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본가를 떠날 때 아버지가 그랬다. "힘들 때는 너를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을 최우선으로 둬라. 이제 네가 네 보호자다." 아버지의 편지에도 비슷한 글이 남아 있다.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있어요, 아버지. 내가 내 보호자라는 게 가끔 쓸쓸하지만, 뭘 잃는지도 모르면서 재차 잃어가고 있지만, 이제 잠결에 돌아누우며 웃기도 하니까요. - P198
주디스 버틀러가 그랬다. ‘나는 누구인가‘ 말고 ‘함께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그는 ‘언어 사이에서 이동하는 법‘을 제안한다. 언어 사이를 이동하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 견딜 수 없이 졸린다. 불덩이를 끌어안은 것처럼 홧홧하다. 진흙을 씹은 것처럼 침을 모은다. 뱉는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함께하는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존재들. 도무지 회복되지 못하고 그렇게까지. - P199
지속적으로 피로하고, 노력이 필요한 일에 무력감을 느끼고, 장애에 직면했을 때 혼란을 느끼며 현실과 현재에 동화할 수 없는 곤란함,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현실 기능‘이라고 하는 것이 상실된 상태. 자넷이라는 연구자에 따르면 이는 노이로제의 특징이다. 노이로제라니. 나는 속으로 조금 발끈해서 이 상태를 자넷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자넷은 자주 슬퍼하고 불안해하며 발작적 근심에 휩싸여 다시 슬퍼진다. 걱정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걱정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걱정이다. 걱정을 많이 하는 나를 걱정한다. 내가 지렁이 같다. 말 대신 꿈틀. 말없이 걱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침묵으로 쓰는 법, 숭고한 걱정을 쓰는 법을. 새벽이 조용히 뜨거워진다. 자글자글 끓는 소란도 없이 이상하게 묵음으로 불탄다. - P204
마흔셋에 명을 달리한 아버지를 둔 친구는 얼마 전 만 사십 세를 맞아 우리에게 오랜 불안을 고백하고 와르르 울었다. 사십대를 살아 낼 자신이 없다고 했다. 누구도 그런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살아낼 자신이 필요한 만큼 불안하다는 의미였을 텐데 그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 중에는 아는 이가 없었기에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 가만 그의 등을 쓸었다. 살 자신 같은 건 누구도 없을지 몰라. - P209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어. 빨리 먹어야 해." "고마워. 이건 제주에서 아는 사람이 사온 감귤초콜릿이야. 줄게." "안 돼, 그럼 선물이 아니라 교환이 되잖아." - P210
감귤초콜렛을 그대로 들고 집으로 오는데 그가 한 말들이 코끼리와 삼십 분에 찰싹 달라붙었다. 삼십 분, 한 시간의 반, 다 왔다는 뜻, 네 다리로 우뚝 서 첫걸음을 걷는 코끼리, 그래, 다 왔어. 엄마에게 출산을, 아이에게 세상을 맞교환한 순간에서부터 그 생명이 세상을 꽉 채우기 위해 일어서기까지 삼십 분. 그러네, 말이 되네. 나만 말이 되나? 신이 허락한 음식으로 둘러싸인 상점 주인의 말이니 의미가 있겠지. 그도 몸이 둘이어서 진실을 담는 몸과 진실을 피하는 몸으로 나누어 사는지도 모른다. 그 무게가 너무 달라 한쪽이 깃털처럼 가벼워졌을 뿐일지도. 삼십 분이 지났다. 교환에서 선물이 되는 길을 나선다. 아기코끼리처럼 우선 일어나. - P212
내가 일찍 자리를 뜨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마주 앉아 그는 재차 물었다. 기분이 상했다고 덧붙이면서. 자기는 사람에게 실패하고 동물에게 대리만족하는 부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 사람은 사람과 살아야죠. 지겨울 정도로 그러고 있다고 말하는 대신 나는 왼쪽 손목을 긁었던가. 사람이기가 지독하다. 지긋지긋하다. 사람은 사람과 살아야죠. 이 새벽의 고통을 언어화하면 그랬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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