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되는 열네 살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열아홉 살까지, 청소년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마음에는 이 시기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는 것 같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과도기‘이니 웬만한 고민은 어른이 된 뒤로 미루었으면 한다. 다르게 말하면, 어른이 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매달리는 게 답답하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는 그렇지 않다. ‘사춘기‘‘청소년기‘가 아니라 하루하루 오늘을 살아간다. 어른이 된 뒤보다 내일이 더 걱정이다. - P170

서현숙 작가는 소년원 학생들과 책을 읽은 기록을 『소년을 읽다』에 담았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데 한참 걸렸다. 극단의 상황에 놓인 아이들이 보여주는 속내가 너무나 연약해서 그랬다. 그 아이들의 잘못과 미래를 구분해서 바라보는 작가님은 진정한 어른이다. 그에 비해 나 자신은 부끄러워서 한 문장 한 문장 허투루 읽을 수 없었다. 선생님께 책과 생각의 세계를 안내받은 아이들은 그 이름도 낯설었던 ‘독자‘가 되고 시를 외우는 사람이 된다. 작가는 머리말에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사람‘이다"라고 썼다. 사람에게는 사람이 제일 힘센 동력이다. 아이들에게는 도와 줄 사람이 필요하다. - P180

자기 인생을 알아서 설계할 수 있으려면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학교 안에서, 학교 바깥에서, 일터에서 청소년이 고통받는 건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 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린이에 대해 고민할 때보다 마음도 생각도 훨씬 복잡해진다. 운동장에서 노래를 듣던 마음을 떠올리고, 지금 나의 책임을 계속 생각해봐야겠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읽고 싶다. 어쩌면 나는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몸 한구석에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P183

헨리 조지는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의 이성과 자연적 질서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연은 노동에게만 부를 안겨준다"면서 만일 세상에 한 사람만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일한 것 이상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생산하는 사람이 소유해야 하고, 저축하는 사람이 누려야 한다"는 주장은 그렇게 나왔다. 일로써 자신을 먹여 살리는 건 자연스럽고 떳떳한 일이다. 그는 애초에 자연의 것 인 ‘토지‘를 누군가 소유하고 그로 인한 부를 세습하는 것을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모든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일‘과 ‘부‘에 대한 권리가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위배된다는 주장이다.
150여 년 전 헨리 조지는 토지에만 세금을 매겨야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오늘날 ‘재산과 상속‘에 세금을 매기는 문제와 서로 통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의 말대로 "생산자가 자신이 생산한 부를 (생산한 부만을) 가지는 사회"라면 일할 기회도 모두에게 고루 주어질 것이다. 그런 사회가 되어야 ‘일‘이 진정한 의미를 되찾을 것이다. - P189

"경제가 어렵다. 물가는 오르는데 월급은 그대로다. 정규직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회사에도 따돌림이 있다.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빼앗는다. 사라지는 직업이 많다. 어떤 직업이 새로 생길지 모른다."
어린이도 청소년도 이런 소식을 듣는다. 이들은 분위기에 민감하고 불안을 일찍 알아차린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 경력 25년인 나도 걱정스러운데 초심자들 마음은 더하지 않을까. 이럴 때 ‘자아실현‘ ‘노동의 힘‘ ‘사회인의 의무‘ 같은 판에 박힌 말로 그 불안을 달래 줄 수는 없다. 그보다는 함께 ‘노동‘을 새롭게 정의하고 마음가짐도 다르게 해야 한다. - P193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어린이, 청소년들의 미래에 제일 중요한 노동의 역량은 남과 잘 협력하기가 아닐까 싶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자신에 대해서도 훨씬 유연해질 것이다. 일에 상처받거나 좌절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구조가 잘못되었다면 당장 해결하지는 못해도 문제의식은 가지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 P195

흔히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도 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줄곧 의심을 품어왔다. 사랑을 잘하는 사람은, 사랑을 해본 사람 아닐까? 누군가의 팬이었던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사랑의 진짜 기쁨은 사랑을 주는 데 있다는 걸. 그 기쁨은 사랑을 받을 기회가 없던 사람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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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도 괜찮아 보이려고 무리할 때가 있다. 어린이는 더 자주 그런다. 얼마큼 감당할 수 있는지 자기도 잘 모르니까. 중학교 입학은 커다란 사건이다. 어엿한 새 출발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입학 때와 비교하면 어린이는 좀 외로울 것 같다. 내 눈에는 어린이날 선물을 못 받는 것만으로도 의기소침해지는 ‘어린이‘인데. 잘하라는 말보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말을 더 많이 들려주고 싶다. 초등학교 때보다는 어렵겠지만, 그때와는 다른 재미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냥 하는 위로의 말이 아니라, 그게 바로 진짜 내 생각이다. - P139

어린이에게 아름다움이란 아마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을 뜻하는 모양이다. 재미있는 것, 만족스러운 것, 언젠가 해보고 싶은 것이 어린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매 순간만 들어지는 게 아닌가. 점점 많아지는 게 아닌가. 내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원고지를 채우는 어린이들 옆에서 나도 아름다움의 목록을 적어보았다. 감은사지 삼층 석탑, 오리온 별자리, 새하얀 구름, 사이다 병뚜껑 따는 소리, 수평선, 개의 모든 것, 일곱 살 어린이와 하는 악수, 어린이 이마에 맺힌 땀, 옥수수 삶는 냄새, 부처님 오신 날 무렵 거리의 연등, 반짝이는 모든 것, 작은 털장갑, 편의점 건너편 나무 그늘, 가을이 왔다 싶은 아침, 옛날 동시, 『릴케의 로댕』, 벚나무 낙엽이 깔린 길, 봄에 나뭇가지에 나는 새잎, 색종이, 코뿔소, 잡채, 오이지, 잠옷, 비누, 보온병, 양산, 국자, 전시회, 지도, 국어사전······. - P145

읽는 사람들은 읽는 세계 안에서 서로 알고 지낸다. 정치가 책을 미워하고 사회가 책을 소외시키고 경제가 책을 의심해도, 독자는 계속 생겨난다. 브레히트는 "암울한 시대에도 노래를 부를 것인가? 그래도 노래 부를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대해"라고 했다. 우리는 계속 읽을 것이다. 우리 세계에 대한 책을. - P151

"저는 어린이가 다양한 선생님을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경력은 적지만 친근한 선생님, 경력이 적어서 엄격한 선생님, 연륜이 있어서 너그러운 선생님, 연륜이 있고 엄격한 선생님. 학년에 따라 학교 사정에 따라 여러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어린이에게 주어지는 기회니까요. 조금은 냉정한 선생님, 노래를 못하는 선생님, 덤벙대는 선생님, 아픈 선생님, 피부색이 다르거나 장애가 있거나, 둘 다인 선생님도 만나면 좋겠습니다. 어린이는 선생님을 통해 삶의 여러 모습과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 아닐까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선생님은 날마다 ‘가까이에서 보는‘ 의미 있는 어른이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위상은 어쩌다 마주친 (허세에 찬) 작가와는 전혀 다르고, 소방관이나 과학자와도 다르다. 그러니 선생님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아이들과 사회를 위해서 그분들에게 안정과 인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그게 잘되고 있는 걸까? - P161

물론 괴팍한 선생님도, 신경쇠약이 의심되는 선생님도, 우리 눈에도 무기력해 보이는 선생님도 있었다. 하지만 좋은 선생님이 더 많았다. 내가 이렇게 확신하는 건, 선생님들의 어떤 말과 행동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생님들한테 이런 말씀을 들었다.
"교복을 갖추어 입고, 교표를 꼭 달아라. 그건 너희가 어디에서 무얼 하든지 우리 학교가 보호하는 아이들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니까."
"고등학교는 시간을 버는 곳이다. 대학을 안 가더라도,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이것저것 해봐라. 학교 지붕 아래 있을 때, 선생님들이 도와줄 수 있을 때 해봐라."
가톨릭 계열의 학교여서 ‘종교‘ 수업도 일정 기간 들었다. 그때 수녀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신앙이 있다. 너희는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누구든 신념은 있어야 한다." - P167

그런 날들을 보내면서 나는 사랑받는 게 무언지 배웠다. 선생님들이 나만 꼭 집어 사랑하지 않더라도, 사랑받는 아이 중 하나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랑은 자격을 갖추지 않아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학교에 있는 동안만큼은 가정의 그늘을, 폭력을, 냉담 함을, 긴장과 불안을 잊을 수 있던 아이들이. - P168

학교는 공교육을 실행하는 기관이다. 이때의 ‘공公‘은 공평하다는 뜻의 공이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공평하게 배우고 이해받고 보호받는 곳이다. 입시나 진로 준비만 하는 곳이 아니라 하루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바깥의 집‘이다. 누군가의 자녀, 어느 집의 몇째가 아니라 이름을 가지고 한 명의 시민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그런 학교에서 아이들은 사적인 생활을 가꾸어나간다. 『공공성]"이라는 책에서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 소멸을 요구하지 않는다"라는 설명을 읽으면서 공과 사가 얼마나 얽혀 있는 관념인지 생각했다. 공과 사를 구분할 생각만 했지, 어떻게 합쳐지는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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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하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발표할 때, 성민의 답이 인상적이었다.
"저는 저의 행복이 가장 중요해요."
성민이는 친구를 잘 돕는 다정한 어린이이고, 아이들 사이의 다툼도 잘 중재해서 ‘성민이가 있으면 싸움이 안 난다‘고들 할 정도다. 그래서 ‘가족의 행복‘이나 ‘세계 평화‘ 같은 게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챙기는 것이 다행스러워서 물어보았다.
"맞아. 그거 정말 중요해. 그런데 성민아, 그러면 다른 사람들 행복은 어떻게 해?"
성민이는 내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얼굴로 답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불행하면 저도 안 행복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도 행복해지게 도와줘야죠."
성민이는 ‘이타심‘이라는 말을 모르지만, 바로 그것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 P92

여전히 어린이를 ‘동료 시민‘으로 부르기를 주저하는 분도 있다. 어린이를 보호하고 교육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어른과 똑같이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시기를 보내면서 그런 분들의 생각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어린이는 교육받을 권리, 놀 권리에 심각한 제한을 받으면서도 방역 주체로서 의무를 다해왔다. 만일 ‘몇 살 이상 성인‘ ‘심각한 기저 질환이 있는 사람‘ ‘특정 지역 주민‘ 등에게 어린이들에게 하듯이 제한을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만큼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을까? - P95

도서관의 일반 자료실 문 앞에 붙은 ‘어린이는 어린이 자료실을 이용하라‘는 안내가 눈에 띄었다. 어린이 자료실에는 ‘어른은 일반 자료실을 이용하라‘는 안내가 없는데. ‘어린이 자료실‘은 어린이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 어린이의 공간을 제한하려고 만든 게 아니다. 어린이가 찾고 싶은 책이 일반 자료실에 있을 수도 있고, 어린이도 나처럼 이 책 저 책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을 수 있다. 설마 어린이가 일반 자료실에 들어가려고 할 때 실제로 막아서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그 안내문을 보는 어린이의 마음은 어떨까? 공공시설에서 되도록 안 오기를 바라는 이용자가 되는 것은 분명 좋은 경험은 아닐 것이다. - P119

어린이 덕분에 보게 되는 건 어린이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옐로 카펫에서 기다려요" 라는 표지를 보았다. 어린이들이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보도 안쪽에 서 있으라고 바닥에 큰 삼각형을 그린 것이다. 나는 어린이들에게 차도 가까이 서 있으면 위험하니 세 걸음 떨어지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렇게 시각적으로 안내된 걸 보니 반가웠다. 하지만 "노란 삼각형 안에서 기다려요"라고 하면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좋았을 것이다. 영문으로만 표기된 간판이나 ‘PULL, PUSH‘ 같은 안내문을 볼 때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냥 ‘당기세요, 미세요‘라고 쓰면 안 될까? - P119

나는 평소에 어린이를 ‘미래의 희망‘ ‘꿈나무‘로 부르는 데 반대한다. 어린이의 오늘을 지우고 미래의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다. 하지만 이 글에서만큼은 조심스럽게 말해보고 싶다. 어린이는 우리가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미래의 사람이다. 오늘의 어린이는 우리가 어릴 때 막연히 떠올렸던 그 미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 P122

세상의 어떤 부분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을 때, 변화를 위해 싸울수록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종종 ‘미래에서 누군가가 와서 지금 잘하고 있는 거라고, 미래에는 나아진다고 말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 미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어린이다. 어린이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고, 어린이가 ‘나답게‘ 살 수 있게 격려하고 보호해야 한다.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 의견을 가질 수 있게 가르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시민으로서 존중하면서 어린이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어린이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 미래가 바로 그러하듯이. - P123

공공장소에서 어린이를 배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른바 ‘노 키즈 존‘이라는 세련된 말로,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노"라고 말합니다. 어린이가 떠들면 다른 손님에게 방해가 된다는 이유를 대지요. 여러분, 우리는 소비자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시민입니다. 어린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제한하는 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출입을 제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의 출입을 제한해야 할 때는 오직 어린이를 보호할 때뿐입니다. 어린이가 너무 떠들면 중재를 해야겠지요. 그런데 그게 또 어려우니까 어지간하면 참게 될 것입니다. 참을 만한 정도는 참는 것. 저는 그게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관용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공공장소에서 악을 쓰고 있는 어린이가 있다면, 그곳에서 제일 힘든 사람이 바로 그 어린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자기도 답답하겠지요.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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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친구는 사적인 관계다. 이웃은 사회적인 관계다. 나와 친구는 개인으로서 만나지만, 나와 이웃은 이웃 사람과 이웃 사람으로 만난다. 친구들은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면, 이웃은 물리적 가까움을 전제로 한다. 앗, 물리적 가까움! 그러니까 이웃은 나라는 존재가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다. 어린이에게 이웃은 이 세상에 ‘진짜‘ 사람들이 산다는 걸 알려준다. 동네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살 때, 모자 달린 외투를 머리에만 걸친 도련님 차림으로 신발주머니를 무릎으로 쳐가면서 학교를 오고 갈 때, 어린이는 실재하는 사람들을 본다. 이웃인 어른들은 알게 모르게 어린이 삶의 배경에 이미 등장한 것이다. 어린이 자신도 이웃으로서 나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상적으로, 날마다. - P60

이따금 어린이한테 잘 해주고 싶어도 주변에 어린이가 없어서 그럴 기회가 없다고 아쉬워하는 분들을 만난다. 우리가 실제로 이웃을 못 만나서 ‘이웃 어른‘이 될 기회가 적어진다면 동네의 범위를 점점 더 넓게 잡자. 길에서 카페에서 식당에서 만나는 어린이 이웃을 환대하면 좋겠다. 그냥 어른끼리도 되도록 친절하게 대하면 좋겠다. 어딘가에 ‘세상이 이런 곳이구나‘ 하고 가만히 지켜보는 어린이가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가올 세상이 달라질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사람들이 많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 P64

나는 박물관이 좋다. 박물관의 전시물들은 공공의 유산이다. 나한테 그걸 볼 권리가 있다는 점이 좋다. 박물관에서 어린이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아가 인류의 일원으로서 더 많이 환영받으면 좋겠다. 유산은 그렇게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 P80

책 자체가 언어를 매개로 한, 문화 예술의 산물이다. 그리고 어린이에게 문화 예술은 세상을 배우는 길인 동시에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알고, 맥락을 이해하고, 다른 감상자를 만나는 것. 어린이 자신이 창작자가 될 때도 그렇게 전달되는 작품을 추구하게 해야 한다. 문화 예술은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P83

오늘날 교육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창의성‘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창의적인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전의 것들을 배워야 한다. 비윤리적이거나 사회적 합의에 어긋나는 것을 창의성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표현의 기술을 익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시 한번, 창작은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 P83

"선생님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몇 권이 제일 재미있어요?"
"이번에 나온 게 제일 재미있네!"
현성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왜냐하면 제가 실력이 점점 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다음에 나올 거는 더 재미있을 거예요!"
‘앞으로 점점 더 잘하게 된다‘는 확신은 어린이가 자신을 성장시키는 큰 동력이다. 그런 확신의 근거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현재의 자기 모습이다. 재작년보다 작년, 작년보다 지금 더 그림을 잘 그리고, 축구를 잘하고, 아는 게 많다. 앞으로도 지금보다 더 잘하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열심히 공을 차고 공부도 한다. 그러고 보면 서툴다는 것도 어른들 생각이지, 어린이 입장에서는 연습을 거듭한 ‘지금‘이 가장 잘하는 때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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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나는 똑같은 속도로 나이를 먹어간다. 특별히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나름 대로 발전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냥 계속 자라는 것으로 쳐도 되지 않나? 앞 문장에 부사를 너무 많이 썼다. 이렇게까지 부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진술은 믿을 수 없다. 책임을 다해야 할 어른이 나도 아직 자라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뻔뻔하다.
그럼 몇 살부터 ‘자란다‘가 아니라 ‘늙는다‘가 되는 걸까? - P20

사전적으로는 중년이라 할 수 있는 마흔 살 안팎부터라고 한다. ‘중년‘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설명은 이렇다.

청년과 노년의 중간을 이르며, 때로 50대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원래는 40대까지인데 넉넉하게 50대도 중년으로 친다는 걸까? 사실 나 자신은 아직도 ‘중년‘이라는 정체성을 외면하고 있는데, 만일 중년이 ‘50대까지 포함하지 않는 경우‘라면 나는 이미 중년도 끝나가는 것이 된다.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언제나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있으니까 어디 가서 나이 타령 하지 말아야지, 하고 늘 생각해왔다. 스스로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린이와 나란히 놓고 보니 내 연령대가 어디에 놓이는 건지, 다시 말해 내가 얼마나 나이가 많은지 깨달은 것이다. 달리 표현할 길이 있다면 좋겠지만 없기 때문에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나도 나름대로 오래 산 것이다. - P20

윤서 덕분에 알게 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말수가 적은 어린이는 ‘말하기‘가 아닌 ‘듣기‘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느라 애쓴 동안 윤서는 듣느라 애썼을 것이다. - P38

말하기를 좋아하는 어린이는 자기를 잘 드러낸다. 어른들도 이런 어린이는 한 번이라도 더 보게 된다. 그에 비해 말수가 적은 어린이는 눈에 띄지 않는다. 조용하기 때문이다. 내가 으레 ‘어린이는 떠들게 마련이다‘라고 생각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 P38

말수가 적은 어린이는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오해도 종종 받는다. 그런데 자신을 꼭 말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림이나 연주도 표현의 도구가 된다. 어떤 어린이는 무언가가 표현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평소에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어린이가 잠자리에 들면서 낮에 본 책 얘기를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 어린이가 하루 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물론 잊고 있다가 잠들기 전에 퍼뜩 그림책의 한 장면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어린이가 말하지 않는 동안에도 어떤 느낌이나 아이디어는 어린이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책을 매개로 어린이를 만나기 때문에 책과 관련된 것만 겨우 엿볼 뿐, 어린이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헤아릴 방법이 없다. 그 마음속의 일을 바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린이가 ‘답답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P40

나 자신이 말하기를 좋아하고 말하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좋은 말하기가 말수에 달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수 적은 나의 ‘어른‘ 친구들이 그 증거다. 나는 그들이 내 말을 들어주는 것만큼이나 그 ‘적은 말‘을 내게 들려주는 것이 늘 고맙다. 솔직히 말수 적은 게 멋있어 보여서 따라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늘 실패한다. 그런 것은 타고나는 모양이다. 대신 이따금 그 친구들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본다. 아마도 조용한 어린이였겠지. 오해를 받아 속상하고 답답할 때도 있었겠지만 대체로는 괜찮았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익숙한 고요함 속에서 자기를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멋있는 사람들이 되었겠지. 그러니까 말수가 적은 어린이도 괜찮을 것이다. - P42

어린이에게 친구란 단순한 ‘놀이 대상‘이 아니다. 경험과 지식수준이 비슷한 사람, 학교생활 같은 중대한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 사회적인 위치가 비슷한 사람이다. 친구들끼리는 비슷한 것을 알고 비슷한 것을 모른다. 자기들만 아는 순간과 농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은 물론이고 자매 형제와도 온전히 나눌 수 없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친구와는 나눌 수 있다. 어린이가 ‘친구‘와 놀고 싶은 건 그래서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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