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은 어때? 너무 두껍게 되지 않았어? 눈썹 너무 진한 거 아냐?"
"아니, 딱 좋아. 그렇게 해야 사진이 예쁘게 나와." 세상에 우리 엄마만큼 내 기분을 있는 대로 잡쳐놓을 수 있는 신랄한 사람도 없지만, 또 우리 엄마만큼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피터조차도 그렇게는 못했다. 나는 언제나 엄마가 하는 말을 마음속 깊이 믿었다. 내 머리가 조금이라도 헝클어졌거나 화장이 진하게 됐을 때 내게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줄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엄마가 고쳐주기를 계속 기다렸지만 엄마는 아무 지적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약간 멍한 표정으로 웃고만 있었다. 어쩌면 약에 취해 제대로 분간을 못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소한 비판이 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내심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 P240

"여태까지 나는 내가 결혼이란 걸 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 해본 적이 없었어. 하지만 지난 6개월 동안, 상대가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함께 있어준다는 약속을 지킨다는 게 어떤 뜻인지 직접 겪고 나서 보니,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한 내가 이렇게 여기에 서 있게 됐구나.
나는 사랑은 행위이고, 본능이고, 계획하지 않은 순간들과 작은 몸짓들이 불러일으키는 반응이며,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아프다는 걸 알고 나서 혼자 브루클린 창고에 누워 있는 나의 손을 잡아 주려고 이 남자가 일이 끝난 새벽 세시에 뉴욕까지 차를 몰고 달려왔을 때, 사랑이 바로 이런 거란 걸 더없이 절실히 느꼈노라고 말했다. 내가 필요할 때마다 이 남자는 몇 번이고 5천 킬로미터라는 거리를 날아 내게로 와주었고, 6월부터는 연일 하루에 다섯 번씩 해대는 전화를 받아 참을성 있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우리 결혼이 좀더 이상적인 환경에서 시작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내 앞에 놓인 미래를 용감하게 걸어 나가는 데 오직 이 남자 하나뿐이면 된다는 확신을 준 게 바로 이 시련이었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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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글학교 밖에서는 한국인 친구가 없었다. 저녁식사 시간이면 겉도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30분 동안 쉬는 시간마다 우리 놀이터가 되어준 주차장만 뱅뱅 돌았다. 농구대도 하나 있었는데 거긴 늘 나이 많은 남자아이들 차지였다. 나머지 아이들은 연석 위에 앉아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애썼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가 다 한국인이었다. 나는 그들이 두 이민자의 합동작전으로 갖추게 되었을 순종이라는 덕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들은 자기 엄마가 사준 선캡 모자를 군말 없이 쓰고 다녔고,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갔다. 기독교는 좁은 한국 지역사회에서 사실상 구심점 역할을 했지만, 엄마는 일찌감치 교회 에서 빠져나왔다. 십중팔구 내가 혼혈아로 태어나 자란 탓이었을 텐데, 어쨌든 나는 자꾸만 내 자신이 나쁜 아이처럼 느껴져 더 말썽을 피웠던 것 같다. 내가 버릇없이 굴면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이 계속 수업을 듣는 동안, 나를 한쪽 구석에서 손 들고 서 있게 했다. 아무튼 꾸준히 한글학교에 다닌 덕분에 나는 한국말을 잘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지만 어찌어찌 읽고 쓸 줄은 알게 됐다. - P140

병원 문을 나서는데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차에 온전히 혼자 있게 되자 그제야 하루종일 받은 충격이 몰려와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살면서 해온 모든 일이 터무니없이 이기적이고 하찮게 느껴졌다. 내 자신이 미웠다. 은미 이모가 아팠을 때 이모에게 날마다 편지를 쓰지도, 더 자주 전화하지도 않고, 나미 이모가 보호자 역할을 하느라 고생한 것을 충분히 헤아리지도 못한 내가 미워 죽을 것 같았다. 유진에 더 일찍 오지도, 진료 예약날에 같이 따라가지도 않고, 진작 주의를 기울여야 했을 증상들도 까맣게 몰랐던 내 모습도 미웠다.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겠지만, 내 증오는 이제 슬금슬금 아빠에게로, 여러 가지 경고를 귓등으로 흘린 아빠에게로 향했다.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 우리가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가기만 했어도 이런 고통은 피할 수 있었을 지 모르니까. - P147

나는 이제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바랐다. 부디 내가 대신 고통받을 방법이 있기를, 내가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는지 엄마에게 증명할 수 있기를, 엄마의 병상에 기어들어가 엄마에게 바짝 몸을 밀착시키기만 하면 그 무거운 짐을 내가 송두리째 흡수해버릴 수 있기를. 인생이 공평하려면 자식 된 도리를 다할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 같았다. […]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가까이에 누워 있는 것밖에 없었다. 엄마의 지원군이 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규칙적으로 느리게 울리는 기계 신호음과 나지막이 쌔근거리는 엄마 숨소리를 들으면서. - P149

아빠는 리스크가 크고 승산이 희박한 게임에서 전혀 달갑지 않은 파트너였다. 이 사람은 내 아빠였고 나는 아빠가 침착하게 나를 안심시켜주기를 바랐다. 나를 들들 볶아대서 이 절망스러운 길을 외롭게 걸어가도록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아빠 앞에서 울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아빠는 분명 내 슬픔에 자기 슬픔을 얹을 터였다. 누가 엄마를 더 사랑하는지, 누가 더 상실감이 클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호소하면서. 게다가 아빠는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까지 집이 떠나가라 말해서 내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놓았다. 엄마가 이 병을 이겨 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어쩌면 이제 엄마 없이 우리 둘만 달랑 남게 될 수도 있다고. - P154

나는 엄마 옆에 쭈그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는 엄마를 감싸안았다. 나 또한 몰라볼 정도인 거울 속 모습에, 우리 인생에 들어온 이 거대한 악마의 물리적 현현에, 나도 엄마와 같이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나는 몸이 뻣뻣해지고, 심장이 단단해지며, 감정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내 안의 목소리가 명령했다. ‘울면 안 돼. 네가 울면 지금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아. 네가 울면 엄마는 울음을 멈추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울음을 삼키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의의 거짓말로 엄마를 달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진심으로 그걸 믿게 하려고.
"그냥 머리카락이잖아, 엄마. 금방 다시 자랄 거야." - P158

사춘기란 그런 것이었다. 중학교라는 사회화 훈련 시설에서 시작되는 하나의 거대한 자학적인 농담. 중학교는 아이들이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민감한 3년이라는 시간을 견디는 곳이다. 이미 D컵 브라를 입을 정도로 가슴이 커지고 오럴 섹스를 아는 여자아이들이, 갭에서 산 어린이 브라를 입고 아직도 만화 캐릭터와 사랑에 빠져 있는 여자아이들 옆에 앉아 있는 곳이다. 우리의 독특한 부분은, 다수가 생각하는 전형적이고 일반적인 아름다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부분은 고통스러운 마맛자국이 되어 자기부정이 유일한 치료법이 되는 때다. - P163

최악은 내가 ‘정미‘라는, 엄마의 이름을 딴 미들 네임이 없는 척했다는 점이다. 미셸 자우너 같은 이름은 서류상으로 보면 전혀 튀지 않는다. 나는 그 생략이 세련되고 현대적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극단적인 상황이라도 피하려는 듯이, 이를테면 사람들이 실수로 정미를 ‘차우멘‘이라고 발음하기라도 하면 또 다시 느끼게 될 굴욕감을 피하려는 듯이.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냥 한국인이 되는 게 곤혹스러워진 것이었다.
"학교에서 달랑 나 혼자 한국 사람이라는 게 어떤 기분인지 엄마는 몰라." 나는 엄마한테 불평을 쏟아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근데 너는 한국 사람이 아니야. 너는 미국 사람이잖아." - P166

"난······원숭이를 끝까지 데리고 갈래." 마침내 내가 결정을 내렸다.
"재밌네." 이모가 말했다. "음, 각 동물은 우리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상징해. 그러니까 네가 맨 처음에 버리는 것이 너한테 가장 덜 중요한 거지. 가장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는 것이 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거고. 사자는 자존심을 상징해. 넌 그걸 가장 먼저 버린 거야."
"그거 말 되네." 내가 말했다. "난 그게 다른 동물들을 몽땅 잡아먹어버릴까봐 걱정됐어. 자존심이 다른 중요한 것들을 잡아먹어버리듯이. 자존심이 너무 강하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수가 없잖아. 모든 게 자기 발밑에 있다고 느끼면 자기 일도 더 발전하기 어렵고." - P189

은미 이모는 유언으로 엄마가 교회에 나가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지만 엄마는 그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엄마는 가족 중 유일하게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 높은 차원의 힘이 있다고는 믿었지만 조직화된 종교에서 어떤 대상을 무작정 숭배하는 분위기는 좋아하지 않았다. 유진의 한인사회 대부분이 교회를 중심으로 강하게 결속돼 있었는데도.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신을 믿는단 말이니?" - P195

우리를 묶어줄 엄마가 사라지고 나면 아빠와 나는 거의 남남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우리는 암암리에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엄마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아빠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 두 사람은 계속 티격태격할 게 뻔했다. 가족이라는 닻이 올려지고 완전히 해체되어버릴 가능성이 다분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꾸짖어주길 기다렸다. 그분은 내 아빠라고, 내 핏줄이라고 뚝 잘라 말하길 기다렸다. 내가 이기적이라고, 평생 우리를 먹여 살린 사람에게 그러면 못쓴다고 말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말을 하는 대신 내 등에 가만히 손을 대고, 우리가 차마 서로 말 못 하고 있는 부분은 자기도 어쩔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너는 네 도리를 다할 거야." - P212

그때까지 나는 살아가기와 죽어가기는 명백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나는 식물인간으로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본 터였다.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이미 찢겨나간 육체적 자율성의 조각들은 하루하루 누더기 꼴이 되어갔고, 이제 살아가는 일과 죽어가는 일은 그 차이를 분 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엄마는 병상에 묶여 혼자 걸을 수도 없었고 각종 장기도 더는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음식도 팔에 연결된 수액 주머니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로 섭취하다가 이제는 기계의 도움 없이는 숨도 혼자 못 쉬는 지경에 이르렀다.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 모습에서 하루가 다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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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소리 없이 증식해 있던 호르몬 부대를 출동시켜 엄마 없이는 잠도 못 자던 아이를 엄마 손끝이 닿는 것조차 못 견뎌하는 10대로 바꿔놓은 터였다. 엄마가 내 스웨터에 묻은 보풀을 뜯어내거나, 견갑골 사이를 손바닥으로 꾹 눌러서 구부정한 등을 펴려 하거나,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질러 주름을 없애주려고 할 때마다 마치 뜨겁게 달군 다리미가 살갗을 누르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딴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다. 엄마가 사소한 제안만 하려 들어도 신경질이 팍 났다. 나의 분노와 예민함은 갈수록 심해져 틈만 나면 부글부글 끓다가 폭발하기 일쑤였다. 엄마가 다가오면 나는 단박에 진저리치면서 소리를 꽥 질렀다. "만지지 좀 마!" "나 좀 내버려둘 수 없어?" "주름 좀 있으면 어때,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걸 상기시켜 주는 건데." - P66

봄이 여름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고 사람들은 윗도리를 벗어서 팔에 걸치고 다녔다. 익숙한 근질거림이 스멀스멀 찾아왔다. 어떤 야생적인 상태—낮이 더 길어져 도시를 걷는 일이 아침부터 밤까지 마냥 기분좋기만 한 때, 모든 책임을 저 길가로 내던진 채 운동화를 신고 텅 빈 거리를 생각 없이 내달리고 싶은 그런 때—를 향한 갈망이었다. 하지만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충동을 외면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름방학이, 유유자적한 나날이 내게 더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조만간 뭔가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했다. - P72

어쩌면 엄마는 그동안 내가 원치 않는 무언가로 나를 만들어보려 한 자신의 노력이 결국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더이상 노력하기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차피 내가 이런 식으론 1년도 더 못 버티고 결국 엄마가 옳았다고 생각할 거라 믿고 전략을 더 세련된 걸로 바꿨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사이에 벌어진 5천 킬로미터라는 거리 때문에 그저 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나만의 길을 개척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았음을 비로소 받아들이고, 마침내 내가 어떻게든 잘해낼 거라고 믿게 된 건지도 모른다. - P84

피터는 뉴욕으로 차를 몰고 왔다. 피터는 두시에 식당 문을 닫자마자 바로 내달려 새벽 네시에 그레그의 집에 도착했다. 그러고선 끈적끈적한 블러드오렌지 마르가리타와 꾸덕꾸덕한 레프리토스 얼룩이 묻은 청바지 차림 그대로, 소파에 누운 내 옆으로 비집고 들어와, 내가 자신의 회색 대학 티셔츠에 얼굴을 파묻고 온종일 꽉꽉 억누른 감정을 기어이 쏟아낼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렸다. 피터가, 굳이 오지 말라고 한 내 말을 듣지 않아줘서 정말 고마웠다. 피터는 한참 지나서야 내게 말해주었다. 우리 부모님이 자신에게 먼저 전화했노라고. 엄마가 아프다는 걸 자신이 나보다 먼저 알았노라고. 내가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에 반드시 내 옆에 있겠다고 두 분에게 약속했노라고.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다 지나갈 때까지 자기가 내 옆에 있겠노라고. - P84

내가 집을 떠나 살아온 7년이라는 세월이 우리가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모두 치유해주었으리라고, 내 10대 시절을 짓누르던 엄마의 중압감을 깡그리 잊게 해주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엄마는 유진과 필라델피아 사이의 5천 킬로미터라는 거리에서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을 충분한 공간을 찾아냈고, 나 역시 줄기찬 비판의 목소리에서 벗어나 원 없이 창작 욕구를 발산한 덕분에 그간 엄마가 한 모든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결국 그 수고의 끝은 엄마가 없는 곳에서야 뚜렷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됐건만 아빠의 고백은, 그럼에도 엄마에겐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는 기억이 있음을 내비쳤다. - P87

콜레트 아주머니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니 엄마의 꿈이 궁금해졌다. 아무 목적도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가 갈수록 이상해 보이고 미심쩍고 심지어 반페미니스트로까지 보였다. 그때 나는 엄마 인생의 주축이던, 나를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으면서 그저 엄마를 매도하기 바빴다. 그 보이지 않는 고된 노동을, 자신만의 열정에 헌신하지도 않고 실용적인 기술 개발도 소홀히 한 전업주부가 남 뒷바라지나 하는 것이라고 폄하했다. 가정을 이룬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내가 그 속에서 받은 보살핌을 그동안 얼마나 당연하게 여겼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때는 집을 떠나 대학에 가고서 몇 년이 지난 뒤였다. - P92

당시에는 소수자 정서가 뭔지 몰랐다. 음악계에서 대표성을 둘러싼 토론은 이제 막 시작되던 참이었다. 나는 음악을 하는 다른 여자들은 잘 몰랐기에, 실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똑같은 문제로 씨름하는 여자들이 제법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같은 처지의 백인 남자는 어떨지 상상해 유추해볼 능력도 없었다. 그 남자가 이를테면 스투지스의 라이브 공연 DVD를 보면서, 이미 이기 팝이 있는데 음악계에 또다른 백인 남자가 설 자리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캐런 오는 음악에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해주었고, 나 같은 사람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를 주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게 만들었다. - P97

자신들이 직접 쓴 노래를 연주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누군가를 직접 보는 경험은 내게 계시와도 같았다. 투어 생활의 지속적인 고됨을 토로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도, 공연 예매한 걸 후회할지도 모르는, 기껏해야 서른 명도 안 돼 보이는 청중 앞에서 그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내가 이 사람과 무대를 했다니. 이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앉아 있었다니. 그때 예술가의 삶을 얼핏 본 기분이었다. 잠깐이었지만, 순간 그 길이 티끌만큼은 내게 더 가까워진 듯했다. - P105

엄마가 어떤 문제를 그처럼 오랫동안 숨기고 살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내가 지키려 했던 비밀은 모두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기만 했다. 하지만 엄마는 비밀을 지키는 데 희한한 재주가 있었다. 심지어 나한테까지도. 엄마는 아무도 필요치 않았다. 엄마는 자신에게 내가 얼마나 필요치 않은지를 보여주어 나를 충격에 빠뜨릴 수 있었다. 자기가 그러듯 항상 나만의 10퍼센트를 따로 남겨두라고 평생을 내게 가르쳐온 엄마지만, 그게 나한테까지 따로 남겨둔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으리라고는 그때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P116

이제 나는 기쁨과 긍정의 기운을 마구마구 내뿜을 것이고 그러면 엄마의 병이 나을 것이다. 엄마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입을 거고, 집안일을 군말 없이 싹 해치울 것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법을 배워 전부 해드릴 거다. 엄마가 시들어가는 것을 나 혼자 막아낼 것이다. 지금까지 엄마에게 진 빛을 낱낱이 갚을 것이고, 엄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전혀 안 와도 된다고 생각한 걸 후회하게 만들 거다. 완벽한 딸이 될 테다. - P117

엄마는 내 뒤 소파에 앉아, 내가 걸신이라도 들린 듯이 어귀어귀 먹는 동안 얼굴 쪽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어깨 뒤로 걷어주었다. 내 몸에 닿는 엄마 손길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살짝 끈적끈적한 크림기가 남아 있는 차가운 손은 더는 내가 화들짝 피하기 바쁜 불쾌한 손이 아니라 가만히 기대고 싶은 손이었다. 마치 엄마의 애정에 이끌리는 어떤 중심이 내 안에 새롭게 생겨난 것만 같았다. 내가 그 자기장에서 떠나 있었을 때까지 새롭게 충전된 중심이. 나는 또다시 엄마를 기쁘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동안 홀로서기하느라 좌충우돌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 엄마가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고, 그걸 달콤하게 음미하고 싶었다. 스웨터를 세탁기에 돌려 버려 두 치수 작게 쪼그라뜨린 일을, 점심을 먹으러 고급 식당에 갔다가 무료인 줄 알고 시켜 마신 탄산수에 12달러를 쓴 일을 재미나게 들려주고 싶었다. 엄마, 엄마가 옳았어, 라고 순순히 인정하고 투항하고 싶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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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트와 틸리가 시골길을 산책해요
모니카 쿨링 지음, 시드니 스미스 그림, 김난령 옮김 / 불광출판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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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사는 곳과 다른 곳을 동경하게 된다. 표지의 제목을 보면 액자 안에 적혀 있는데 이 책이 그랜트 우드의 화가가 되기 전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책이기 때문. 펼쳐보면 화풍이 따뜻하고 친근하며 독특하기까지 하다. 읽고나면 마음이 포근해지는 마법같은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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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어머니는 자기 수프에서 고깃조각들을 건져내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놓는다. 좀 피곤해 보이는 아들은 어머니에게 말도 별로 건네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먹기만 한다. 그에게 내가 지금 얼마나 우리 엄마를 그리워하는지 아느냐고 말해 주고 싶다. 어머니한테 더 잘 대해드리라고, 삶은 허망해 어머니가 언제 훌쩍 떠나가버릴지 알 수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으시게 하라고, 혹시 지금 어머니의 몸안에 작은 종양이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 반드시 확인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 P22

엄마의 사랑은 엄한 사랑 그 이상이었다. 무자비하고 단단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나약함이 설 자리는 털끝만큼도 내주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랑이었다. 제 아이한테 가장 좋은 게 뭔지 열 발짝 앞서서 보는 사랑, 그 과정에서 아이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개의치 않는 사랑이었다. 내가 다쳤을 때 엄마는 자신이 다친 것처럼 내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고, 다만 과잉 보호에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단언컨대 이 세상 누구도 우리 엄마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나는 그 사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 P34

"울긴 왜 울어! 네 엄마가 죽은 것도 아닌데."
우리집에선 이 표현을 자주 썼다. 엄마는 미국 격언에 대해 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자기만의 것을 몇 가지 만들어냈다. "오직 엄마만이 너한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어. 왜냐면 진짜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뿐이니까" 같은 말들을 엄마가 일찌감치 나에게 가르쳤던 것 중에 지금 생각나는 말은 이런 거다. "너의 10퍼센트는 따로 남겨두어라." 누군가를 아무리 깊이 사랑하더라도, 혹은 깊이 사랑받는다고 믿더라도 절대 네 전부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 항상 10퍼센트는 남겨두어라. 네 자신이 언제든 기댈 곳이 있도록."나도 네 아빠한테 내 맘을 온전히 다 내어주진 않는단다." 엄마는 이렇게 덧붙였다. - P35

엄마의 규칙과 기대는 내 진을 다 빼놨지만, 엄마에게서 벗어날라치면 혼자 알아서 놀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 내내 두 가지 충동이 분열된 채로 지냈다. 어느 날엔 결국 엄마에게 꾸중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타고난 선머슴 기질에 따라 행동했다가, 다음날엔 엄마에게 찰싹 달라붙어 엄마를 기쁘게 해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식이었다.
[…]
혼자 있는 동안 끊임없이 방을 치우고, 부모님의 짐 가방을 정리하고, 수건으로 가구를 구석구석 닦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두 분이 돌아와서 내가 한 일을 봐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지. 나는 바퀴 달린 어린이용 침대에 앉아 방문만 노려보고 있었다. 오직 두 분의 얼굴이 기쁘게 변하는 모습을 보겠다는 생각에, 내일 아침이면 청소부가 와서 치울 거라는 생각 따윈 꿈에도 하지 못한 채로. 부모님이 돌아와서 아무 변화도 감지하지 못하자,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방안 이리저리로 끌고 다니면서 내가 한 착한 일을 일일이 알려주었다. - P39

엄마는 다른 영역에서는 부모의 권위를 앞세웠지만 음식에 대해서만큼은 무척 관대했다.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절대 억지로 먹게 하지 않았고, 내 몫의 절반만 먹고 남겨도 결코 접시를 다 비우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음식은 즐기는 것이어야 하며 배가 부른데도 꾸역꾸역 밀어넣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유일한 규칙은 뭐든지 적어도 한 번은 맛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
우리 가족은 내 용기를 칭찬했고, 나 역시 스스로가 자못 자랑스러웠다. 그 순간의 무언가가 나를 새로운 길로 들여놓았다. 비록 착한 아이가 되는 일은 그리 순탄치 않았지만, 용감한 아이가 되는 것만은 제법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련된 입맛으로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 P42

부모님은 모두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자란 집은 책이나 레코드로 가득찬 집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예술작품 을 구경하거나 박물관에 가거나 그럴듯한 문화시설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호사를 누리지도 못했다. 우리 부모님은 아마 내가 읽어야 하는 작품의 작가나 내가 봐야 하는 외국 영화 감독의 이름 하나 몰랐을 것이다. 중학생이 된 내게 『호밀밭의 파수꾼』 구판본도 건네주지 않았고, 롤링스톤스 레코드판이든 뭐든 내가 문화적으로 성숙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어떤 학습 모델도 소개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두 분만의 방식 대로 쌓인 세상 경험이 풍부했다. 두 분은 세상을 실컷 구경했고, 세상이 제공하는 것들을 원 없이 맛보았다. 비록 고급문화에는 문외한이었지만 그 결핍을, 자신들이 어렵게 번 돈으로 세상 최고의 산해진미를 맛보는 것으로 만회했다. 나는 순대며 생선 내장이며 캐비아 같은 음식을 마음껏 맛보면서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다. 부모님은 맛있는 음식을 사랑했고, 그걸 만들고 찾아다니고 함께 즐겼으며, 나는 그들의 식탁에 초대 받은 특별 손님이었다. - P43

"엄마가 모자 한번 써보라 해도 너는 싫어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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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이돌로 살 수도 있겠다는 나의 희망은 그렇게 단박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잠깐이나마 나는 어쩌면 연예인이 될 기회를 노릴 수 있을 정도로 예쁜 아이였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한낱 그 중식당의 애완용 악어 신세가 됐을지도 모른다. 화려한 수조에 갇혀 사람들의 심심풀이 구경거리 노릇을 하다가, 나이들어 몸이 더는 수조에 맞지 않으면 인정사정없이 바로 치워지는 신세가. - P62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엄마는 완전히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엄마는 또렷한 한국말로 연신 "엄마, 엄마" 하고 울부짖었다. 엄마는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소파에 앉은 아빠 무릎에 기댄 채로 온몸을 들썩이며 흐느꼈고, 그런 엄마를 보면서 아빠도 같이 울었다. 그때 나는 엄마가 무서웠다. 그래서 할머니 방에 있던 엄마와 엄마의 엄마를 지켜보던 때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부모님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때까지 나는 엄마가 그처럼 적나라하게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자제하지 못하는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당시에는 엄마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 지금처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엄마는 어마어마한 상실의 영역으로 넘어갔지만 나는 아직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니까. 나는 엄마가 자기 엄마에게서 떨어져 지낸 그 모든 세월에 대해, 한국을 떠난 것에 대해 느꼈을지도 모를 죄책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의 내가 위로의 말을 듣고 싶어 하듯, 엄마도 그랬을 텐데 그때는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때는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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