말한다. 동물이 신음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하소연이 아니라 작동 상태가 나쁜 장치의 삐걱거림에 불과한 것이다. 마차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마차가 아픈 것이 아니라 기름칠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의 신음 소리는 이런 식으로 해석되어야만 하고 실험실에서산 채로 조각나는 개 때문에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 P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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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감정의 파도를 헤쳐나갈 때 부모가 흔들림 없이 옆에 있어주기를바란다. 우리는 아이의 인생을 바로잡으려고 애쓰지 않고 그맘때쯤의 혼란을 이해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감정을 다스리고 제 나름의 대응 전략을 세우는 법도 배운다. 부모의 이런 태도는 아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는 것과 같다.

"몸도 마음도 제멋대로라 닻을 잃은 배처럼 불안하겠지만, 내가 여기서 네 곁에 있으면서 네 본모습을 비춰줄게." - P167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감정에 대해 자책하기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의 무모한 면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아이를 가짐으로써 우리에게 활짝 열린, 어쩌면 우리를 산산이 부숴놓을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활용해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좀 더 너그럽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변모해 가면서 말이다. - P178

"내 안의 그림자가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참에 아이가내 자신에 대해 알려주는 교훈을 배워야 해." - P181

아이 때문에 몹시 화가 날 때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발끈하는 거지? 왜 그렇게 아이에게 불만인 걸까? 아이가 내 안의 어떤 점을 건드리고 있기에 이러는 걸까?‘
이때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방에서 잠시 나가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그러면 ‘지금 도움이 필요한 건 아이가 아니라 바로 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살황을 재정비할 여유가 생긴다. - P184

부모가 남들에게 맞추려고 솔직한 감정을 숨기면, 자식들 또한 가식적으로 사는 법을 배운다. 부모가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을 바꾸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도 인정받기 위해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려 한다.
부모가 자신의 욕구보다 남들의 욕구를 우선시하면 아이들도 자신보다 남들을 더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고 배운다. 이런 아이들은 대단히 관계 지향적이라서 그들의 정체성 또한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부모가 아이들을 응석받이로 키우면, 아이들은 부모를 이용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아이들이 자기에 도취되어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부모 스스로가 건강한 경계를 만들지 못하면 아이들은남들의 경계를 무시해도 된다고 배운다. 부모가 자기 공간과 욕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면, 아이들은 자신의 공간과 욕구가 남들의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게 된다. 부모가 "안 돼"라고 말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고 아이가원하는 대로 계속 받아주면 아이들은 인생이 뜻대로 안 될 때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지 못한다. - P194

다른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을 맞춰가는 사람들이 많다. 인정받고 확인받고 싶어서 자기의 본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것이다. 타고난 모습을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가르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저버리고 부모가 인정할 만한 모습으로 살아야 부모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배운다. 우리의 욕구보다 부모의 욕구에 더 맞춰진 이런 가식적인 모습에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자기 개성대로 살아가고자 할 때 죄책감을 느낀다.


죄책감은 우리의 진짜 목소리를 가로막는 어두운 감정이라 어딘가 부족하고 불안한 흔적을 남긴다. 이렇게 죄책감이 각인된 아이들은 자신의 타고난지혜를 믿지 못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영원히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주위 사람들을 심판하고 죄책감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려 한다. - P197

"내게 아이의 영혼을 지배하거나 심판할 권한이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자 아이가 내 인정을 받고 싶어하거나 인정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부모의 인정을 받는 것은 아이의 당연한 권리이니 마음껏 인정해주자. 아이의 평범한 모습에서 묻어나는 생기발랄함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이해할 지혜를 구하자. 아이의 존재를 점수나 다른 지표로 평가하지 말자.
매일 아이와 앉아서 아이의 존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은혜를 누리자. 나자신의 평범함을 되새기며 그 아름다움에 만족하자. 나는 내 아이의 타고난 모습을 평가하거나 인정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아이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도 아니며, 다만 내 아이의 정신적 동반자로서 여기 있을 뿐이다. 내 아이의 영혼은 한없이 지혜롭기에 그에 걸맞은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내가 내 본모습을 올바르게 대하는 방법 또한 비춰줄 것이다." - P201

아이의 일상에 의미를 불어넣는 한 가지 방법은 아이의 경험을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다. 아이의 인생에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도록 돕는 미묘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은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존재감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이가 대단한 일을 해낼 때만이 아니라 소소한 순간에도 곁에 있다면, 부모는 아이의 모험에 함께하게 된다. 우리의 존재감과정서적 교감은 아이에게 일관성과 질서, 체계가 잡힌 느낌을 준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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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이미지에서 탄생했다. 이미 말했듯 소설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작가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 P341

그리고 인류가 매번 더욱 성숙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다른 행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원회귀에 대한 토마시의 생각이다.
지구(1번 행성, 미체험 행성)에 사는 우리는 당연히 다른 행성에서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막연한 개념밖에 지닐 수 없다. 인간이 더 현명해질까? 인간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반복함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을까?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낙관주의자란 5번 행성에서는 인간 역사가 피를 덜 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주의자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 - P345

신학적 예비지식은 조금도 없었지만, 어린 나는 순간적으로 똥과 신은 양립할 수 없으며 또한 인간이 신의 모습을 본 따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인류학적 근본 명제가 지닌 허약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 P377

똥은 악의 문제보다 더욱 골치 아픈 신학 문제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따라서 인류 범죄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을 창조한 신, 오직 신에게만 돌아간다. - P378

인간이 구경거리를 제공할 수 밖에 없게 선고된 상황이 있게 마련이다. 침묵하는 권력(강 건너의 침묵하는 권력, 벽 속에 숨긴 조용한 도청장치로 변신한 경찰)에 대항하는 그의 전투란 군대를 공격하는 연극 단원의 전투인 것이다. -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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