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톤레사프의 평원, 여전히 그녀는 알아본다.
지평선의 한 점, 당신이 만나게 될 지평선의 그 지점은, 비록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한다 해도, 아마도 가장 적의에 차 있지는 않다는 것을, 사람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할 그런 곳이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 P9

너를 밀어낸 것이 결국 다음 날 너를 끌어당기도록 끈질기게 요구해야 해. 이것이 그녀를 내쫓으면서 어머니가 말한, 그녀가 이해했다고 믿은 것이다. 그녀는 끈질기게 요구하고, 그 말을 믿고, 걷고, 절망한다. 나는 아직 너무 어려, 나는 되돌아올 거야. 어머니는 말했다. 만약 네가 되돌아오면, 밥에 독을 넣어 너를 죽여버릴 테다. - P10

배가 불룩해진다. 배는 옷을 잡아당기고 매일 그만큼 더 옷이 치켜져 올라가, 무릎을 내놓은 채 그녀는 걷는다. 생소한 주변 경치 속에서 그녀의 뱃가죽은 아주 고운 결을 짓고 있어, 돌들 사이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배는 굶주린 이빨을 들이밀 음식을 생각나게 한다. 비가 자주 내린다. 비 갠 후 굶주림은 더욱 심해진다. 배 속의 아이는 덜 익은 벼, 망고, 모두를 먹어 치운다. 정말 이상한 점은, 먹을 것이 없는 기간이 점점 길어진다는 것이다. - P16

채석장, 땅바닥에서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발견한다. 그녀는 잡아당긴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굵은 다발로 뽑혀 나온다. 그녀는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머리카락일 뿐이다. 그녀는 배 그리고 굶주림과 함께 그 앞에 있다. 그녀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굶주림이다. 그녀는 더 이상 고개조차 들리지 않는다, 대체 길 위에서 그녀가 잃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시 자란 그녀의 머리카락은 물오리 보풀과 다름없다. 그녀는 이제 더러운 여승처럼 되었다. 진짜 머리카락은 더 이상 돋아나지 않는다. 머리칼의 뿌리는 뽀삿에서 이미 죽어버렸다. - P18

그녀는 게운다. 배 속의 애를 토해내려고, 애를 빼내려고 애쓴다. 그러나 나오는 것은 망고의 신물이다. 그녀는 많이 잔다. 그녀는 잠자는 여자가 되었고, 그것은 충분치가 않다. 밤이고 낮이고 배 속의 아이는 계속 그녀를 먹는다. 그녀는 배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갉아먹는 소리를 듣고 아이가 살 뜯는 것에 귀 기울인다. 아이는 그녀의 넓적다리, 팔, 뺨을 먹어 치운다—그녀는 그것들을 찾는다. 톤레사프에 머물 때만 해도 있던 두 뺨의 자리에는 움푹한 구멍만 있을 뿐이다—, 머리칼의 뿌리, 모두를 먹어 치우고, 아이는 조금씩 조금씩 그녀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아이는 그녀의 굶주림, 그것을 먹어 치우지는 않았다. 쓰리듯 뜨거운 배 속의 불은, 마치 졸릴 때 비치는 벌겋게 달아오른 태양과 같다. - P19

그녀는 잠잔다. 나는 잠자는 사람이다.
불이 그녀를 깨운다. 그녀의 배는 화염에 타오른다. 그녀가 토해내는 것은 피다. 더 이상 신 망고를 먹지 않고 덜 익은 벼만 먹어야 한다. 그녀는 찾는다. 자연이여, 이 생쥐를 죽일 칼을 다오. 땅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강바닥의 둥근 조약돌들 외에는. 그녀는 몸을 돌려 자갈 위에 배를 댄다. 들끓던 배 속이 멈추고, 멈추고, 완전히 멎는다. 그녀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몸을 일으킨다. 다시 배 속이 들끓기 시작한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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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당대에 처벌을 피하는 경우에도 세월이 흐르다 보면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을 때가 많다. 사람들은 사건 현장을 감식하듯이 살인사건을 기록하고, 범인이 누구인지 폭로한다. 하지만 오세이지족의 살인사건들은 지금도 너무나 잘 은폐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역사적으로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는 가망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의 가족들은 뭔가가 해결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 많은 후손들이 개인적으로 조사를 진행하지만, 그런 조사에는 끝이 없다. 그들은 의심을 품고 살면서 이미 세상을 떠난 친척이나 오래된 친구나 후견인을 의심한다. 그들이 실제로 범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 P403

나중에 매콜리프는 해리 대신 시빌의 의붓아버지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결론이 옳은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나는 할머니를 죽인 범인이 누군지 증명하지 못했다." 매콜리프는 이렇게 썼다. "하지만 나의 문제로 인해 실패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역사에서 너무 많은 페이지를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 거짓이 너무 많고, 너무 많은 문서가 파기되었고, 당시 할머니의 죽음을 기록하려는 노력이 너무 적었다. (…) 살해당한 인디언의 가족들은 지나간 범죄에 대해 응분의 처벌을 내리고 만족감을 느낄 권리가 없다. 심지어 자신의 자녀,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조부모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도 없다. 그들은 그저 추측할 수밖에 없다. 내가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처럼." - P404

저물녘이라서 하늘 가장 자리가 이미 어두웠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도시 풍경 너머의 초원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이 땅에는 피가 가득해요." 웹이 말했다. 그러고는 잠시 침묵했다. 떡갈나무 이파리들이 바람 속에서 계속 바스락거렸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뒤, 하느님이 카인에게 했던 말을 웹이 되풀이했다. "피가 땅에서 부르짖는다."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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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신의 걸작을 생산 한 것은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후인 1311년에 이르러서였다. […] 이 도시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 두초 디 부오닌세냐가 여러 패널로 구성된 웅장한 제단 장식화인 거대한 <마에스타(Maesta)>를 막 완성한 것이었다. […] 그 현장에 있었다면, 사상 최초로 그 그림을 보는 이들 가운데 있었다면 얼마나 놀라웠을까. 그 그림은 색채와 사실적 묘사가 눈이 부실 지경이었고, 경건한 동시에 평범한 인간성과 현세적인 심리와 정서적 역동성 또한 보여주는 성모와 사도들의 서사적 힘은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시에나시 전체를 심원한 감정적 반향으로 출렁이게 했다. […] 신앙과 연대라는 양쪽 측면에서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인 거대한 감정이 모두를 사로잡았다. 오늘날 우리가 그 시대에 그런 회화적 형상이 발휘했던 힘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림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당시의 세계에서 그런 회화적 재현은 신자들을 감동시키고 위로하면서, 그들이 믿는 자들뿐만 아니라 상상하는 자들 가운데 있음을, 그리하여 그들이 거룩한 이들과 신성한 이들을 실제로 보았음을 보증했다. - P106

같은 뿌리를 둔 형제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경쟁 관계에서 보자면, 나의 사례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증으로 여겨질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무슬림이라면 내가 이런 성상에 이렇게 사로잡힌 것이 수상쩍다고, 어쩌면 불충스럽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두 아브라함 신앙 중 어느 하나의 안에서 태어난다는 것, 한 문화에서 태어나 다른 문화, 이 경우엔 지금껏 너무나 오래 다른 아브라함 신앙과의 대결에 몰두해 온 다른 문화 안에서 성년에 이른다는 것은, 역사의 요점이 어느 한쪽이 옳다는 걸, 어느 한쪽이 신을 더 사랑하거나 더 참되거나 더 인간적이라는 걸 증명하는 데 있는 양, 영성이라는 것이 마음의 개인적 영역이 아니라 미소 짓는 신이 메달을 건네줄 결승선까지 가는 경주인 양, 편협한 구별 짓기와 비난과 사악한 동기를 가진 비교와 차별과 공포의 어휘들이 가지는 논리에 너무 밀접하게 관계되는 경우가 많다. 피나코테카에 선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요점을 빗나간 듯이 보였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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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을 만들면 뭘 하실 건가요?"
"고향에 다녀오려고요." 그이가 한참 침묵하더니 혼 잣말 같은 투로 다시 말했다. "그래요, 고향에."
그이를 보니 어쩐지 어머니가 생각났다.
나는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던 그림 몇 점이 있는 피나코테카 미술관에 가고 싶었다. 전날 밤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직전에 나는 어린 시절에 알게 된 흥분, 내가 침대에서 자고 있어도 바다는 여전히 거기 있고 밤새도록 거기 있을 것이며 내가 잠에서 깨어날 아침에도 내내 거기 있으리라는 걸 전율하는 확신으로 알게 됐을 때의 흥분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불 꺼진 피나코테카 전시실에 있는 그 그림들을 상상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른 아침 광장에, 내가 시에나에 오기를 고대하던 시간에 거의 맞먹는, 사반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집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 여성 옆에 앉아 있으니, 아직은 그 그림들을 만나러 가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 P68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도시가 깨어나 분주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몇 사람을 멀찍이서 따라다녀 보기도 했다. 이 이상하고 남부끄러운 행동을 나는 현지인들이 시에나를 누비는 방법을 알아보고 그들의 일상을 일별하려는 거라고, 말하자면 현지인들을 따라 살아 보려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진실은 더 간단하고, 정신적이라기보다는 육체적이며, 개념보다는 리듬과 더 관계가 깊다. 나는 그저 거친 석판에 대고 끌을 가는 채석공처럼 이 도시에 대고 나 자신을 벼리고 싶었다. - P69

내 나침반은 이 도시에만, 이 도시의 꼬불꼬불한 길과 모퉁이, 이 도시의 책략과 결정, 이 도시의 취향과 의도에만 이끌려야 했다. 시에나는 내 나침반의 북극성이었다. 그리고 세심하게 애쓰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통제 욕구를 가지게 되기 마련이듯, 내가 느끼기에 그날의 시에나는 나의 자유와 충성심을 염려하는 듯했다. 그처럼 결연하고 그처럼 의도가 충만하고 그처럼 나의 존재에 관심이 많은 곳은 일찍이 가 본 적이 없었다. 어느 길로 접어들든, 내 걸음의 속도와 방향은 시에나가 결정하는 듯했다. 그때 기분으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처럼 오랫동안 가고 싶어 했던 그 낯선 도시에서 평생이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 P70

문이 하나 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공동묘지였다. 작은 도시공원만 했다.
묘석 대부분에 망자의 초상 사진이 새겨져 있었다. […] 일부는 몇십 년 전에 세상을 떴고, 몇몇은 백 년도 전에 별세했지만, 아직도 후손들이 들여다보고 있음이 명백한 것이, 무덤들이 세심하게 관리된 데다, 가져다 놓은 싱싱한 꽃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묘석에 새겨진 여성들의 얼굴이 낯익었다. 어릴 때 보던 여성들과 똑같이 근심 어린 얼굴들이었고, 그건 앞서 두오모(대성당) 광장에서 만난 나이지리아 여성의 얼굴이기도 했다. 걱정하는 얼굴, 전망을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 시에나 여성들은 사진이 찍힐 때 자신을 포착한 그 이미지가 자신보다 오래 살리라고 이미 짐작했던 것만 같다. 그들은 지친 듯이 마지못해 시키는 대로 카메라를 쳐다본다. 나는 그 사진들에 깊이 감동했고, 그 때문에 좀 놀랐다. - P75

끝까지 가면 탁 트인 교외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잘하면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경계까지 걸었다. 예상치 못한 광경이 나타났다. 알고 보니 내가 있던 곳은 공동묘지에서도 비좁은 옛 묘역이었다. 이제 눈 아래로 드넓은 묘역들이 펼쳐졌다. 일개 대대 수준의 묘석들이 층층 이 이어졌다. 규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한 무덤을 깊이 생각하는 것과 끝을 모르는 죽음의 식욕을 일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망자들의 숫자가 산 자들을 압도한다. 현재란 검은 천 가장자리에 두른 금색 테두리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도한가. 그런 생각이 우리 종족에 대한 더없는 열광과 음울한 자긍심과 함께 밀려왔다. 생이 계속될 수 없다는 증거, 어떤 갑옷을 두르든 예외 없이 모든 것이 사라져야 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대면하고도, 우리는 얼마나 용감하고 영웅적인가. - P76

문득 등 뒤에 누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돌아섰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바깥을 향해 놓인 벤치가 보였다. 벤치에는 오후의 마지막 햇살이 감돌았고, 은밀하면서도 탁 트여 사방으로 열린 시골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는 흔치 않은 이점이 있었다. 경계하기에 좋은 자리로군, 나는 생각했다. 숨기에 좋은 곳, 울기에 좋은 곳. 나는 벤치에 앉아 그 벤치가 절대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했다.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 벤치가 그 자리에 남아 있기를 말이다. - P77

이탈리아어 강좌에 등록했다. 책과 책 사이에 주어지는 이 맹렬하고 우울한 자유로 고통받는 머리에는 뭐라도 배우려고 매달리는 편이 나을 거야,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 세번째 수업 중간쯤에 새로운 단어들이 연달아 들이닥치자 나는 쩔쩔매다가 거의 뛰쳐나갈 뻔했다. 벽에 부닥친 느낌이었다. 그러나 고비는 지나갔다. […]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로, 왜 이 경험이 이처럼 불편한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정오가 되어 풀려났다. 아마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경험이 우리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때, 배가 고프다거나 춥다거나 그냥 당황스럽다는 의사를 전달할 수단이 없었던 때를 상기시키고, 우리 안에 그 곤혹스러움의 흔적이 남아 의사를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적마다 되살아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건 열한 살 나이에 모국어인 아랍어를 두고 영어로 옮겨 가야 했던 나의 특정한 경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이동을 한 번 하고 나면 뒤에 오는 여하한 분열도 치명적인 위험을 뜻하게 될 수 있다. - P78

이곳의 많은 것이 익숙했다.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는 방식, 공공연한 애정 표현, 엮어서 말린 고추, 어릴 때 리비아에서 먹던 것과 똑같은 회향 씨앗이 든 비스킷, 돈을 다루는 신중함, 집과 음식에 대한 자부심, 일부 우아하고 친절한 여성 들의 정중한 태도, 일부 잘난 체하는 젊은 남자들의 자신만만함, 일부 나이 든 이들의 결연한 우아함, 일부 중년 남성들이 나를 보는 방식과 우리가 인식과 상호 이해의 시선을 교환하는 방식, 점심 식사 뒤의 시간, 소리와 침묵과 침묵의 소리, 모든 것의 표면에 새겨진 성, 취약성, 뺨들이 붉어지는 방식, 내게 신문을 판 여성과 빵집 주인과 식료품점 주인이 장 본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를 보고는 하나같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슨 요리를 할 셈인지, 어떻게 요리할 작정인지를 묻고 자기 의견을 보태 주고 싶어 했다는 사실. - P82

잠시 후에 묘지로 들어서면서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 가족이 보였다. 부부와 딸이었다. 다들 허리를 굽혀 묘석을 닦고 주변 꽃들에 물을 주면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딸은 열두 살쯤 되어 보였다. 나는 아이가 부모에게 품은 고요한 애정 같은 걸 알아차렸다. 아이의 태도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제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제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어서 기뻐요.‘ 순식간에 간파한 것들이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왠지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내 눈을 단속해야 할 듯했다. 잠시 앉아서 새소리를 들으려고 눈에 띄지 않게 계곡을 훤히 볼 수 있는 비밀 벤치 쪽으로 향하면서 그 가족이 묘지 없는 애도자인 나를 보지 못했기를 빌었다. 그제야 나는 시에나에 그림을 보러 온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홀로 애도하러, 새로운 지형을 살피며 여기서부터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알아내러 온 것이었다. - P92

눈이 어둠에 익지 않아서 그가 어디로 가는지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높은 천장 가장 자리를 두른 장식용 나무 들보들이 보일 만해지자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고, 이내 제 오빠를 쫓아 햇빛 가득한 안마당을 뛰어다니는 살마가 보였다. 동생보다 한 살 정도 많은 듯한 카림이 움켜잡으려는 동생의 손을 능란하게 피했다. 동생이 가까이 올 때마다 아이는 몹시 즐거워했다. 아이는 낄낄낄 웃었는데, 나는 그게 그 아이 특유의, 제 안의 기쁨이 불에 부채질이라도 하는 듯이, 온화하면서도 불꽃이 튀는 듯한 소리가 빠르게 이어지는 그런 웃음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둘이 달려와 차례로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뛰어다니느라 상기된 얼굴들이 나를 다시 만나 기쁘다는 기색이었는데, 둘이 어린아이라 아직 사회적 겉치레 요령을 완전히 익히지 못했음을 고려하면, 내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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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찾아?" 그녀의 남편이 물었다.
"그 집이 폭파된 곳."
"그건 저쪽 길 아니야?"
"아냐, 그건··· 아, 여기다." 마지가 차를 세우며 말했다. 폭파사건이 있은 뒤로 새로 지은 집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마지가 FBI의 기록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이야기를 내게 해 주었다. 폭파사건이 있던 날 밤, 그녀의 아버지와 고모와 몰리가 스미스의 집에서 밤을 보낼 계획이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우보이의 귀가 심하게 아파와서 그들은 그냥 집에 있었다. "그래서 그 세 사람은 무사할 수 있었어요. 운명이죠." 마지가 말했다. 나는 한순간 멈칫한 뒤에야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다. "우리 아버지는 당신 아버지가 당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평생 알고 있었어요." 마지가 말했다. - P360

역사는 무자비한 판관이다. 우리의 비극적인 실수와 멍청한 부주의를 낱낱이 드러내고, 우리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폭로하며, 처음부터 미스터리 소설의 결말을 알고 있는 오만한 탐정처럼 아는 척을 한다. 나는 역사기록들을 샅샅이 훑으면서, 몰리가 남편에게서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한 오세이지족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와 결혼한 사람이 돈을 노리고 내 가족을 죽일 거라고 의심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화이트가 로슨의 거짓 자백이나 후버의 못된 저의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 P361

버트는 자신이 오세이지족에게 사기를 치고 있음을 감추기 위해 괴상한 회계방법을 도입했다. 조지 빅하트가 사망한 뒤 유언 검인 청문회에서 한 변호사는 버트의 은행에서 오세이지족에게 대출되었다는 돈이 어째서 버트의 개인 수표로 발행되었는지 모르겠다며 당황스러운 심정을 표출했다. 버트는 자신이 "굳이 숨겨야 하는 거래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인신공격을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버트 씨. 하지만 이것이 조금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일합니다." - P368

나는 여러 날 동안 문서보관소를 드나들며 빅하트의 살인사건에 경제적 동기가 얽혀 있는지 조사해봤다. 그의 죽음으로 이득을 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유언 검인 기록도 살펴봤다. 마사는 내게 보낸 이메일에서 "우리 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씀처럼 돈을 따라가면 돼요"라고 썼다. 하지만 헤일이든 버트든 아니면 다른 백인 남자든 빅하트의 재산을 물려받았다는 증거가 없었다. 그의 재산은 빅하트의 아내와 어린 딸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빅하트의 딸에게 후견인이 있었으므로, 그 남자가 돈을 좌우했을 것이다. 나는 자료들을 훑어본 끝에 결국 그 후견인의 이름을 찾아냈다. H.G. 버트. - P370

하지만 버트가 빅하트와 보건의 살인사건에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여전히 정황증거뿐이었다. 보건이 기차에서 내던져질 때 누가 그와 함께 있었는지도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옛날 신문들을 뒤지던 중 <포허스카 데일리 캐피털>에 실린 보건의 장례식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기사 중간쯤에 버트가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보건과 함께 기차에 올랐으며, 보건이 자리에서 사라졌을 때도 기차 안에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신문의 또 다른 기사에 따르면, 보건이 사라졌다고 신고한 사람도 버트였다.
나는 포트워스의 문서보관소를 떠나기 전에, 수사국 정보원과의 면담 내용이 실린 서류철을 우연히 발견했다. 헤일과 가까운 사이였던 이 정보원은 다른 살인사건들에서 헤일에게 불리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그는 보건의 살인사건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있습니다. 허브 버트가 그 일을 했을 겁니다." - P371

나는 또한 뉴멕시코의 어떤 도서관에서 페어팩 스 연방보안관과의 인터뷰 중 일부를 우연히 찾아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이 인터뷰의 주인공은 오세이지 살인사건들을 직접 수사한 사람이었다. 그는 버트가 보건의 살인사건과 관련되어 있으며, 신흥도시 중 한 곳의 시장(그 일대에서 활동하던 불량배)이 버트를 도와 보건을 기차 밖으로 던졌음을 시사했다. 그는 또한 1925년에 수사국이 오세이지 살인사건들을 수사 중일 때 버트가 겁에 질린 나머지 도주를 생각했다는 말도 했다. 실제로 버트는 그해에 갑자기 캔자스로 이주했다. 마사는 내 설명을 모두 들은 뒤 가만히 있다가 작게 흐느꼈다.
"죄송합니다." 내가 말했다.
"아뇨, 마음이 놓여서 그래요. 우리 집안사람들 마음에 아주 오랫 동안 걸려 있던 일이니까요." - P372

톰 화이트가 나타나 수사를 시작한 1925년에 수사국은 화이트혼 사건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버거 요원은 이것이 "별개의 사건"이라면서 조직적인 살인사건들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썼다. 이 사건은 오세이지 살인사건들에 대해 수사국이 세운 극적인 가설, 즉 이 모든 살인사건을 한 사람이 주도했으며, 헤일 일당을 체포하면 오세이지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라는 가설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헤일이 화이트혼 사건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바로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가 된다. 레드 콘의 할아버지가 수상쩍은 죽음을 맞이했듯이, 화이트혼의 살인사건과 그의 아내를 죽이려다 실패한 음모는 공포시대의 비밀스러운 이면을 보여준다. 사악한 헤일이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 - P385

루이스의 살인사건을 기록한 이 원고를 다 읽은 뒤 내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녀가 석유가 매장된 땅에 대한 균등 수익권 때문에 1918년에 살해되었다는 것. 대부분의 역사기록에 따르면, 오세이지족의 공포시대는 헤일이 애나 브라운을 살해한 1921년 봄에 시작해서 헤일이 체포된 1926년 1월에 끝났다. 하지만 루이스의 살인사건은 석유의 수익금을 노린 살인사건이 그보다 적어도 3년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레드 콘의 할아버지가 1931년에 정말로 독살된 것이라면, 헤일이 체포된 뒤에도 살인이 계속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사건들은 석유 수익금을 노리고 오세이지족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 사람이 헤일뿐만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헤일이 가장 오랫동안 가장 잔혹하게 피해자들을 살해한 인물일 수는 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살인사 건들이 존재했다. 그 사건들은 공식적인 추정치에 포함되지도 않았으며, 몰리 버크하트의 살해된 가족들이나 루이스의 경우처럼 조사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중 일부는 아예 살인사건으로 분류되지도 않았다. - P392

나는 포트워스의 문서보관소를 다시 찾아가서 곰팡내가 나는 수 많은 상자와 서류철을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다. […]
그런데 한 상자에 천으로 된 표지가 너덜너덜한 일지가 들어 있었다. 인디언실이 공포시대 동안 후견인으로 활동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자료였다. […]
나는 이 시기에 오세이지족의 후견인으로 활약한 다른 사람들도 찾아보았다. 한 후견인은 오세이지족 열한 명을 맡았는데, 그중 여 덟 명이 사망했다. 또 다른 후견인은 열세 명을 맡았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한 사람이 맡은 다섯 명의 피후 견인이 모두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기록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너무 엄청난 숫자라서, 자연스러운 사망률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이 죽음들은 대부분 조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의심스러운 죽음을 맞은 사람이 정확히 몇 명인지 파악하기가 불가능했다.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내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 P395

또 다른 오세이지족 피후견인인 흘루아토미는 공식적으로는 결핵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서류들 속에 한 정보원이 연방검사에게 보낸 전신이 섞여 있었다. 흘루아토미의 후견인이 고의로 그녀의 치료를 막고, 그녀를 병원에 보내는 것도 거부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후견인은 "그녀가 그곳에 가야만 살 수 있으며, 그레이호스에 남아 있으면 반드시 죽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정보원은 흘루아토미가 죽은 뒤 후견인이 스스로 그녀의 재산관리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 P397

수사국은 오세이지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스물네 명으로 추정했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음이 분명하다. 수사국은 헤일 일당을 잡은 뒤 수사를 종결했다. 그러나 수사국 내에서도 적어도 일부는 이보다 훨씬 많은 살인사건들이 조직적으로 은폐되어 알려 지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 오세이지 카운티의 여러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도 수상쩍은 죽음의 원인이 ‘소모성 질병‘이나 ‘원인불명‘으로 잘못 처리되는 일이 일상이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이 살인사건들을 파헤쳐본 학자들과 수사관들은 오세이지의 사망자 수가 설사 수백 명 단위는 아니더라도 수십 명 단위는 된다고 보고 있다.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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