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이가 미워지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어른스럽게 대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미운 모습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고 그런 걸 마주하면 불편한 게 당연하다. 그래도 나는 어른이니까 그 상황을 감당해야 한다. 생겨난 미움을 잘 처리하고 새 얼굴로 어린이를 보고 한번 더 어린이를 다독이는 것이 어른의 몫이다. 그런 어른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다. 이론서에서 읽은 적은 없지만, 그것만은 분명히 안다. - P286
사실 나는 동심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늘 조심스럽다. 어린이라는 존재를 또렷이 드러내는 ‘어린이‘라는 말은 환영하면서 ‘어린이의 마음‘을 가리키는 말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다. 단어 자체로 보면 어린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 하고자 하는 바를 뜻하는 말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 문제는 이 말이 쓰일 때는 주로 어린이의 밝고 착한 마음과 순진하고 귀여운 생각 등 긍정적인 뜻만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동심‘ ‘동심을 지켜준다‘처럼. - P290
동심에 대한 오해는 결국 어린이를 어른의 세계와 떼어 놓는다. 어린이가 옳은 마음이나 천진한 낙관을 보여줄 때 단지 어려서, 순진해서, 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심은 찬미되는 만큼이나 무지하고 현실 감각이 없는 것, 철없는 생각으로 치부될 때가 많다.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릴 수밖에 없고, 잃어버려야 성숙해지는 무언가로. 나 역시 어른이 미성숙한 행동에 동심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면 눈살이 찌푸려졌고,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에 집착하는 것도 경계해왔다. 어른에게는 어른의 몫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어린이의 마음은 대상화될 수밖에 없는 걸까? - P292
곰곰이 따져보니 우리 몸과 마음은 성장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몸의 성장은 자연의 일이고 나이와 상관이 있다. 일정한 방향이 있고 어느 순간 멈추며 그다음에는 소멸을 향해 간다. 마음은 그렇지 않다. 몸과 달리 자랐다가 뒷걸음치기도 한다. 정체기를 겪기도 하고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갑자기 도약하기도 한다. 사람마다 성장을 맞이하는 시기도 모습도 다르다. 그러니 어린이의 마음이라고 해서 꼭 어른보다 미숙한 것은 아니다. - P293
말장난 같지만 마음이 자란다는 것은 전 단계의 마음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동심원을 그리는 것이다. 어린이의 마음을 가장 안쪽에 두고, 차차 큰 원을 그려가는 것. 정확히 말하면 원은 아닐 수도 있다. 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면 어느 부분은 푹 꺼지고 어느 부분은 부풀어 올라 모양이 좀 이상한 도형이 되어 있다. 어린 시절 중에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깊은 골짜기들도 있다. 어느 부분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지만 나중에 열심히 메워서 꽤 괜찮은 모양으로 만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라는 사람의 안 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어린이의 마음이 있다. 내내 그 마음만 들여다보고 살아도 곤란하지만 결코 잊으면 안 된다. 내 삶은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93
혹시 나는 ‘나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말 뒤로 숨었던 게 아닐까? 나 자신도 어른이면서 아닌 척하느라고, 겸손한 외양을 하고 존경하는 어른의 이름을 읊어온 것 아 닐까? 그분들을 마음으로부터 공경하는 것과 별개로, 그렇게 ‘좋은 어른‘이 되는 건 먼 훗날의 일로 미룬 것 같다. 어른이 된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 말은 ‘훌륭한 어른‘한테 여러 책임을 떠넘겼다는 뜻도 된다. 내 생각이 지 나친 걸까? - P303
정확하게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어린이들은 대체로 어른들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이 어른의 권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돌보고 책임지는 권위다. 그리고 내게는 그런 모습이 어린이가 어른에 속해 있는 게 아니라 어른에게 기대어 있는 장면으로 보인다. 나는 어른이니까 어린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옳다. 내가 먼저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어른 뒤에 숨지 말고, 그분들한테 기대어서. - P304
사춘기가 시작되고 친구 문제로 고생하는 아이들에게는 "선생님도 어렸을 땐 친구가 별로 없었다, 지금 친구들은 다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들이다" 하고 위로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별로 가닿지 않는다는 걸 안다. 아이들한테 어른이 된다는 건 얼마나 까마득한 일인가. 한번은 친구 문제로 애먹는 중학생 재연이한테 "근데 친구가 그······ 꼭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 언제 천천히 생기면 좋겠지만······ 이게 또 운이잖아? 그래도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이 쌓이면 그······ 확률이 올라가는 거지. 마음이 맞고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찾으면 잘 지내다가 천천히 친구가 되어도 되는 것 같고······ 아니 근데 아니어도 되는데······ 재연아, 내가 중학생 딸이 없어서 진짜 말을 잘 못 해주겠다"라고 얼버무렸다. 그날 재연이는 집에 가면서 "요즘 들은 말 중에 제일 말이 되는 말 같아요"라고 했다. - P316
아이들한테 어른이 된다는 건 얼마나 까마득한 일인가. - P317
친구가 많다는 말을 들은 날, 나는 재연이한테 했던 말 중에 하나를 취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꼭 필요한 것 같긴 하다고. 근데 언제 누구와 만날지 모르니까, 독서 교실 구경의 날 만난 내 친구처럼 착하고 멋있게 자라고 있으라고. 어린이들이 친구를 원하는 만큼,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 친구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한 수고를 할 가치는 충분하다. 친구 덕분에 나도 계속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게 되니까. - P318
그런데 ‘친절을‘에는 왜 ‘베풀다"가 붙을까? 주다‘ 정도면 좋을 텐데. 너무 거창한 것 같아서 ‘베풀다‘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니까 표현이 잘 되지 않는다. 아무튼 내가 용기를 내면서까지 누군가에게 친절을 드리는 이유는 그게 나에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기쁨, 뿌듯함, 효능감, 자신감 등 좋은 감정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기분은 남에게 친절을 줄 때만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작은 친절도 결코 공짜가 아니다. 늘 후한 값을 매겨준다. - P322
날마다 보는 험악한 뉴스만큼, 험악한 뉴스에 무감해지는 나 자신에게 겁이 난다. 그럴 때 친절해지기로 한 번 더 마음을 다진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주려면 상황 파악도 잘 해야 되고, 용기도 내야 한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낼 수 있는 용기는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소중히 여기려고 한다.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게 ‘친절함‘이라면 나는 그에 걸맞은 판단력도, 용기도 갖고 있을 테니까. 언제까지나 다정하고 용감한 어른이 되고 싶다. 그게 나의 장래희망이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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