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권도 더는 올려둘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내 방의 침대 둘을 합쳐 그 위로 관 뚜껑처럼 닫집 형태의 선반을 짜 넣었고, 거기에 지난 삼십오 년 동안 찾아낸 2톤의 책을 쌓아두었다. 잠이 들면 끔찍한 악몽처럼 나를 짓눌러오는 책들이다······ 나는 잠결에 돌아눕거나 잠꼬대를 하거나 몸을 뒤척이다가 책들이 미끄러져내리는 소리에 질겁하곤 한다. 몸이 살짝 스치거나 소리만 질러도 눈사태처럼 책들이 선반에서 와르르 떨어져 나를 덮칠 것이다. 풍요의 뿔에 담겨 있던 희귀한 책들이 쏟아져내려 나를 한 마리 이처럼 뭉개놓고 말 것이다. - P33

변두리 구역으로 돌아온 나는 그곳에서 소시지 하나를 샀다가 깜짝 놀랄 일을 겪었다. 소시지를 입으로 가져갈 필요도 없이, 그저 턱을 내리기만 해도 소시지가 내 뜨거운 입술에 와닿는 게 느껴졌다. 소시지를 내 허리 높이에 잡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경악했다. 소시지 한쪽 끝이 신발에 닿을락 말락 했다. 양손으로 잡고 보면 그저 보통 크기의 소시지였다. 결국 내 키가 줄어들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내 몸이 찌부러진 거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주방 문틀을 가린 백여 권의 책을 치웠다. 내 키를 날짜와 함께 잉크로 표시해둔 문틀이었다. 문설주에 등을 붙이고 책을 갖다대어 키를 잰 뒤 돌아서서 선을 그었다. 팔 년 새에 9센티미터가 줄었다는 걸 맨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침대 위로 솟은 책들의 천개를 올려다본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2톤짜리 닫집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무게에 짓눌려 내 몸이 구부정해진 것이다. - P39

어쨌거나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단연 하수구 청소부들이다.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두 사람은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에 대한 책을 쓴다. […] 그런데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인간의 전쟁만큼이나 전면적인 회색 쥐들과 검은 시궁쥐들의 전쟁과 관련해 그들이 쓴 기사였다. 그 전쟁 중 하나가 회색 쥐들의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린 참이었다. 쥐들이 지체 없이 두 개의 무리, 두 개의 종족, 두 개의 조직화된 사회로 나뉘어 싸웠던 것이다.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에서는 쥐들이 생사를 건 대전쟁을 벌이는데, 승리하는 쪽이 포드바바까지 흘러가는 배설물과 오물을 전부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변증법의 논리대로 승자가 다시 두 진영으로 나뉜다는 것도 그 고매한 하수구 청소부들이 내게 알려주었다. 기체나 금속을 비롯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투쟁을 통해 생명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분열을 겪듯이 말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가 이루어지며, 세상이 통째로 휘청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정신의 투쟁 역시 여느 전쟁 못지않게 끔찍하다, 라고 한 랭보의 말이 적확하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 P43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은 내가 헤겔에게서 배운 것들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소름 끼치는 일은 굳고 경직되어 빈사 상태에 놓이는 것인 반면, 개인을 비롯한 인간 사회가 투쟁을 통해 젊어지고 삶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단 한 가지 기뻐할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 P44

수도의 하수구에서 두 패로 나뉜 쥐들이 서로 밀어내며 어이없는 전쟁을 벌이는 동안, 추락한 천사들이 각자의 지하실에서 일하고 있다. 전투에서 패한 교양인들이다. 한 번도 이 전투에 가담한 적이 없지만 세상을 완벽히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다. - P46

나는 폐지를 압축한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반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 만차는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잘못이 아닌 치욕을 견뎌야 했다. 그녀에게 닥친 일은 인간적인, 지나치게 인간적인 일이었다. 그런 일을 두고 괴테라면 울리케 폰 레베초프를 용서해주었겠고, 셸링이라도 카롤리네를 용서해주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라면 그의 아름다운 정부 조피 샤를로테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고, 과민한 횔덜린 역시 곤타르트 부인에게 그랬을 테지만······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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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본가를 떠날 때 아버지가 그랬다.
"힘들 때는 너를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을 최우선으로 둬라. 이제 네가 네 보호자다."
아버지의 편지에도 비슷한 글이 남아 있다.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있어요, 아버지. 내가 내 보호자라는 게 가끔 쓸쓸하지만, 뭘 잃는지도 모르면서 재차 잃어가고 있지만, 이제 잠결에 돌아누우며 웃기도 하니까요. - P198

주디스 버틀러가 그랬다. ‘나는 누구인가‘ 말고 ‘함께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그는 ‘언어 사이에서 이동하는 법‘을 제안한다. 언어 사이를 이동하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 견딜 수 없이 졸린다. 불덩이를 끌어안은 것처럼 홧홧하다. 진흙을 씹은 것처럼 침을 모은다. 뱉는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함께하는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존재들. 도무지 회복되지 못하고 그렇게까지. - P199

지속적으로 피로하고, 노력이 필요한 일에 무력감을 느끼고, 장애에 직면했을 때 혼란을 느끼며 현실과 현재에 동화할 수 없는 곤란함,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현실 기능‘이라고 하는 것이 상실된 상태. 자넷이라는 연구자에 따르면 이는 노이로제의 특징이다. 노이로제라니. 나는 속으로 조금 발끈해서 이 상태를 자넷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자넷은 자주 슬퍼하고 불안해하며 발작적 근심에 휩싸여 다시 슬퍼진다. 걱정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걱정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걱정이다. 걱정을 많이 하는 나를 걱정한다. 내가 지렁이 같다. 말 대신 꿈틀. 말없이 걱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침묵으로 쓰는 법, 숭고한 걱정을 쓰는 법을. 새벽이 조용히 뜨거워진다. 자글자글 끓는 소란도 없이 이상하게 묵음으로 불탄다. - P204

마흔셋에 명을 달리한 아버지를 둔 친구는 얼마 전 만 사십 세를 맞아 우리에게 오랜 불안을 고백하고 와르르 울었다. 사십대를 살아 낼 자신이 없다고 했다. 누구도 그런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살아낼 자신이 필요한 만큼 불안하다는 의미였을 텐데 그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 중에는 아는 이가 없었기에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 가만 그의 등을 쓸었다. 살 자신 같은 건 누구도 없을지 몰라. - P209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어. 빨리 먹어야 해."
"고마워. 이건 제주에서 아는 사람이 사온 감귤초콜릿이야. 줄게."
"안 돼, 그럼 선물이 아니라 교환이 되잖아." - P210

감귤초콜렛을 그대로 들고 집으로 오는데 그가 한 말들이 코끼리와 삼십 분에 찰싹 달라붙었다. 삼십 분, 한 시간의 반, 다 왔다는 뜻, 네 다리로 우뚝 서 첫걸음을 걷는 코끼리, 그래, 다 왔어. 엄마에게 출산을, 아이에게 세상을 맞교환한 순간에서부터 그 생명이 세상을 꽉 채우기 위해 일어서기까지 삼십 분. 그러네, 말이 되네. 나만 말이 되나? 신이 허락한 음식으로 둘러싸인 상점 주인의 말이니 의미가 있겠지. 그도 몸이 둘이어서 진실을 담는 몸과 진실을 피하는 몸으로 나누어 사는지도 모른다. 그 무게가 너무 달라 한쪽이 깃털처럼 가벼워졌을 뿐일지도. 삼십 분이 지났다. 교환에서 선물이 되는 길을 나선다. 아기코끼리처럼 우선 일어나. - P212

내가 일찍 자리를 뜨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마주 앉아 그는 재차 물었다. 기분이 상했다고 덧붙이면서. 자기는 사람에게 실패하고 동물에게 대리만족하는 부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
사람은 사람과 살아야죠.
지겨울 정도로 그러고 있다고 말하는 대신 나는 왼쪽 손목을 긁었던가. 사람이기가 지독하다. 지긋지긋하다. 사람은 사람과 살아야죠. 이 새벽의 고통을 언어화하면 그랬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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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경에 처한 소장이 이따금 갈퀴로 폐지 사이에 길을 내고는 화가 나 벌게진 얼굴을 뚜껑 문 안으로 들이밀며 나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탸. 거기 있나? 맙소사, 책에 한눈팔지 말고 좀 움직여봐! 마당이 종이로 뒤덮였는데 자넨 밑에서 바보 같은 짓거리에나 빠져 있긴가!" 그러면 종이 더미 발치에 있던 나는 손에 책을 든 채 수풀 속에 숨은 아담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고 겁에 질린 시선으로 낯선 주변 세계를 둘러본다. 한 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 P18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나도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가방에 책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줄 책들. - P19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와 어슴푸레한 여명 속에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의자에 앉아 있다. 무릎을 스치는 축축한 내 입술이 느껴진다. 그런 식으로만 나는 잠들 수 있다. 그렇게 자정까지 몸을 웅크린 채 있기도 한다. 잠에서 깨어 머리를 들면 바지의 무릎 부위가 침에 축축이 젖어 있다. 단단히 사리고 똬리를 튼 내 몸은 겨울철의 새끼 고양이나 흔들의자 나무를 같다. 한 번도 진짜로 버림받아본 기억이 없는지라 그렇게 나 자신을 방기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 P21

기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내 안에는 이미 불행을 냉정하게 응시하고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자리했다. 그렇게 나는 파괴 행위에 깃든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열차의 차량들에도 화물을 실었고, 수많은 열차가 킬로그램당 1코루나에 팔릴 짐을 싣고 서방으로 떠나갔다! 나는 가로등에 기대서서 마지막 차량의 후미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 광경을 응시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신의 기마상을 산산조각내려고 총을 겨눈 프랑스 군인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이 순간의 나처럼 다빈치 역시 거기 남아 그 끔찍한 광경을 주의깊고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았겠지. 하늘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고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 P26

장의사 인부가 뼈를 추려 곱게 갈아서 어머니의 마지막 유해를 철제 상자에 담았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기차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킬로그램당 1코루나에 팔릴 굉장한 화물을 싣고 떠났을 때처럼. 그 순간 머릿속에는 칼 샌드버그의 시구만 맴돌았다. 사람에게서 남는 건 성냥 한 갑을 만들 만큼의 인과, 사형수 한 명을 목매달 못 정도 되는 철이 전부라는. - P28

그 무렵 압축기로 책들을 압축하노라면, 덜컹대는 고철의 소음 속에서 20기압의 힘으로 그것들을 짓이기고 있노라면, 인간의 뼛조각 소리가 들리곤 했다. 마치 고전 작품들의 뼈와 해골을 압축기에 넣고 갈아댄다고나 할까. 탈무드의 구절들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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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P9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 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식으로 나는 단 한 달 만에 2톤의 책을 압축한다. - P10

이제는 내 뇌가 압축기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사고로 형성되어 있다는 걸 깨닫는다. 머리털이 모두 빠져버린 내 머리는 알리바바의 동굴이다. 모든 사고가 오로지 인간의 기억 속에만 각인되어 있던 시절은 지금보다 훨씬 근사했을 것이다. 그 시절엔 책을 압축하는 대신 인간의 머리를 짜내야 했겠지. 하지만 그래봐야 부질없는 건, 진정한 생각들은 바깥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국수 그릇처럼 여기, 우리 곁에 놓여 있다. 세상의 종교재판관들이 책을 태우는 것도 헛일이다. 가치 있는 무언가가 담긴 책이라면 분서의 화염 속에서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 P10

진정한 책에 내 눈길이 멎어 거기 인쇄된 단어들을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대기 속에서 파닥이다 대기 중에 내려앉는 비물질적인 사고들뿐이다. 대기에서 자양분을 얻고 다시 대기로 돌아가는 사고들. 면병 속에 있으면서도 없는 성혈처럼 만사는 결국 공기에 불과하니까. - P11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가 반드시 신사이거나 살인자일 필요는 없다는 헤겔의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라면,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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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이가 미워지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어른스럽게 대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미운 모습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고 그런 걸 마주하면 불편한 게 당연하다. 그래도 나는 어른이니까 그 상황을 감당해야 한다. 생겨난 미움을 잘 처리하고 새 얼굴로 어린이를 보고 한번 더 어린이를 다독이는 것이 어른의 몫이다. 그런 어른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다. 이론서에서 읽은 적은 없지만, 그것만은 분명히 안다. - P286

사실 나는 동심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늘 조심스럽다. 어린이라는 존재를 또렷이 드러내는 ‘어린이‘라는 말은 환영하면서 ‘어린이의 마음‘을 가리키는 말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다. 단어 자체로 보면 어린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 하고자 하는 바를 뜻하는 말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 문제는 이 말이 쓰일 때는 주로 어린이의 밝고 착한 마음과 순진하고 귀여운 생각 등 긍정적인 뜻만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동심‘ ‘동심을 지켜준다‘처럼. - P290

동심에 대한 오해는 결국 어린이를 어른의 세계와 떼어 놓는다. 어린이가 옳은 마음이나 천진한 낙관을 보여줄 때 단지 어려서, 순진해서, 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심은 찬미되는 만큼이나 무지하고 현실 감각이 없는 것, 철없는 생각으로 치부될 때가 많다.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릴 수밖에 없고, 잃어버려야 성숙해지는 무언가로. 나 역시 어른이 미성숙한 행동에 동심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면 눈살이 찌푸려졌고,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에 집착하는 것도 경계해왔다. 어른에게는 어른의 몫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어린이의 마음은 대상화될 수밖에 없는 걸까? - P292

곰곰이 따져보니 우리 몸과 마음은 성장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몸의 성장은 자연의 일이고 나이와 상관이 있다. 일정한 방향이 있고 어느 순간 멈추며 그다음에는 소멸을 향해 간다. 마음은 그렇지 않다. 몸과 달리 자랐다가 뒷걸음치기도 한다. 정체기를 겪기도 하고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갑자기 도약하기도 한다. 사람마다 성장을 맞이하는 시기도 모습도 다르다. 그러니 어린이의 마음이라고 해서 꼭 어른보다 미숙한 것은 아니다. - P293

말장난 같지만 마음이 자란다는 것은 전 단계의 마음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동심원을 그리는 것이다. 어린이의 마음을 가장 안쪽에 두고, 차차 큰 원을 그려가는 것. 정확히 말하면 원은 아닐 수도 있다. 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면 어느 부분은 푹 꺼지고 어느 부분은 부풀어 올라 모양이 좀 이상한 도형이 되어 있다. 어린 시절 중에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깊은 골짜기들도 있다. 어느 부분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지만 나중에 열심히 메워서 꽤 괜찮은 모양으로 만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라는 사람의 안 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어린이의 마음이 있다. 내내 그 마음만 들여다보고 살아도 곤란하지만 결코 잊으면 안 된다. 내 삶은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93

혹시 나는 ‘나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말 뒤로 숨었던 게 아닐까? 나 자신도 어른이면서 아닌 척하느라고, 겸손한 외양을 하고 존경하는 어른의 이름을 읊어온 것 아 닐까? 그분들을 마음으로부터 공경하는 것과 별개로, 그렇게 ‘좋은 어른‘이 되는 건 먼 훗날의 일로 미룬 것 같다. 어른이 된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 말은 ‘훌륭한 어른‘한테 여러 책임을 떠넘겼다는 뜻도 된다. 내 생각이 지 나친 걸까? - P303

정확하게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어린이들은 대체로 어른들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이 어른의 권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돌보고 책임지는 권위다. 그리고 내게는 그런 모습이 어린이가 어른에 속해 있는 게 아니라 어른에게 기대어 있는 장면으로 보인다. 나는 어른이니까 어린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옳다. 내가 먼저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어른 뒤에 숨지 말고, 그분들한테 기대어서. - P304

사춘기가 시작되고 친구 문제로 고생하는 아이들에게는 "선생님도 어렸을 땐 친구가 별로 없었다, 지금 친구들은 다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들이다" 하고 위로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별로 가닿지 않는다는 걸 안다. 아이들한테 어른이 된다는 건 얼마나 까마득한 일인가. 한번은 친구 문제로 애먹는 중학생 재연이한테 "근데 친구가 그······ 꼭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 언제 천천히 생기면 좋겠지만······ 이게 또 운이잖아? 그래도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이 쌓이면 그······ 확률이 올라가는 거지. 마음이 맞고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찾으면 잘 지내다가 천천히 친구가 되어도 되는 것 같고······ 아니 근데 아니어도 되는데······ 재연아, 내가 중학생 딸이 없어서 진짜 말을 잘 못 해주겠다"라고 얼버무렸다. 그날 재연이는 집에 가면서 "요즘 들은 말 중에 제일 말이 되는 말 같아요"라고 했다. - P316

아이들한테 어른이 된다는 건 얼마나 까마득한 일인가. - P317

친구가 많다는 말을 들은 날, 나는 재연이한테 했던 말 중에 하나를 취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꼭 필요한 것 같긴 하다고. 근데 언제 누구와 만날지 모르니까, 독서 교실 구경의 날 만난 내 친구처럼 착하고 멋있게 자라고 있으라고. 어린이들이 친구를 원하는 만큼,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 친구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한 수고를 할 가치는 충분하다. 친구 덕분에 나도 계속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게 되니까. - P318

그런데 ‘친절을‘에는 왜 ‘베풀다"가 붙을까? 주다‘ 정도면 좋을 텐데. 너무 거창한 것 같아서 ‘베풀다‘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니까 표현이 잘 되지 않는다. 아무튼 내가 용기를 내면서까지 누군가에게 친절을 드리는 이유는 그게 나에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기쁨, 뿌듯함, 효능감, 자신감 등 좋은 감정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기분은 남에게 친절을 줄 때만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작은 친절도 결코 공짜가 아니다. 늘 후한 값을 매겨준다. - P322

날마다 보는 험악한 뉴스만큼, 험악한 뉴스에 무감해지는 나 자신에게 겁이 난다. 그럴 때 친절해지기로 한 번 더 마음을 다진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주려면 상황 파악도 잘 해야 되고, 용기도 내야 한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낼 수 있는 용기는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소중히 여기려고 한다.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게 ‘친절함‘이라면 나는 그에 걸맞은 판단력도, 용기도 갖고 있을 테니까. 언제까지나 다정하고 용감한 어른이 되고 싶다. 그게 나의 장래희망이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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